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는 크레온 왕국의 지배 하에서 살게 된다. 그녀 자신이 왕의 딸이고 하이몬의 약혼자이므로 그녀는 영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크레온 자신도 아버지이자 남편이므로 혈연의 신성함을 존중해야 하며, 이 경건성에 대립되는 어떤 명령도 내려서는 안 된다. 이처럼 그들 두 사람 속에는 서로 대립되는 양면성이 내재하면서 서로 대항하고 뒤바뀌며 강조되며, 그 개인들은 바로 자신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파멸한다... 고대와 근대 세계의 모든 뛰어난 예술작품들 가운데 <안티고네 Antigone>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보인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33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헤겔의 미학강의 Vorlesungen uber die Asthetik : Mit einer Einfuhrung hrsg>에서 소포클레스(Spphokles, BCE 497~406)의 <안티고네 Antigone>를 근대까지의 문학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는 <안티고네>가 갖는 뛰어난 문학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쟁하는 개인과 그들이 저항해 싸우는 것과의 대립구조가 헤겔의 변증법을 설명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만약 파토스의 일면성이 충돌의 근거가 되면 다름 아니라 그 파토스는 생생하게 행위로 드러남으로써 어느 특정한 개인만이 파토스가 되었다는 것이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만약에 그 일면성이 해소되어야 한다면, 그 파토스는 오직 하나의 파토스로만 행동해야 하므로 결국 제거되고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개인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란 오직 이 하나의 삶일 뿐이기 때문이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32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에서 설명되는 직접적인 대립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이다. 사자(死者)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둘러싼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갈등은 신의 법칙과 인간 법칙이라는 인륜(人倫)의 대립, 여성의 원리와 남성의 원리, 무의식과 의식의 대립으로 전환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는 <안티고네>에서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헤겔은 <안티고네>를 높게 평가한다.


 인륜적 위력들 서로 간의 운동과 인륜적 위력들을 생명과 행위 속에 정립하는 개체들의 운동은 양측이 다 똑같은 파멸을 경험하는 데에서 그 참된 결말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그 위력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실체의 좀 더 본질적인 계기가 되는 데에 하등 앞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양측의 동등한 본질성 그리고 그것들의 아무런들 상관없는 병존이 곧 그것들의 자기(自己)를 결여한 존재이다. 행실 속에서는 그것들이 자기 본질로서 존재하기는 하지만 상이한 것으로서 존재하는데, 이는 자기(自己)의 통일과 모순되고 또 그것들의 무법성과 필연적 파멸을 이루는 것이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56


 크레온이 상징하는 인간적 법칙은 <정신현상학>에서 설명되는 정신적 본질이다. 이에 대항하는 안티고네가 상징하는 신적 법칙은 자기 의식이다. 보편적인 정신적 본질과 개별적인 자기의식은 대립하지만, 사실 그들의 뿌리는 서로에게 두고있다. 그들은 서로 다르지 않기에 , 그들의 대립은 어느 일방의 승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어느 한편에 의한 다른 편의 전복이 일어나는 그 지점에서 승리는 패배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자리 전환이 일어나면서 모두가 부정되며 새로운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정신적 본질은 우선 자기의식에 대해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칙(법률)으로서 존재한다.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성이 아닌 형식적 보편성이었던 검증의 보편성은 지양되었다. 이에 못지 않게 정신적 본질은 또한 영원한 법칙인데, 그런 영원한 법칙은 바로 이 개인의 의지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히려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며, 직접적 존재의 형식을 가진 만인의 절대적인 순수 의지이다. 이 만인의 순수 의지는 또한 단지 마땅히 그러해야 할 뿐인 계율이 아니며, 그것은 존재하고 또 유효하다. 정신적 본질은 직접적으로 현실인 범주의 보편적 자아이고, 또 세계는 오직 이 현실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존재하는 법칙이 단적으로 유효하다고 해서 자기의식의 복종이 결코 자의적으로 명령하고 그 안에서 자기의식이 자신을 인식하지 못할 터인 그런 주인에 대한 봉사는 아니다. 오히려 법칙은 자기의식이 스스로 직접적으로 지니고 있는 그 자신의 절대적 의식의 사고이다. _ 헤겔, <정신현상학 1> , p417


