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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란 무엇인가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
에르네스트 르낭 지음, 신행선 옮김 / 책세상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민족(民族, nation)
이 말은 다의적(多義的)이어서 국민 ·부족 ·종족 등과 혼동되는 경우가 많으며, 또 실제로는 이들과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요인도 있다. 그러므로 민족은 언어, 거주하는 지리적 범위, 경제생활과 문화, 동류로서의 공속의식(共屬意識)을 공통으로 가지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인간집단이다. 이들 여러 요인이 상호관련하는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되고, 개개의 요인이 단독으로 민족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이들 여러 요인이 복합하여 어떤 민족이 생성 발전하는 과정 중에 그 민족에게 고유한 특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민족성이다. [출처 : 두산백과]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 ~ 1892)는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민족' 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는데, '도덕적 양심' 또는 '정신적인 원리'라 불리우는 이 기준을 통해 한 민족을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은 인종의 노예도, 언어의 노예도, 종교의 노예도, 강물의 흐름의 노예도 산맥의 방향의 노예도 아닙니다. 인간들의 대결집, 건전한 정신과 뜨거운 심장이야말로 민족이라 부르는 도덕적 양심을 창출합니다.(p83) <민족이란 무엇인가> 中
하나의 민족은 하나의 영혼이며 정신적인 원리입니다. 한쪽은 과거에 있는 것이며, 다른 한쪽은 현재에 있는 것입니다. 한쪽은 풍요로운 추억을 가진 유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며, 다른 한쪽은 현재의 묵시적인 동의, 함께 살려는 욕구, 각자가 받은 유산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입니다.(p80) <민족이란 무엇인가> 中
저자에 따르면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인 언어, 종교, 지리, 사회 등 여러 문화 내용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의지'만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아마도 '유럽'의 특수성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게르만이라는 공통된 종족(種族)의 출발점 위에 기독교라는 공통된 종교(宗敎), 자신들 고유언어(言語)의 망각은 유럽 민족 구분에서 종족, 종교, 언어의 문제를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특수한 유럽의 역사적 바탕 위에서 출발한 르낭의 민족 정의가 다른 지역, 다른 시대에도 통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 여겨진다.
민족 nationalite의 존재 기반을 제공했던 원칙을 세계에 도입했던 것은 바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 베르됭 조약은 계속되는 분열의 길을 제시한 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에스파냐는 바로 오늘날 우리가 그 개화를 목격하고 있는 완전한 민족적 실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p58) <민족이란 무엇인가> 中
본질적으로 두 가지 상황이 그러한 결과를 낳는 데 기여했습니다. 우선은 게르만 사람들이 그리스 민족, 라틴 민족과 지속적인 접촉을 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상황은 정복자 쪽에서 자신들 고유의 언어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p59)... 이로써 게르만족 침략자들의 풍속이 가지고 있는 극도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흘러 그들이 강요했던 유형 자체가 민족국가의 전형이 되는 중요한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p60) <민족이란 무엇인가> 中
[그림] 2016년 현재 유럽 연합 회원국 현황(출처 : 연합뉴스)
게르만족과 기독교, 언어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저자는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을 통해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영국이 힘을 합쳐 유럽연방을 구성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현재 유럽연합(EU)을 연상시키는 '유럽 연방'이라는 개념은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하지만, 2차례에 걸친 아편전쟁(阿片戰爭, Opium Wars)과 아프리카 분할 등 제국주의 침략에서는 적극적인 동맹과 협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합중국을 제쳐놓고 생각하자면, 유럽의 지적, 도덕적 위대함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영국 사이의 동맹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동맹을 파기하는 것은 진보의 조종(弔鐘)이 될 것이다. 이 세 강대국이 서로 단결했을 때라야 세계를 지휘할 수 있을 것이다.(p16)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中
평화는 유럽의 공통된 이해에 의해서만, 나아가서는 위협적인 태도로 넘어가고 있는 중립국들 간의 동맹에 의해서만 확립되고 유지될 수 있다.... 가장 강력한 국가에 대항하여 유럽 공동체의 안녕에 유용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결정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다양한 국가들의 개입, 중재, 동맹 안에 있다.(p43)... 이 힘이 연방 협정에 의해 그들 사이에 연계된 유럽 합중국 Etats-Unis d'Europe의 핵심이 되기를 기대해보자.(p44)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中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저자가 주창한 유럽연방의 기본원리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내부적으로는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self-determination)가, 외부적으로는 유럽연방의 원칙이었으며, 이를 통해 만들어진 하나된 유럽은 세계의 지도국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여겼다.
사실 민족자결주의는 사소한 부분을 규명하려 하기보다는 너그럽게 받아들여져야만 한다.(p29)... 독립적인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쟁의 참화에서 인류를 벗어나게 하기에는 부적절하다.(p50)... 민족자결주의라는 원칙에 유럽 연방의 원칙, 즉 모든 민족들에 우선하는 집단의 원칙을 결합시킬 때에야 비로소 전쟁의 종말을 보게 될 것이다.(p51)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中
<민족이란 무엇인가>와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이라는 두 개의 글을 종합해 볼 때 르낭의 글은 다음으로 요약할 수 있을 듯 하다. 민족이란 정신적 원리를 공유하는 집단이고, 당시 갈등관계였던 프랑스와 독일이 공통된 이해관계 속에서 유럽이라는 큰 공동체의 일원으로 평화롭게 살아가야 하며, 이를 통해 유럽은 번영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의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우리는 유럽민족과 그들의 민족의식 그리고 유럽 연합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2016년 브렉시트(Brexit), 여러 가지 안건에 대한 EU회원국들의 내부 갈등 문제를 생각한다면 '유럽인'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또한, 르낭이 내린 민족의 정의를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반면, 분단된 지 70년이 흘렀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통일을 원하는 우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민족 = 정신적인 원리'라는 르낭의 정의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또한, 그가 말한 '유럽'이라는 개념이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 또한 가지게 되고, 이러한 부분들은 한계라 여겨진다.
[사진]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출처 : 한국일보)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유럽인들이 바라보는 유럽의 모습을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는 점과 유럽 공동체의 성격을 유럽인이 아닌 이들에게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