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하늘·땅·자연·몸에 관한 2천 년의 합리적 지혜
신동원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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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학문명이 실제로 세계에 기여한 현상은 의학 분야에서만 보이는데,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삼 재배 기술입니다. 인삼은 중국 기록에서 기원 전후 시기부터 약호가 알려진 이래 20세기 이전까지 최고의 건강 상품으로 인정된 약재입니다. 역사시대 이래 인삼은 중국 황제에게 바치던 한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습니다.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493/514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과학사를 알기 쉽게 정리한 교양 과학사다. 수천 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한국 과학사를 살펴보면서 저자는 한국 과학사가 외부 특히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반면, 여기에 대응할 정도의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우리의 옛 과학기술 대부분은 다른 나라로부터 받아서 이룩했고, 다른 나라에게 준 건 거의 없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끈 <동의보감> 정도가 예외가 될까요? 최근 반도체를 비롯한 정보통신 기술의 성취는 세계 문명 발전에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죠. 만약 정말로 우리의 옛 과학 기술이 서양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면, 그것도 지적 혁명을 일으킨 금속활자 인쇄술이었다면 더욱 값진 기여라 할 수 있습니다.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390/514


 그렇지만, 저자가 한국과학사를 일방적인 의존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 과학 문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무조건적인 수용 대신 우리의 현실에 맞게 개선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왔다는 점에서 한국과학문명은 독자적인 문명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중국과 다르다는 인식 속에서 만들어진 한글에서 드러나듯, 한국 과학은 비록 원리를 탐구하고 만들어내는 부문에서는 중국과 서양에 의존했지만, 경험적 사실로부터 개선점을 찾아내어 반영하는 기술 부문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기도 한 역사를 발견한다.


 고대국가의 등장 이후 한국의 과학문명은 문자 전통이 이미 확립된 중국의 문자와 그 문자로 기록된 제반 지식을 습득하여 자신의 문화를 표현해내고, 더 나아가 학술, 문학, 예술,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기존 한국문명의 틀을 넘어 중국을 위주로 한 동아시아문명의 일원으로 자리하면서 비약하게 됩니다.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13/514


 혼천의는 우리 민족이 천 년 이상 만들어 써온 과학기술입니다. 혼천의가 중국에서 유래한 건 맞지만 우리 선조들이 거기에 혼신의 공을 들여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누가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으로 달성한 과학 수준이 중요합니다. 동서양 과학을 접목한 혼천시계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97/514


 그런 점에서 한국과학문명은 분명 독자적이었고, 경험적인 요소가 강한 문명이었다. 또한,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관점 은 현대과학문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전통과학문명은 오늘날에도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실제적이면서도 경험적인 요소가 강한 과학문명이 유교적 세계관에 종속되었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정치권력에 의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회 전반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고, 정권의 성격에 따라 성쇠가 좌우된 반면, 서양에서는 종교 대신 새로운 계몽 시대의 사상으로 과학이 자리매김했기에 이후 과학혁명, 정치혁명, 산업혁명 등으로 이어져 근대화 시기 이후 동서양의 격차가 크게 확대된 역사는 이러한 아쉬움을 뒷받침한다.


 우주, 자연과 인간세상의 조화라는 생각은 한국 과학문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핵심 개념입니다. 한국 문명에는 천문학 외에도 천명사상에 입각해 과학기술이 정치와 깊이 관계 맺은 부분이 있습니다.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파악해 인간세계 질서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현대 과학문명과 크게 다른 점이지요.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88/514


 이처럼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는 한국과학사 전반을 살펴보고 과학문명사의 의의를 알기쉽게 정리하는 좋은 교양과학서적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토대 위에 이후 <한국의 과학과 문명> 시리즈를 통해 우리의 과학사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과학문명의 가치는 세계에 끼친 영향보다는 세계 문명의 수용과 활용, 변형이라는 측면에서 크게 빛을 발합니다. 중국은 오늘날의 서양문명이 그러하듯 엄청나게 커다란 문명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문명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선진 문명에 주눅 들지 않고 한국문명이라는 몸체로 그 문명에 맞서 수천 년 역사를 엮어왔습니다. 천문학, 수학, 의학, 농학, 지리학, 군사기술, 그리고 인쇄술이나 도자기 제작 기술과 같은 수공업 기술, 의식주 관련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보였는데, 선진 과학기술의 변용와 독창적 발휘가 특징입니다. 중국과학문명을 모방하면서도 독자적으로 건설하고 유지해온 문명이므로 동아시아과학문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과학문명은 더 나아가 세계과학문명의 일원이 되었지요.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494/514