  <안티고네>에서 결말은 안티고네와 약혼자 하이몬, 크레온의 부인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생존자는 크레온이지만,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진정한 승리자는 모든 것을 잃었고, 패배자는 죽었다. 모든 것이 파괴된 상황에서 이제 정신은 어떻게 고양될 수 있을까.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다음 상황에서 소외된 정신과 국가 권력과의 새로운 관계가 모색되면서 정신의 고양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안티고네>에서는 이러한 고양이 표현되어 있을까?


 권력을 지니고서 백일하에 놓여 있는 법칙에 맞서 무의식적 정신은 현실적 수행을 위한 도움을 오직 핏기없는 그림자에서만 지닐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와 어둠의 법칙으로서 무의식적 정신은 처음에는 환한 대낮과 힘의 법칙에 굴복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권력은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서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면적인 것으로부터 그 명예와 위력을 탈취한 현실적인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먹어 치운 셈이다... 공개적인 정신의 완성은 그 반대로 전환되며, 그는 자신의 최고 권리가 최고의 불법이고 또 자신의 승리가 오히려 자기 자신의 파멸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네이케스나 안티고네처럼) 자신의 권리를 훼손당한 사자(死者)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그를 침해한 위력과 동등한 현실성과 권력을 갖춘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위력들이 적대적으로 들고 일어나서 자신들의 힘인 가족 간의 공경심을 모독하고 부숴버린 공동체를 파괴한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60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시 <헤겔의 미학강의>로 돌아가자. 헤겔은 본문에서 합창(코러스)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같이 적극적으로 극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은 극의 흐름에 따라가면서 서정을 통해 서사를 전달하는 이중성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안티고네>의 마지막 코러스는 최종 주제가 담긴 구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 <안티고네>에서 코러스에 의한 마무리는 휘브리스에 대한 경구로 끝맺음된다.


 합창은 사실은 행위 속으로 파고들어가 이와 관계하지도 않으며, 투쟁하는 주인공들에 대항해 어떤 권한도 행사하지 않고 이론적으로만 심판을 내리고 경고하고 연민을 보이거나, 상상 속에 지배하는 신들의 영역으로 외화되는 신적인 권리와 내면적인 위력에 호소한다. 이렇게 표현될 때 이미 보았듯이 합창은 서정성을 띤다. 왜냐하면 합창은 행동을 하지 않으며, 또 어떤 사건도 서사적으로 서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본질적이고 보편성을 띤 서사적인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24


코러스 : 양식(良識)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네. 신들에게 불경을 범해서는 안 되는 법이라오. 뽐내며 허풍을 떨면 언제나 큰 매를 벌기 마련. 나이를 먹으며 지혜를 배우게 되는구나. _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 p80/332


 개인적으로 <안티고네>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변증법적 구도 안에서 무리하게 해석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앞선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이 사실은 그 이전에 있었던 오이디푸스 아들간의 대립의 연장 구도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공격하는 자와 지키려는 자. 안티고네와 크레온 이전에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 있었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본다면, 공동체를 점유하지 못한 채 그 정상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그 공동체를 공격하는 자(폴리네이케스)가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반면에 다른 사람을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한낱 개별자로 포착할 줄 알고 이런 무력함 속에서 추방하는 자(에테오클레스)는 권리를 자신의 편에 둔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58


  크레온은 테베를 지키려는 에테오클레스를 인정하는 대신, 공격해온 폴리네이케스를 부정하고 매장을 금지한다. 이때, 안티고네가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한 것에 대해 헤겔은 신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소포클레스의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우리는 신의 저주를 아버지로부터 받는 폴뤼네이케스를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 너는 추방한 아우를 죽이고 아우의 손에 죽게 되리라. 그렇게 저주하노라. 너에게 새 집을 주라고 아버지 타르타로스의 가증스러운 어둠을 부르고 여기 복수의 여신들을 부르며, 너희들의 마음에 무서운 증오를 불어넣은 전쟁의 신 아레스도 부르노라. 자, 내 말은 다 들었으니 이제 가거라. 가서, 모든 카드모스인들과 그 믿음직한 동맹군들에게 말해라. 오이디푸스가 그런 저주를 두 아들에게 상으로 주었다고.


