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 궁리하는 과학 4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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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자연은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 자연은 생명을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것인 양 취급한다. 수백만 배로 번식하는 생명의 대부분은 곧 소멸하거나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된다. 바로 이것이 자연이 항상 새로운 생명형태들을 산출하는 숙달된 방법이다. 자연의 피조물들은 끝없는 투쟁 속에서 서로를 괴롭힘으로써 생존한다. 자연적인 사건은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가치는 찾아볼 수 없으며 특히 의미와 목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은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상 속에는 오로지 인과연결만 존재한다. _ 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 정신과 물질>, p226


 에르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생명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생명은 소중하다고 개체는 말한다. 개별적인 존재에게 하나밖에 없는 생명은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질 것이다. 그렇지만, 계(界) 안에 수많은 생명들이 저마다 영향을 주고 받으며 유지되는 자연의 관점에서 본다면 개별 생명의 가치는 크게 낮아진다. 만약 생명의 의미가 있다면, 수많은 생명들의 유전형질의 변화가 생길 정도의 축적이 있을 경우다. 


 생명은 물질의 질서 있고 법칙적인 행동이며, 그 행동은 물질이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행하는 경향성에만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질서에도 부분적으로 기반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절대 0도 근처에서 분자적인 무질서가 제거될 때 모든 계가 향하는 순전히 기계적인 행동을 부분적으로 나타내는 거시적인 계인 것으로 보인다. _ 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 정신과 물질>, p117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가치의 문제를 철저하게 거르고 다소 건조하게 물리학의 관점에서 생명의 본질을 파헤쳐간다. 죽음에 이르는, 열 평형상태로 가는 물리학법칙을 거스르는 유기체의 반동(反動). 저자는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얻어진 경험이 유기체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현재의 차이를 넘어선 구조적인 약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양자뛰어넘기'는 비교적 안정적인 한 배열에서 다른 배열로의 전이를 의미한다. 전이를 위해 필요한 에너지 공급량(W)은 두 준위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처음 준위에서 문턱까지의 간격이다. 처음 상태와 마지막 상태 사이에 문턱이 없는 전이는 관심의 대상이 전혀 아니다. 그런 전이는 지속적인 효과를 가지지 않으며 감지되지 않는다. _ 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 정신과 물질>, p92


  저자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과학의 관점에서 생명과 자연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신과 물질>에서 객관과 주관이 분리되지 않음을, '관측한다'는 행위를 통해 세계에 미칠 수 있다는 양자역학의 원리에서 정신과 물질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다.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몇몇 사건을 제외한 나머지는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무의미한 것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개개의 생명과 우리 삶의 가치는 우리의 생각보다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세상에는 개체와 연결된 각기 다른 세계가 있고, 이들 사이에 우열을 가리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정신과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은 동일하다. 이 사정은 모든 각각의 정신과 그것의 세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비록 그들 사이에서 불가해한 상호 참조가 풍부하게 일어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말이다. 세계는 내게 단 한 번 주어진다. 존재하는 세계가 주어지고, 또 지각되는 세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관과 객관은 단지 하나이다. 물리학이 이룩한 최근의 성과로 주관과 객관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말은 옳지 않다. 애초부터 그 장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_ 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 정신과 물질>, p208


 물리학자가 쓴 생명에 대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 정신과 물질>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비교적 평이하게 쓴 과학교양서다. 마치 메스를 든 의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해부를 하듯 생명의 본질에 대해 서술하지만, 우리는 이 안에서 또다른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발견하게 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다면, 생명이란 가치있으면서 동시에 무가치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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