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虛)라는 개념은 '비움', '상상'의 뜻으로 사용된다. 동서양 문화에서는 '허'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이번 페이퍼에서 살펴보자.
1. 도덕경(道德經)의 허(虛)
<노자와 21세기>에서 강조되는 개념 중 하나는 '허(虛)'다. 이와 관련된 '허'의 개념은<도덕경> 4장에 나타난다. 여기서 '허'는 비움이며, 가능성의 형태로 구현된다. 저자인 김용옥 교수는 이러한 면에서 노자(老子, BC 604 ~ BC 537)가 '채우기'보다는 '비움'을 강조했다고 해석한다.
'道沖, 而用之或不盈' <道德經> 第 四 章
도는 텅 비어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p181)
'노자는 컵을 채우려는 인간의 행위를 유위(有爲)라고 부른다. 유위란 곧 존재에 있어서 허(虛)의 상실이다. 그러니까 그 반대방향의 행위, 즉 빔을 極大化하는 방향의 인간의 행위를 바로 무위(無爲)라고 부르는 것이다.(p189)... 허(虛 Emptiness)라는 것은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존재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기본적 기능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가능성이며, 실현되기 이전의 잠능(潛能)이며, 잠재태이다. 그것은 존재의 모든 가능태(Potentiality)인 것이다.'(p192)
[그림]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2. 수학(數學)에서의 허(虛) : 허수(虛數)
<노자와 21세기>에서 저자는 '허(虛'의 개념을 시간, 공간의 개념으로 한정짓지 않고, 시공간(時空間)을 넘어선 '가능성'의 개념으로 이를 해석하고 있다. 반면, 서양철학의 영향에 놓여있는 수학에서도 '허(虛)'의 개념은 '허수(Imaginary Numbers)' 라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허수(Imaginary Numbers)도 수(數)인가? 이는 쓸데없는 질문들이다. 과학에서 기술적 용어(technical terms)는 마치 영아에게 붙여지는 세례명처럼 임의롭게 부과된 명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명칭 자체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 정확한 단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의미를 만들어 임의의 단어에 따로 그것을 부과하면 된다."... 허수 개념의 기원은 여러 측면에서 양수, 음수 개념의 경우와 흡사하다. 특히 세 가지의 심대한 수학 개념인 변수, 대수적 형식/일반화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 ~ 1947)의 <화이트헤드의 수학이란 무엇인가>(p85)
실재 존재하지 않는 수인 허수(虛數)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허수의 '역할'에 대해서는 실수의 기하학적 증명을 통해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수학명제에서 어떤 사항을 증명하고자 할 때, 임의의 점, 선 등을 확장시켜 이미 약속한 정의, 공리 등을 사용하여 증명하는 과정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유클리드(Euclid, BC 365 ? ~ BC 275?)의 <기하학 원론> 속의 명제를 통해 해당 내용을 살펴보자.
[그림] 직선, 각, 삼각형 [법칙9]
'법칙9] 어떤 직선각을 주었을 때, 그것을 이등분 하시오.
보임] 주어진 직선각을 BAC로 나타내자. 이것을 같은 크기로 둘로 쪼개야 한다. AB에서 아무 점이라도 좋으니까 점 D를 잡아라. AD와 같은 길이가 되도록 AE를 AC에서 잡아라. 그 다음, 직선 DE를 긋고, DE를 가지고 정삼각형 DEF를 만들어라. 이제 직선 AF를 그어라. 그러면 직선 AF가 각 BAC를 같은 크기로 둘로 쪼갬을 보이겠다. AD는 AE와 길이가 같고, 변 AF는 공통이니, 두 변 DA, AF는 두 변 EA, AF와 각각 길이가 같다. 그리고 밑변 DF는 밑변 EF와 길이가 같다. 그러므로 각 DAF는 각 EAF와 크기가 같다. 그러므로 직선 AF는 각 BAC를 이등분한다.' <기하학 원론 (가)>(p16)
3. 물리학(物理學)에서의 허(虛) : 허시간(虛時間)
'허수'의 이러한 속성의 활용은 물리학(Physics)에서도 활용된다. 물리학에서는 시간(time)을 실시간과 허시간으로 구분하여 M-이론(M- theory)를 설명하고 있다.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1942 ~ )의 <호두껍질 속의 우주 The Universe in a Nutshell>에서 허수의 구체적 활용을 살펴보자.
'양자이론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기술하기 위해서는 허시간(虛時間, imaginary time)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허시간은 훌륭하게 정의된 수학적 개념이다. 이것은 허수(虛數)라고 불리는 것으로 측정되는 시간이다... 허수가 실세계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수학적 게임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증주의 철학의 관점에 의하면, 어느 쪽이 실재(實在)인지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수학적 모형이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우주를 기술(記述)하는지 발견하는 것이다. 허수를 포함하는 수학적 모형이 우리가 이미 관찰한 효과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측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 믿고 있던 효과들까지도 예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가상일까? 그러한 구분은 단지 우리들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p59)
[그림] 실시간(實時間)과 허시간(虛時間)
4. 동양의 허(虛)와 서양의 Imagination
이상에서 살펴보면, 동양의 허(虛)는 가능성이며 도(道)의 근원인 반면, 서양의 허(虛, imagination)은 실재를 증명하기 위한 한 방편(方便)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면에서 '허'의 개념은 동양과 서양에서 다소 다르게 사용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서양의 '허(虛)'를 '실재의 증명을 위한 여유(餘裕)'라고 본다면 다른 한 편으로는 통(通)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도덕경>의 해석은 학자에 따라 다르기에, 이러한 해석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비움' 또는 '상상' 이 가진 가능성의 이미지는 인류 공통된 원형(原形)이 아닐까. 비록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世界觀)은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동양 사상에서는 유난히도 "무(無)', '허(虛)', '공(空)'이라는 단어가 중요하게 취급된다. 동양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보다 눈에 보이지는 않는 세계를 더 인정해왔다. 동양 회화의 가장 중요한 조형 요소로 여백(餘白)'을 들 수 있다. 여백의 정의는 "그림에서 묘사된 대상 이외의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여백의 정의는 비단 회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어서 문학, 음악, 서예에서도 폭넓게 찾아볼 수 있다.'(p25)
'예로부터 서양인들은 이 우주 공간이 텅 빈 허공이라고 믿어왔다. 텅 빈 공간에 별들이 떠 있는 모습이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우주의 모습이다. 이렇게 텅 빈 공간에 놓여져 있는 사물은 주변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사물이 독립된 하나의 개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우주가 텅 빈 허공이 아니라 "기(氣)"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p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