 코러스 : 폴뤼네이케스여, 당신의 과거 행적이 마음에 들지 않소. 이제 서둘러 돌아가시오. 


 폴뤼네이케스 : 아아, 내가 온 길이여, 내 임무는 실패로 끝났구나. 아아, 동료들이여. 아르고스에서 군대를 이끌었지만, 어떤 종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불행한 자로다. _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 p239/332


 결국 폴뤼네이케스가 선택한 것은 인간 법칙에 대한 거부나 반항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에 따라간 어쩔 수 없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안티고네의 선택 또한 인간 법칙에 대한 거부와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닌 인간에 대한 연민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을 것이다. <안티고네>의 마지막 코러스에서 드러나듯 신들에 대한 불경(휘브리스 hybris)의 대가를 치루는 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런 상황에서 과연 공동체 윤리와 정신과 같은 냉정한 분석이 의미가 있을까. 이런 점에서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에 감탄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폴뤼네이케스 :  그래, 날 잡지 마라. 이 길이 내 앞에 놓여 있구나. 아버지와, 아버지가 불러낸 복수의 여신들이 정한, 불행하고 사악한 길을 가야겠구나.  제우스 신께서 너희들에게 행운을 내리시길 빌겠다. 내가 죽어서 요구한 임무를 수행한다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장례를 베풀 수 없으니까.〕 자, 이제 날 놓아 다오. 잘 있어라! 너희들이 살아 있는 나를 다시 보는 일은 없겠지.


안티고네  : 아, 불쌍한 내 신세!

폴뤼네이케스 : 울지 마라!


안티고네 : 오빠, 오빠가 예언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누가 한탄하지 않겠어요?


폴뤼네이케스 :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겠지.


안티고네 : 그건 안 돼요. 내 말을 들어요.


폴뤼네이케스  : 설득해도 안 되니까 설득하려 들지 마라.


안티고네 : 나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에요. 오빠를 잃게 되면. _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 p241/332


 헤겔의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의 안티고네 해석 일부를 옮겨본다. 안티고네가 갖는 이중성에서 근친상간의 욕망을 발견하고, 욕망이라는 매개로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의 해석과도 결을 달리한 버틀러의 해석도 흥미롭지만, 역시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안티고네는 친족의 경계에 드러난 인식 가능성의 한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순수하지 못한 방식으로, 누구든 낭만화하거나 사실 모범적 사례로 참고하기는 어려운 방식으로 친족의 인식 가능성을 상징한다. 결국 안티고네는 자신이 반대하는 것의 위상이나 언어를 전유해서 크레온의 통치권을 가장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오빠에게 운명지어진 영광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극 전체에서 언제나 이중적이다. 즉 그녀는 살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아이들을 낳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죽음은 살지 못했던 삶을 의미하고, 그리하여 크레온이 마련한 삶의 무덤으로 다가갈 때 그녀는 지금껏 내내 자신의 것이었던 어떤 운명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존속될 수 없는 욕망, 안티고네가 더불어 살아가는, 다름 아닌 근친상간의 욕망 그 자체가 아닌가? _ 주디스 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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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8-27 1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들 사회책에서는 법단원에서 안티고네를 자연법 예비시아버지(?)를 실정법 이렇게 대립해 놓는 읽을 거리가 있었거든요? 헤겔의 인간적 법칙대 자기 의식을 그렇게 변용한 건지 다른 관점인지 궁금해지네요 ㅋㅋ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8-27 21:52   좋아요 2 | URL
아, 그렇군요. 요즘 학생들 수준이 매우 높네요... 자연법과 실정법의 구도는 <정신현상학>에 있는 여러 예시 중 하나로 보다 와닿는 내용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다녔을 적에는 헤겔과 변증법 이름만 들어본 것 같은데, 학생들이 할 일이 참 많을 것 같네요... 일찍 학교가 가서 다행입니다.^^:)

비로그인 2023-08-27 2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포클레스의《안티고네》에서 주인공 안티고네는 이를 두고 신들에 의한, 글로 쓰이지 못한
틀림이 없는 법이며 정의롭다고 부른다.