세종은 중국 달력을 사용하면서도 조선의 하늘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어 같이 사용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사실 중국에 대한 정신적인 독립 선언이었습니다(p80)... 조선은 외교용으로는 중국 명나라에서 받아 온 대통력을 계속 썼지만, 실제 예측에는 이렇게 칠정산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날짜와 숫자가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공식과 풀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결과만 밝혀져 있습니다. 서양 수학과는 다른 방법으로 푼 것이 분명한데 계산한 값은 일치합니다 - P82

서양에서는 개념과 원리를 중시하는 기하학을 중심으로 수학이 발달한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문제 풀이식 대수학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수학이 매우 뛰어난 부분이 많으면서도 서양 수학과 같은 정밀한 체계는 갖추지 못한 겁니다. - P105

물론 한의학이 중국에서 유래하고 크게 발전한 건 인정해야겠죠. 하지만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은 모두 의학이 발전했고, 저마다 자국의 특성에 맞는 의학의 형태로 진화시켰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의학은 동아시아 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국이 나름대로 발전시킨 점에 주목한다면 중국 전통 의학, 한국 전통 의학, 일본 전통 의학, 베트남 전통 의학이라 할 수 있겠죠. 그 가운데 한국 전통 의학을 한의학 韓醫學이라 하는 겁니다. - P286

비숍은 결론적으로 한국인의 잠재성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많은 작업과 함께 자극적이고 혐오스럽던 서울의 향기는 사라졌다. 위생에 관한 법령이 시행되었고, 집 앞에 쌓인 눈을 모든 식구들이 치우는 것이 의무적일 정도로 한국의 문화 수준은 매우 높아졌다. 그 변화들은 너무 커서, 나는 1894년이었다면 서울의 한 예로서 이 장을 위해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를, 그 특징적인 빈민촌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국인은 어떤 행정적인 계기만 주어지면 무서운 자발성을 발휘하는 국민이다. 서울은 한국적인 외양으로 제건되고 있지 절대로 유럽적으로 재건되고 있지는 않다. - P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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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9-09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3-09-09 10:21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가을 날 보내세요~ ^^:)
 

분명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생각대로 실행에 옮긴 철학적 방법론(지식인들, 정치인들, 시인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선입견을 논박하고 적절한 이론적 해결점을 모색하는 방법)이 몇 십 년 뒤에 하나의 진정한 장르로, 이른바 ‘로고스 소크라티코스logos sokratikos’라는 철학적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은 철학적 대화라는 장르의 이론적이고 문학적인 수준을 전례 없는 단계로 끌어올리면서 누구도 초월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적인 담론의 본질적인 특징들, 즉 비판적이고 변증적이면서도 실천에 열린 자세를 유지한다는 점과 결과적으로 윤리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을 중요시한다는 특징을 고수할 줄 알았다. ‘대화’를 통해 플라톤은 거대한 철학의 무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글의 상호호환성을 강조하는 전략은, 바흐친Mikhail Bakhtin의 문학이론적인 관점에서, 문화적이고 문학적인 언어들을 철학의 무대 위로 가져옴으로써 하나의 패러디를 구축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이 언어들의 대체를 목표로 하는 철학적 담론 속에서 이 언어들을 비판하고 전복시키거나 때에 따라서는 다시 채택하고 변형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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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9-08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봤습니다. 이 책을 살까말까 하다가 그냥 내려놨네요. 이런 류의 책은 이제 더이상 읽지 않으려구요. 음, 뭐...서양철학사 개설강의 부탁이 들어오면 또 모르겠습니다..ㅎㅎ

겨울호랑이 2023-09-08 10:41   좋아요 0 | URL
yamoo님 말씀처럼 서양철학사 책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고, 또 종류도 많기에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수준이 되면 보다 깊이있는 저서로 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신의 두께가 어느 정도 되는 그럴듯한 제목의 벽돌책이 출간되면 자연스럽게 손이 가게 되네요. 그러면서 또 새롭게 깨닫고 배우는 면도 있어 저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
 

이처럼 16~17세기에 사가기록화를 만들어낸 집안은 다른 지역보다 영남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특히 안동 지역은 기록화 외에도 각종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기로 유명하다. 조상의 손때가 묻은 각종 전적, 편지와 문서 등을 소중히 간직했을 뿐 아니라 사환, 모임, 행사, 여행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록을 남기는 버릇이 강했다.

