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계보는 단순히 복잡한 구조를 지닌 서사 혹은 다신주의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원시적인 사상의 표현이라고 볼 수 없다. 이 계보는 오히려 신들의 역사를 추적하고 이들이 세계에 행사하는 권력의 지도를 그리면서 신들의 혈연관계나 탄생 경로를 토대로 이들의 본질을 묘사하는 아주 복잡한 인식 도구에 가깝다.

헤시오도스의 서사시는 신들이 탄생과 결합과 동맹과 분쟁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나누어 가졌고 어떤 식으로 그들에게 할당된 운명을 받아들였는지 이야기한다. 제우스는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얻었고 티탄들은 반대로 타르타로스의 심연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바빌론의 「에누마 엘리쉬」에서 태초의 쌍은 물을 다스리는 신들로 구성되지만 그리스신화에서는 흔히 하늘과 땅으로 구성된다. 바빌론의 서사시에서는 승리를 거둔 마르두크가 태초의 신 티아마트의 몸을 해체하면서 우주를 창조하지만 그리스신화의 제우스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생식 욕구와 생성의 역동성(예를 들어 태초의 에로스)을 통해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우주의 주권자로 등극한다. 또한 히타이트의 계승 신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헤시오도스의 계승 신화에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가이아의 존재가 있다.

로마인들이 ‘운명’을 무언가 ‘말해진fatum’ 것, 즉 신들이 천명한 것으로 이해했다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운명’은 ‘연결되어’ 있거나 ‘고정되어’(이것이 바로 영어의 destiny, 이탈리아어 destino의 어원인 라틴어 동사 destinare의 뜻이다) 있는 것과 연관된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의 ‘운명’은 무엇보다도 ‘분배’라는 독특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삶과 운명을 하나의 ‘분량’으로 보는 관점은 그리스신화의 여러 이야기에 생명의 교환이라는 주제가 등장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삶을 다른 누군가에게 양도하거나 물려준다는 이야기가 가능했다. 인간의 삶이 그에게 할당된 ‘분량’이라면, 적어도 신화 속에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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