˝어제, 오늘이 아닌 영원히 산다는 걸 법이라고 부르니,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모르느니라.˝

- 헤겔, 《정신현상학》, p.447

반유행열반인 2023-08-28 08:0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Andy님. 인용해주신 부분을 보면 자연법이라고 지칭할 만한 정의가 나오는 군요 ㅎㅎㅎ워낙 청소년용으로 풀어둔 토막글만 봐서 출처가 궁금했는데 원전이 헤겔이었다니ㄷㄷ

겨울호랑이 2023-08-28 12:19   좋아요 2 | URL
Andy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광복절 특별사면을 두고도 시끄럽다. 대표적으로 김태우전서울강서구청장(국민의힘)이 꼽힌다. 형이 확정된지 3개월만에 사면이단행된 데다, 그의 공익신고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은 법원 판결을 부인하는 대통령실·여당의 발언이 계속 나온다. 김 전구청장은 억울함을 토로하며 자신으로인해 다시 치러지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재출마할 의지를 드러냈다. 야당에서는 "법치주의 유린" "법치의 사유화"라고 지적한다. - P13

지금까지 총 세 차례 이뤄진 윤석열 대통령의 특별사면에는 ‘자기부정‘이라는 단어가 곧잘 따라붙는다. ‘검사 윤석열이 유죄를 이끌어내고, 대통령 윤석열이 사면·복권해준‘ 이들이다수 포함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사면이다른 대통령의 사면보다 더 문제적인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은 2016년 국정 농단특별검사 수사팀장을 시작으로 문재인정부 당시 2017~2019년 서울중앙지검장을 지내며 이명박·박근혜 정부 적폐 청산작업의 선봉에 섰다. - P13

이첩 당일인 8월2일 오전 10시께 박정훈 대령은 김계환 사령관에게 "일단 이첩 출발은 시켰다"라고 보고했다. 김사령관은 "내가 중지하라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라고 물었고, 박 대령은 "직권남용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라고 답했다. 김사령관은 1분 정도 생각한 후 "알았다"라고 말했다. 박정훈 대령에 따르면 ‘최초의명령‘을 받은 시점은 이날 오전 10시51분이다. 김 사령관이 전화로 "당장 인계 멈춰"라고 말했다. 박 대령은 "이미 인계 중이다. 죄송하다"라고 답한 뒤 인계 중인하급자에게 멈추도록 지시하려 했으나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날 오후 박대령은 보직 해임됐다. 국방부와 해병대사령부 관계자들은 이러한 박정훈 대령의 주장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 P25

감사원의 이번 5차 감사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 지난 문재인정부에서 금강·영산강의 일부 보 해체를결정할 때 그에 따른 경제성 평가가 불합리하게 이루어졌으니 환경부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방안을 마련하라. 둘째, 당시보처리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구성된 ‘4대강 조사·평가단‘의 위원회가 불공정하게 구성되었으니 환경부에서는 이를 허용한 담당자를 인사 조치하고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업무를 철저히 하라. - P29

물론 하천의 특성에 따라 준설을 통해 치수 사업을 펼쳐야 하는 곳도 있다. 퇴적량이 많아 문제가 되는 일부 구간에, 일시적으로 활용할 경우 치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문제는 지류·지천의 강바닥을 퍼내 만드는 ‘물그릇‘은 본류보다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재퇴적의 속도 역시 빠를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임시대책인 것이다. - P31