이상으로 사가기록화의 제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집단을 영남 지역의 사족과 이유간 및 홍이상 집안에 한정하여 살펴본 것은 사가기록화 각각의 제작 배경에 이들이 비교적 자주 등장하여 결과적으로 다른 집안보다 비중있게 다룰 만했기 때문이다. 높은 관직에 이르면 관료 사회의 관행에 따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궁중기록화나 관청기록화를 집안에 쉽게 소장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사가기록화를 집안에 남기기 위해서는 기록화의 효용성과 역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일정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집안의 전통이나 개인의 교유망 안에서 공유되는 경험이 중요했으며 이를 짚어나가다 보니 특정한 집안과 지역이 드러난 것이다.

다른 지방에 비하면, 안동 사족들은 단단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지주 계층으로서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이황을 매개로 학문과 정치적으로 결속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안동을 중심으로 성리학의 학맥이 생활화된 공동체적 특징을 가진 영남의 사족들은 16세기 이래 사가기록화의 제작 배경에 지속적으로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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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아닌 홍범도(洪範圖 , 1868~1943)장군에 대한 후대의 사상검증과 그 결과로 육사에서 흉상이 철거된다는 어이없는 결정이 만만치 않은 역풍을 가져온 듯하다. 흉상 철거의 근거는 홍장군이 1920년대 만주지역에서 자행된 일제의 민간인 학살 등이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넘어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 등은 이미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기에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920년대 독립군을 바라보는 이른바 좌익 계열의 연구가의 관점에 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 국내진공작전을 대담하게 감행, 함경남도 혜산에 진입해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하고, 10월에는 강계, 만포, 자성 등을 기습해 일본군을 타격했다... 청산리 대첩 이후 독립군 부대들의 대규모 승전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이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김좌진 독립군부대와 홍범도 독립군부대가 1921년 우수리강을 건너 소련 땅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 주력부대들은 청산리대첩 이후 일본군의 야수적 탄압에 겁을 먹고,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민중들을 내팽개치고 투쟁의 현장에서 벗어나 안전한 북만 땅으로 도피해 갔던 것이다... 이것은 독립군이 자산계급의 군대였고 부르주아민족주의를 사상적 바탕으로 하는 군대였으며, 활동에서 분산성과 산만성을 갖고 자파 중심으로 서로 배척하고 질시한 데 있었다. _ 박경순, <196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4


 홍범도 장군과 독립군을 바라보는 좌익 연구가들은 민족주의 성향의 부르주아적 한계를 대일항쟁의 한계로 인식하고 비판한다. 홍범도 장군의 삶과 철학은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들 다수처럼 변절되지 않은 한결같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관점에 따라 21세기 뉴라이트 사관의 역사학자들에게는 공산주의자로, 레프트 성향의 역사학자들에게는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이와 같은 후대의 왜곡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 독립투사들이 홍범도 장군 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장군 생전에 생겨나지도 않은 북측 정권의 악행으로 사상범으로 몰려 사후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서, 서기 전(BCE)에 태어나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천당에 가지 못하는 단테 알레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의 <신곡 La Divina Commedia>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중세의 교조주의와 다를 것 없는 오늘날 정부의 행태가 많은 반발을 일으키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31 착한 스승은 내게 “너 지금 보는 이 영혼들이 누군지를 넌 묻지 않느뇨? 그럼 너 더 나아가기 전에 내 알리고 싶노라.

34 저들이 죄를 짓지 않았고 공이 있다 해도 그것은 너 믿는 믿음의 한 몫인

성세聖洗를 못 받았기에 넉넉치 못하니라.

37 그리고 그리스도교 이전에 있었던 만큼 맞갖게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였나니 나 역시 이들 중의 한 사람이로다.

