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영화 <괴물> (사진출처 : 동아일보)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 裕和, 1962 ~ ) 감독의 <괴물>을 봤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여러 클리셰들을 파괴하며 관람객에게 반전을 선사한다. 그런 반전 중 하나가 악인 또는 빌런(villain)찾기다. 선-악 구도 설정 후 영화를 관람하는데 익숙한 관객들에게 감독이 선사하는 반전으로 자신의 구도를 무너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과연 진정한 악(惡)이 있는 것일까. 어쩌면 개인이 악이 아니라, 사회의 구도 속에서 악은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 영화에 담긴 여러 주제 중 이 부분에 시선이 머문다.
희생제의의 진정한 기능은 실제로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물과 그 희생물이 대체하는 인간 존재 사이의 연속성을 요구한다. 이 두 가지 요구는 아주 섬세한 균형을 취하고 있는 인접상태에 의해서만 동시에 충족될 수 있다. _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p61
사회라는 유기체는 체제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희생양은 축제라는 제의(祭儀) 속에서 사라져간다. 사람들은 성스럽고 반복적인 의식(儀式)을 통해 인간과 공동체의 연속성을 보장받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희생양에 대한 죄(罪)의식은 어떻게 소멸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희생양은 죽어야만 한다는, 악이라는 단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다른 지점에서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정체 속에서 '선거'라는 축제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정치적인 연속성을 보장받기 위해 반대편의 희생양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희생을 강요하는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각자의 이념 편향이 생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의 요구와 시스템은 개인을 악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의 요구에 순응했다 이유로 처형을 받은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 속에서 우리 모두는 축제의 일원으로 동참한 것으로 면죄될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된다.
논증을 위해서 피고(아이히만)가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기꺼이 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이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피고가 대량학살 정책을 수행했고, 따라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읃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_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p382
공동체 내의 구성원 모두가 희생양이 되어 악으로 지정될 수도, 행위로 악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가운데에서 우리는 광란의 축제에 휩싸이지 않고 깨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편향에 의해 제한된 시선으로 사회를 해석하는 이데올로기 대신 자신이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와 왜곡될 가능성에 대해 인정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부분 최적화가 전체 최적화가 아님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열린 결말과 통하고 있음을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다원주의가 지상의 낙원을 이룩할 처방을 제시해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인류를 괴롭히는 최악의 정치 상황을 피하게 해주는 사상이라고 생각된다. 다원주의는 오늘날 각국의 사회가 달성한, 대단히 수준 높은 정치적 성과에 속한다(p75)... 다원적 사회에서는 정치적 지배를 위한 끝없는 싸움을 줄여 줄' 중첩적인 정치적 합의' overlapping political consensus가 필요하다. 이런 합의는 일종의 기본적 합의, 즉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측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특정한 도덕성을 강요할 수 없다는 원칙에 근거해 있어야 한다. _폴 슈메이커,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