미국과 유럽연합은 중국과 대결을 강조하는 디커플링 (decoupling)보다는 경쟁과 협력에 방점을 둔 디리스킹 (derisking)으로 정책 전환을 하고 있다. 자칫하면 국제정세의 흐름과 동떨어진 채 한반도에서만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냉전시대의 진영 구도가 형성될 수 있다. 만약 미국과 중국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협력과경쟁을 택하면서, 대결 수요를 한반도에서 충족하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미래에 낀 먹구름이다. 북·러 밀착 관계나 군사협력은 한반도에서 진영 대결 구도 형성을 촉진할 것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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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루이스 멈포드 지음, 김종달 옮김 / 경북대학교출판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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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대 기술이 처음에 지리적 탐험에 진 많은 빚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러한 탐험이 결국 변화를 위한 초석을 다졌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관념화, 구체화, 합리적 공식화의 초기 국면에서 새로운 생활양식을 광범위하게 조직하고 결합시키는 국면으로 지금 막 넘어가려 하고 있다... 지리적 탐험은, 짧게 말해 엄청난 혁명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양적이면서 동시에 질적인 혁명이었다. 지리적 탐험은 지구 전체 사람들 간 교류를 성립시켰고, 전 지구적으로 에너지 자원의 증가, 재화, 식물, 사람, 사상의 교류를 가져왔다. 이것은 많은 적응들을 쇠퇴시켰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509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 1895~1990)의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The Myth of the Machine: The Pentagon of Power>은 이른바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로 불리는 지리적 탐험 이후 가속화된 과학(科學 science)와 기술(機術 technology)의 결합 그리고 사회적으로 관료제(官僚制, bureaucracy)라는 제도를 통해 사회가 거대한 기계 그 자체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총체적 효과는 인간의 삶을 포함해 자연적 존재의 표현에 대한 외부적 통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정당성을 제공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공식적으로 결합되지 않았다면, 양자는 용해되기보다는 무시하기 쉬운 느슨한 관습법의 관계를 지속했을 것이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154


 경험적 사실로부터 귀납적으로 일반법칙을 도출하는 추상화가 과학이라면, 증명된 과학의 법칙을 일반화시켜 일상생활에 보편화시키는 연역화는 기술의 영역이다. 과학법칙에 의한 사고의 변화는 기술을 통해 생활을 변화시켰고, 변화된 생활로부터 얻어지는 잉여는 과학에 재투자되면서 일종의 순환구조를 형성한다. 순환구조를 통해 생성되는 힘은 점점 더 거대해지면서 사회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된다. 


 기술과 과학에 공통되는 주요 전제는 지식, 물질적 재화, 환경 통제의 증가에는 바람직한 한계가 없다는 관념, 즉 수량적 생산성 자체가 목적이고, 모든 수단은 계속적인 확장을 위해 사용됭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과학이 예견과 통제의 영역을 넓히면서, 지금까지 침입할 수 없었던 자연의 신화에 침투하고, 모든 측면에서 인간의 힘을 증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우리는 풍요의 경제로부터 야기된 새로운 곤궁에 직면하고 있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180


  과학과 기술의 결합은 새로운 시대, 사회를 통제하는 거대한 힘이 되었다. 이 거대한 힘의 원천은 플라톤(Platon, BC E427~ BCE 348)과 중세 스콜라 철학 이래의 추상적, 형이상학적 사고에 기초한 수학에 있었다. 추상적 사고와 수학이 충분히 성숙했을 때 그것은 중세의 복합문화를 깨고 단일화되고 경직된 근대화를 불러오게 된다. 


 과학과 과학에 바탕을 둔 기술은 상상의 실체와 가설적 관계를 논리적으로 다룰 수 있는 중세의 능력이 수학에 새로운 발전을 가져올 때까지는 번성하지 못했다. 중세 신학이 부족했던 점은 엄격한 추상성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풍성함, 운명 그리고 고결함의 구체성을 이해하는 능력이었다. 여기에 심미적 자연주의는 많은 기여를 해왔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45


  복합기술의 장점 중 하나는 기술, 심미적 판단과 감상, 상징적 이해가 특정 계급이나 직업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전체 공동체에 확산되어 있다는 것이다. 복합기술은 그 특성상 단일하게 축소되고, 표준화되고, 획일적인 시스템, 중앙 집중적인 통제 아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복합기술의 많은 부분은 여자의 관심과 여성 방식의 작업이 많았던 신석기 문화로부터 도출된 예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197


 중세의 추상적 사고에 의해 대체된 것은 복합문화 뿐만이 아니다. 이 시기 지식의 소유계급 브라만(Brahman) 또한 신학(神學)의 과학(科學)으로의 이행과 함께 성직자로부터 과학자들로 대체되었다. 고대와 중세 시대 국가권력과 결탁을 통해 호국(護國)의 이데올로기로 성(聖)의 권력으로 생존해온 종교(宗敎)와 마찬가지로 과학 또한 정치적 중립 또는 기술관료로서 충성을 통해 새로운 기계 시스템의 정신적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데 성공한다. 