40 다른 죄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 탓으로 우리는 버림을 받고 오직 이 흠집 까닭에 가망도 없이 우리는 뜬 소망 속에 사느니라.”

43 내 그 말을 듣자 마음이 큰 슬픔에 사로잡혔나니 뛰어나게 값진 사람들이 림보(지옥 제1환)에 걸려 있음을 안 탓이어라. _ 단테 알레기에리, <단테의 신곡 - 상>, p68/634



 친일(親日)과 반일(反日) 사이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조금은 덜 알려져 있지만, 1930년대 항일투쟁의 역사를 되짚어보려 한다. 앞서와 같이 1920년 경신참변(庚申慘變) 등으로 위축된 항일무장투쟁은 무너지는 듯했으나, 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때마침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과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키며 중국내륙으로 침탈해 오는 일본군에 대한 투쟁을 전개해간다. 투쟁의 중심이 김일성(金日成, 1912~1994), 김 책(金 策, 1903~1951), 최용건(崔庸健, 1900~1976) 등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 금단의 영역으로 언급을 피한 것이 오늘날 친일세력의 부활과 확장을 가져온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페이퍼의 마지막은 친일파들이 홍범도 장군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단서가 되는 부분을 옮기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친일 행적을 반공 이념으로 덮으려는 움직임이 마음을 답답하게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풀지 못한 숙제가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작은 위안을 삼는다...  


 홍범도는 1921년 9월 연해주지방에서 고려공산당 중앙간부 명의로 ‘우리 고려 노동군중에게’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독립군이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언급하는 한편, 싸워야 할 대상은 일제뿐만 아니라, 동족 내부의 관료와 유산자, 가짜 공산당원 등도 해당된다고 구체적으로 밝혔던 것이다. 그 성명서의 일부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환기하며 단합할 지어다. 우리 의병대들을!! 그들은 일찍 서북간도에서 일본 군벌주의자를 박멸하는 전쟁에 아름다운 이름과 거룩한 성적을 날아내였나니라. 동무들이여! 손에 잡은 총을 더욱 굳게 잡고 참된 자유를 각오하는 혁명자를 단합하여 우리의 행렬을 채우라. 주의할 지어다 우리의 수적晩賊은 자못 일본침략주의자뿐 아니라 동족 사이에도 있나니라. 자세히 말하면 관료급 유산자이며 홍○와 같은 외홍내백한 가면공산당원들이로다. (중략) 동무들이여 잊지 말지어다. 일본 군국주의자와 전쟁하는 동시에 세계 만방에서 압박받는 노동자 동지들이 후원하리라. 또는 이 동지들이 멀지 아니하여 압박계급과 대전을 개하리니 이 대전은 참으로 우리를 해방시키고 세계로 하여금 진리의 낙원을 형성하리니 정신을 가다듬어 전투준비에 급급할진저.-1921년 9월 15일 고려공산당 중앙간부(제3국제공산당 고려부) 각 의병대 수령 홍범도·최진동·허재욱·안무·이청천(윤상원,〈자유시사변과 홍범도〉,《역사연구》10, 역사학연구소, 2002, 271·277쪽) _장세윤, <홍범도>, p23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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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9-06 1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글을 더 기다리게 하는 반가운 페이퍼네요. 홍범도 장군께서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질투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정작 장군은 한 길을 보며 간 분이었는데 말이죠.

겨울호랑이 2023-09-06 13:04   좋아요 2 | URL
각자 자신의 관점에 따라 시대와 인물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역사가의 연구임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역사는 하나의 관점 대신 다양한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해석된 결과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상과 이념만이 옳고 나머지는 다 그르다는 식의 접근은 인문학이 아닌 종교겠지요...

베이글 2023-09-06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풀지 못한 숙제가 다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말씀이 저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답답하게만 보였던 이 사태를 능동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준 말씀입니다.

오늘도 좋은 글과 책 소개 감사합니다.
좋은 오후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3-09-06 14:51   좋아요 1 | URL
네, 많이 힘든 요즘이지만 돌이켜보면 박근혜 탄핵 직전 인 2016년에도 극심한 혼란 속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골이 깊은 만큼 산도 높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베이글님 평안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