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성비판』 강의 원전디딤돌 2
이수영 지음 / 북튜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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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실천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그 어떤 정념적 대상들과 상관없이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저 생각할 수만 있었던 저 자유를 객관적 실재로서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천이성비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와 윤리의 기초를 확보한다는 것. 이에 따르면 자유는 사변적으로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실천적인 차원에서만, 다시 말해 윤리적 차원에서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는 것입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23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을 풀이한 이수영의 <실천이성비판 강의>. 앞선 <순수이성비판 강의>를 통해 시공간을 통해 지각하는 대상에 입법하는 지성의 역할과 이에 대해 순수이성에 의한 월권이 상세하게 설명되었다면, 이제는 감각의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한 논의와 해설이 <실천이성비판 강의>에서 이루어진다.

자유의 범주들은 저 자연의 범주들에 비해 명백한 특징을 갖습니다. 자연의 범주들(지성의 범주들)은 무규정적인 객관들을 보편적인 개념들을 통해 인식하는 사고형식이었지만, 자유의 범주들은 자유로운 의사의 규정에 관계하므로 실천적 요소 개념들로서 직관의 형식(시공간) 대신 이성 중에 있는 순수의지의 형식을 주어진 것으로 그 기초에 두고 있습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123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널리 알려진 개념은 아무래도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A54)"는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과 자유(自由)라 생각된다. 얼핏 '~을 해야한다'는 명령과 자유의 개념은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기에, 이들이 하나로 묶이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실천이성비판 강의>는 끊어진 듯 보이는 이 간격을 쉬운 해설을 통해 부드럽게 이어준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는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법칙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정념적인 조건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상황, 감정 등과 같은 여러 조건들이 관여하는 순간 도덕법칙은 시공간의 현상으로서 규칙으로 전락할 것이기에, 도덕법칙이 형이상학적인 항상성을 갖기 위해서는 '정념'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실천 규칙이 하나의 실천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하는 결과를 위해 우리가 필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결과를 낳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묻기 전에 의지 자체를 충분히 규정해야 합니다. 즉 가언적이지 않고 정언적이어야 합니다. 법칙이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 필연성을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의지에 우연히 부착해 있는 정념적인 조건들로부터의 해방입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33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법칙은 별이 빛나는 하늘에서부터 정언명령이라는 형식으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는데, 우리는 이러한 형식에 대해 '자유'의지를 통해 내용을 실천적으로 채워갈 것을 요구받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에 관계하는 것은 오로지 실천이성이라는 것을 <실천이성비판 강의>를 통해 이해하고, 이 개념들을 바탕으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으로 들어간다면 좋을 듯하다. 너무 많은 설명을 해설서를 통해 다 이해하기 보다 큰 틀을 세워두고 상세한 내용을 채워간다면 한결 발걸음이 가벼우리라 생각한다. 이와 함께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정념들로부터 얻어지는 부분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PS.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칸트는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쓴 책이 독자들에게 폭넓게 이해될 수 있도록 배려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정언명령은 선험적인 명제입니다. 경험을 통해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 추론에 의해 도출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여기서 순수이성은 자신이 근원적으로 법칙 수립적임을 고지합니다. 감성도 지성도 아닌 이성 자신이 의지에게 명령하는 것이 바로 정언명령입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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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직은 정의로운 상황에서 정의로운 단계를 거쳐 발생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 자체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한편 존 롤스(John Rawls)는 공정한 상황에서 공정한 절차를 거쳐 합의된 내용은 그 자체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주장은 절차적 정의관을 채택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정의의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다.  - P50

 결국 노직이 정당한 권리에 근거한 배타적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면 롤스는 최소 수혜자의 이익의 개선을 고려하는 차등 분배를 주장한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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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성비판』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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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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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강의 원전디딤돌 1
이수영 지음 / 북튜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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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가 하고자 하는 바는, ˝선험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의 근거를 밝혀내˝고, ˝이런 판단의 모든 종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A10)을 충분하게 규정하는 일입니다. 이는 ˝형이상학의 성패˝가 달린 중대한 일입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물음이야말로 ˝순수이성의 본래적 과제˝(B19)이고, 형이상학의 기반을 확보하는 일이 됩니다. _ 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p63

이수영의 <순수이성비판 강의>는 제목 그대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을 풀이한 해설서다. 혼자 읽기에 결코 만만하지 않은 <순수이성비판>은 상세한 해설과 강의없이는 책의 초반인 초월적 감성론의 시간과 공간으로의 진입마저도 쉽지 않게 한다. 큰 마음먹고 길 없는 곳을 수풀을 헤치고 가는 심정으로 읽다보면 끊임없이 제기되는 오류와 부정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와있는가 헤매기 십상이다. 그런 면에서 <순수이성비판 강의>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오르기 전 지도로 전체 산의 구조를 잘 보여주는 조감도, 지도로 여겨진다.