 일단 과학자들이 신학, 정치학, 윤리학, 시사(時事)를 논의 영역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자, 그들은 국가 지배자에 의해 환영받았다. 보상으로 과학자들은 습관적으로 공적인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외견상 '충성'스러웠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정신적 고립은 새로운 거대기계의 톱니로 운명 지워졌다... 과학은 수도원의 구도자들이 자신의 규율을 위해 그러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바쳐 헌신하는 많은 '성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소외와 자기기만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64


 이러한 종교를 대신한 과학과 기술의 결합은 무엇을 의미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저자 멈포드는 복합기술에서 단일 기술로의 표준화가 인간 개인에게는 가치를 박탈하고 소외의식을 불러왔으며, 사회 전체적으로는 '진보(進步)'라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제시와 이의 실현을 위한 전체주의적 사회가 형성되었음을 비판한다. 


 모든 측면에서 노동은 인간의 마음을 넓히고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데 결정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했다. 사람이 단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은 사고력을 자극하고 신체의 능력을 확장해 온 많은 활동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의의 목적을 위해, 어떤 이는 인간의 기본 속성을 도구 이용과 도구 제조로 정의하는데, 이는 인류학적 정체성을 받아들인 결과다. 그러면 기계화와 자동화가 인간이 지닌 적응성 있는 사고력에 영향을 미칠 때 기계화와 자동화의 축적된 결과에 대해 인간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243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는 과거 부정과 파괴 후 재생산을 통해 사회 자체는 끊임없이 운동하지만, 운동을 통해 더 집중화되고 획일화되는 과정 속에서 발전을 통한 빈곤화가 가속화된다는 일종의 역설이 거대 기계화의 숨겨진 면이다.


 끝없는 기계적 진보의 전망, 전체주의적 유토피아, 과학적 기술적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 외삽법 등은 모두 보통 실현되는 것보다 실제 일상의 변화에 더 활동적인 역할을 했다.이러한 예상되는 주관적 선동은 항상 실제 경험에 앞섰고, 끈질기게 유인하고, 다음 단계에 앞서 지적하고, 그리고 변화의 템포를 감소시키거나 방향을 바꾸려는 어떠한 시도는 우주의 속성상 당연히 예정된 것이라고 제시함으로써 저항을 깨부수고 있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308


 거대기술은 결핍이라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해결하기 곤란한 새로운 형태로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사용할 수 없고 인내하지 못하는 풍요로움에서 직접 기인하는 삶의 심각한 결함이다. 그러나 결핍은 남는다. 명백히 기계가 만들어낸 물질적 상품과 기계적 서비스의 결핍이 아니라, 생산성, 속도, 힘, 위신, 금전적 이익 이외의 가치에 기초하는, 보다 풍요로운 개인적 발달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모든 것의 결핍이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448

 

  기계화란 무엇인가? 루이스 멈포드는 <기계의 신화>를 통해 현대 인류에게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여겨지는 기계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로부터 저자는 기계화가 단순히 물질문명을 지탱하는 생산공정에 한정되지 않고, 보다 거대한 리바이어던(Leviathan)으로 오랜 역사적 산물임을 주장한다. 리바이어던이 갖는 오랜 역사만큼 그 올가미는 단단하고 우리를 강하게 옭아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일문화에서 선사시대의 복합화를 위한 엘랑 비탈(Ellan Vital)을 해야 할 것이다.


