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동아시아 과학의 역사에서 중국의 지위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나카야마가 지적했듯이, 중국은 중요한 발전이 거의 언제나 먼저 일어나고 이후 ‘주변‘으로 그 발전이 확산되는 ‘중심‘이었다. 물론 시기에 따라 중국 내의 여러 지역들 사이에서 ‘중심‘과 ‘주변‘ 관계의변동과 뒤바뀜이 일어났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중심‘과 ‘주변‘의 이러한 뒤바뀔은 결코 그렇게 자주 예컨대 서양의 경우처럼 자주 -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중심의 지위는 과학 분야에서 특히철저했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중국에 대해 정치적, 군사적, 또는경제적 측면에서 일시적인 우위를 차지한 경우는 있었지만, 과학에서 중국의 지배적 지위는 거의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렇듯 "중국=중심‘의 거의 절대적인 지위로 인해, 중국 문화권의 주변부에 "위치한 사람들도 대체로 중국 과학의 중심성을 인정했다. - P183

그에 따르면, 세종대의 한국인들이 한양의 위도를 기준으로 하는 역산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것은 ‘자주적‘ 정신의 발로였기보다는 중국에 필적하는 역 계산 능력을 갖추겠다는 시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자신들의 수도를 기준으로 하는 역계산법을 소유함으로써 중국의 수준에 달하려는 그들의 염원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역산 체계를 ‘역(曆)‘이라고 부를 수없었기 때문에 산(算)‘으로 명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명나라 조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명나라 황제만의 독점적 특권으로 여겨진 역산 체계를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구축했다는 사실을 만일 명 조정이 알게 된다면 그들은 조선 왕의 충성심을 의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사례 또한 조선이 여전히 중국의 중심성을 인정하고 있었음을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P189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실제 관측과 일치하는 정확한 수치들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서에 중국 역서처럼 각 도에 해당하는 수치들을 포함시키는 것 자체였던 것이다. 중국과 같은 수준의 역서를 제작하여 사용하고 그 사실을 내세우려고 하는 이같은 노력은 역사서 편찬 주자학 체계 수립 등의 노력에서 보듯이 문화와 학문의 모든 영역에서 중국과 같은 수준의 성취를 꾀했던 징조 시기의 다양한 작업들과 함께 진행되었다. 이런 작업들은 조선이 모든 분야, 모든 차원에서 중국과 같은 수준에 달하려는 희망을 보여주며, 역법과관련해서 이 절에서 살펴본 상황은 이 같은 작업들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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