이성의 본성으로 인해 경험의 한계를 넘어 실증할 수 없는 영역에서 자신의 진리를 주장하는 논란이 한없이 벌어지는데, 이곳이 형이상학이라는 공간입니다. 답은 없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질문하는 공간이 형이상학이라는 거죠. 따라서 필요한 일은 ‘비판‘인데, 이는 지금까지 형이상학이 걸어왔던 그 길, 즉 경험을 초월한 이성의 사용을 인해서 초래된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칸트는 이를 ˝이성의 능력 일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는데,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_ 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p25

시공간이라는 감성의 형식과 범주라는 지성의 형식을 통해 사람의 인식이 형성되지만, 사람의 경험을 넘어선 곳까지 지성을 사용하려는 순수이성의 월권에 대한 비판이 <순수이성비판>의 거친 요약이라면, 이러한 틀 안에서 감성과 지성, 순수이성의 관계와 한계에 대해서 개략적인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면 <순수이성비판 강의>는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보다 깊은 논의는 <순수이성비판 강의>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이는 원전에 대한 입문해설서의 월권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PS. 오해가 있을까 싶어 붙이는 글. 입문 해설서로서 <순수이성비판 강의>의 내용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독자들 입장에서 해설서만으로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기에 담을 수 없는 부분을 무리하게 이해하려 하기보다 차라리 원전을 직접 경험하는 편이 더 좋을 듯 싶다...

칸트가 보기에 지금까지 형이상학의 문제는 이처럼 순수지성 개념이 경험적 한계를 넘어(초험적으로) 이성의 요구에 따라 무제한적으로 사용되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지성과 이성이 초자연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초월적 변증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초월적 논리학은 경험적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 지성의 사고 규칙을 다루는 초월적 분석학과 그 경험의 한계를 넘는 지성과 이성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는 초월적 변증학으로 구성됩니다. _ 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p111

초월적 연역 부분은 <순수이성비판>의 심장부라고 평가됩니다. 초월적 연역의 핵심은 인식 주관(성)이 모든 대상(경험)의 객관성을 정초한다는 주장입니다. 객관성이라고 하면 우리 바깥의 저 객관(대상이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우리 주관이 경험의 객관성을 정초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우리 인식 주관에 있다는 것입니다. _ 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p168

사실 순수이성은 자기 자신만을 다룹니다. 순수이성에게는 대상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 인식들이 주어지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의 체계적 통일만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성의 용도는 지성 사용을 촉진하고 지성 사용의 올바름을 보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성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길을 개방함으로써 이성의 경험적 사용을 무한하게 촉진하고 확립합니다. _ 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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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0-03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샌델의 책에서 칸트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읽고 어려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겨울호랑이 2023-10-03 16:27   좋아요 1 | URL
칸트 철학은 서양 철학의 기본이면서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 어려움을 느끼는 거리만큼 철학이 일반인들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10-03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비판하기 위해선
그의 책을 열심히 많이 잘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3-10-03 20:02   좋아요 1 | URL
데이비드 흄을 좋아하시는 북다이제스터님께 칸트의 비판 3부작은 일종의 ‘적전술‘과 같은 의미로 다가올 듯 합니다 ㅋ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인도-태평양 이니셔티브’ 두 거대한 지역전략이 대결체제를 잡아가는 목전의 형세는 적어도 다가올 미래가 미중 양국간 경쟁을 넘어 전세계 수많은 국가들을 행위자로 불러들이는 전면적이고 복합적인 아레나가 될 것을 예고한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초 동아시아론이 등장한 배경 자체가 1970, 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시각으로는 탈냉전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전환에 대응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의 소산이었다. 창비의 동아시아론은 민족문학론의 태내에서 자라나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 것으로서, 그 자체가 사상의 유연성과 자기혁신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리영희의 논설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데땅뜨를 물밑에서 추동한 시대적 논리를 헤쳐나가는 그의 눈이다. 리영희는 데땅뜨가 미국이 주도한 것도, 1970년대 들어 갑자기 발생한 것도 아니며, 전후 25년의 세계정세의 변화, 특히 1960년 이래 10여년의 변화가 만든 귀결이라고 보았다. 냉전의 긴장이 한층 드높았던 1950, 60년대에도 ‘평화공존’ ‘중립비동맹’ 등 냉전 논리를 이반하는 다원화의 힘이 국제사회 저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1970년대 초 거대한 원심력으로 가시화된 것이 데땅뜨라는 것이다. 그 흐름 한가운데 있는 것이 중국이었다.

미중 세력경쟁체제의 형성으로 ‘신냉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또다시 우리의 인식체계를 엄습하는 지금, 냉전체제 저변의, 그것을 이완하고 해체하려는 거대한 원심력에 주목했던 그의 혜안은 다가오는 대전환의 시기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즉 세계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강대국의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이데올로기에 포장된 허상에 안주하지 말고 세계를 움직이는 다기한 동력에 실사구시적으로 착목함으로써 시대의 참된 논리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중공을 높이 평가했던 핵심 이유는 중국이 냉전의 표층에 감춰진 원심력을 읽어내고 그 편에 섰다는 데 있었다. 미소 냉전의 이분법에 지배되지 않는 광대한 ‘중간지대’가 있으며 그 중간지대의 힘에 의지하는 한 시간은 중국 편이라는 마오 쩌둥(毛澤東)의 낙관주의야말로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포위망을 버텨낸 힘의 원천이었다.

지금의 ‘일대일로’에는 그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 이념의 빈자리를 과거에 비할 바 없이 막강한 중국 자본이 메우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 명칭부터가 고대문명의 교융과 번영을 상징하는 ‘실크로드’를 참조한 데서 보이듯, ‘일대일로’가 모색하는 새 이념은 필경 모종의 문명론적 지향을 감추고 있다. ‘일대일로’를 자본주의 경제 양식을 극복하고 중국의 역사문명과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탈근대적 문명기획으로 풀이했던 왕 후이(汪暉)의 작업은 결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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