 지리적인 미개척 영역은 이제 끝났지만, 덜 피상적인 탐험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의 탐험이며 객관적 현상뿐만 아니라 주관적 현상으로의 탐험이다. 이 새로운 탐험은 원인-결과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거의 탈출할 수 없고 묘사될 수 없는 복잡성의 패턴을 다루는데, 이 복잡성은 시간을 통해 흐르고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한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510


 글의 마지막은 본문에 언급된 핵(核)과 관련한 최근 두 주제를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자. 최근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Edward Nolan) 감독의 <오펜하이머 Oppenheimer>와 24일부터 개시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서로 다른 두 주제를 거대한 기계의 신화를 통해 생각하면서 글을 갈무리한다...


 핵폭탄을 발명하면서, 신 거대기계의 핵심적인 인간 요소는 공간적으로 결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며,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최고사령관이었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353


  현재까지 핵분열이라는 위대한 과학적 업적의 부정적 결과가 어마어마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핵폭탄에 관한 한, 유일한 긍정적 이익은 일시적으로 새로운 거대기계를 만드는 산업의 관료적, 과학적 조직들이 생겨나는 것뿐이다. 역설적으로, 그런 다음에 원자로 통제를 통해 성취한 가장 큰 이익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측면이다. 우주 실재에 관해 풍부해진 인식, 즉 살아 있는 유기체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이 점유하게 된 우주와 공간의 본질에 대한 심화된 통찰력이다. _ 루이스 멈포드,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 , p402



(신세계의 발견과 이로 인한 19세기) 퇴보의 결과, 기계적 신세계가 인간 정신 내부의 ‘낭만적 신세계‘를 대체했다. 낭만적 신세계는 기존 질서의 진정한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현실 도피자의 몽상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신과 새로운 종교의 결합으로부터 새로운 기계적 세계관이 생겨났다. 모든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모든 성공적인 새로운 발명과 더불어 새로운 기계적 세계관은 자연계와 인간 문화의 다양한 상징들을 단지 기계적 측정에 의해 재단된 환경으로 대체시켰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탈인간화된 환경을 우선시한다 - P43

인간의 첫 번째 정교한 기계는 주로 인간적 부분으로 구성되고, 마음에 의해 기계화, 조직된 것이었다. 기계체의 의식적 발전은 특히 인간적 특성인데, 나무와 금속 부품의 기계에서처럼 언어와 예절의 조직에서 볼 수 있다. 정신 자체는 유기체 고유의 기계를 창조, 이용, 초월하는 방법으로서 대부분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 P140

진보에 대한 최초의 사고는 아마 신성한 목적을 위한 자기 완벽이라는 기독교적 생각에서 배태되었을 것이다. 황금기로의 복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기 완벽의 이상적 완성은 천국에서 정적인 미래의 완성이었다. 이 진보의 관념은 천년왕국 즉, 먼 천국으로의 통로가 아니라 땅에 강림할 더 실체적인 천국에 대한 당시의 믿음에 뿌리내리고 있었다(p270)... 개선은 안정적이고, 지속적, 필연적으로 축적된다는 세계상은 계몽주의 지식인의 온화한 낙관주의뿐만 아니라 인류사에서 그들 자신의 자리라는 자기 아부적 관념까지 반영했다. - P271

국가 조세로부터 비롯된 엄청난 증여가 현대 경제의 경제적 역동성을 지탱하는 이윤동기를 대체해 왔다. 이윤과 손실, 비용과 편익이란 계산은 결코 거대기계의 작동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없다. 비용은 다시 편익으로 전환된다. 즉 군사적 노후와 노골적인 파괴를 통한 예기된 손실은 신선한 기업 이윤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또는 예상되는 전쟁을 통해 거대기계는 그 범위를 증대시켰고 권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가 작동을 규제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두었던 피드백 형태를 제거했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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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계보는 단순히 복잡한 구조를 지닌 서사 혹은 다신주의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원시적인 사상의 표현이라고 볼 수 없다. 이 계보는 오히려 신들의 역사를 추적하고 이들이 세계에 행사하는 권력의 지도를 그리면서 신들의 혈연관계나 탄생 경로를 토대로 이들의 본질을 묘사하는 아주 복잡한 인식 도구에 가깝다.

헤시오도스의 서사시는 신들이 탄생과 결합과 동맹과 분쟁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나누어 가졌고 어떤 식으로 그들에게 할당된 운명을 받아들였는지 이야기한다. 제우스는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얻었고 티탄들은 반대로 타르타로스의 심연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바빌론의 「에누마 엘리쉬」에서 태초의 쌍은 물을 다스리는 신들로 구성되지만 그리스신화에서는 흔히 하늘과 땅으로 구성된다. 바빌론의 서사시에서는 승리를 거둔 마르두크가 태초의 신 티아마트의 몸을 해체하면서 우주를 창조하지만 그리스신화의 제우스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생식 욕구와 생성의 역동성(예를 들어 태초의 에로스)을 통해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우주의 주권자로 등극한다. 또한 히타이트의 계승 신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헤시오도스의 계승 신화에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가이아의 존재가 있다.

로마인들이 ‘운명’을 무언가 ‘말해진fatum’ 것, 즉 신들이 천명한 것으로 이해했다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운명’은 ‘연결되어’ 있거나 ‘고정되어’(이것이 바로 영어의 destiny, 이탈리아어 destino의 어원인 라틴어 동사 destinare의 뜻이다) 있는 것과 연관된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의 ‘운명’은 무엇보다도 ‘분배’라는 독특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삶과 운명을 하나의 ‘분량’으로 보는 관점은 그리스신화의 여러 이야기에 생명의 교환이라는 주제가 등장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삶을 다른 누군가에게 양도하거나 물려준다는 이야기가 가능했다. 인간의 삶이 그에게 할당된 ‘분량’이라면, 적어도 신화 속에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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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동아시아 과학의 역사에서 중국의 지위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나카야마가 지적했듯이, 중국은 중요한 발전이 거의 언제나 먼저 일어나고 이후 ‘주변‘으로 그 발전이 확산되는 ‘중심‘이었다. 물론 시기에 따라 중국 내의 여러 지역들 사이에서 ‘중심‘과 ‘주변‘ 관계의변동과 뒤바뀜이 일어났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중심‘과 ‘주변‘의 이러한 뒤바뀔은 결코 그렇게 자주 예컨대 서양의 경우처럼 자주 -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중심의 지위는 과학 분야에서 특히철저했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중국에 대해 정치적, 군사적, 또는경제적 측면에서 일시적인 우위를 차지한 경우는 있었지만, 과학에서 중국의 지배적 지위는 거의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렇듯 "중국=중심‘의 거의 절대적인 지위로 인해, 중국 문화권의 주변부에 "위치한 사람들도 대체로 중국 과학의 중심성을 인정했다. - P183

그에 따르면, 세종대의 한국인들이 한양의 위도를 기준으로 하는 역산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것은 ‘자주적‘ 정신의 발로였기보다는 중국에 필적하는 역 계산 능력을 갖추겠다는 시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자신들의 수도를 기준으로 하는 역계산법을 소유함으로써 중국의 수준에 달하려는 그들의 염원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역산 체계를 ‘역(曆)‘이라고 부를 수없었기 때문에 산(算)‘으로 명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명나라 조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명나라 황제만의 독점적 특권으로 여겨진 역산 체계를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구축했다는 사실을 만일 명 조정이 알게 된다면 그들은 조선 왕의 충성심을 의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사례 또한 조선이 여전히 중국의 중심성을 인정하고 있었음을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P189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실제 관측과 일치하는 정확한 수치들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서에 중국 역서처럼 각 도에 해당하는 수치들을 포함시키는 것 자체였던 것이다. 중국과 같은 수준의 역서를 제작하여 사용하고 그 사실을 내세우려고 하는 이같은 노력은 역사서 편찬 주자학 체계 수립 등의 노력에서 보듯이 문화와 학문의 모든 영역에서 중국과 같은 수준의 성취를 꾀했던 징조 시기의 다양한 작업들과 함께 진행되었다. 이런 작업들은 조선이 모든 분야, 모든 차원에서 중국과 같은 수준에 달하려는 희망을 보여주며, 역법과관련해서 이 절에서 살펴본 상황은 이 같은 작업들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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