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기의 제주가 4·3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로 치달아가게 된 원인을 나름대로 탐색하면서 사건을 총체적으로 다뤄보고자 했으나 4·3은 인간의 언어로 그려내기엔 너무나도 압도적인 비참함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북토크 내내 "어두운 방 안에서 코끼리를 더듬은 격"이라는 표현을 반복했다.

그가 찾은 키워드는 제주의 ‘공동체주의’다. 작가는 그때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제주 공동체를 그리워하면서, 지금의 제주가 대한민국의 일부라 해도 중앙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완전한 독립’과 ‘자치권’을 얻기를 소망했다.

『제주도우다』는 항쟁이 일어나기 이전의 제주를 공들여 묘사하고 있다. 해방과 함께 갑자기 인구가 6만이나 늘어난 제주는 들떠 있었다. 주인공 안창세가 조천중학원을 다니던 1946년에는 전도의 소학교 학생 수만 2만에서 4만으로 늘었다. 일본이 물러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와 조선말을 쓰고 자치조직을 만들면서 새 나라를 세우고자 한 이들은 보통의 제주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무슨 일이든 공동체적으로 대응했으니 4·3은 해방공간에서 자주독립국가를 꿈꾸었던 민중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공동체로서 봉기한 것이라고 봐야 해요. 사실 처음 원고에는 ‘아나키즘’이라고 썼는데 교정을 보며 ‘무정부주의’라고 고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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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 케니의 서양철학사 4
앤서니 케니 지음, 이재훈 옮김 / 서광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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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의 역사를 통하여 용어 표현을 달리하면서 두고두고 되풀이해서 제기된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해하려면 일상생활에서 쏜살같이 스치듯 마주치는 개별적인 것들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대상들(entities)이 정신의 외부 세계에 실존해야만 하는지를 묻는 물음이다. 고대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나 형상이 물질이나 물체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실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논했다. 중세에는 줄곧 보편자가 실재하는 것인지 기호에 불과한 것인지를 두고 실재론자와 유명론자 사이에 논쟁이 이어졌다. 현대의 수학철학자들은 수를 숫자와 동일시하는 형식주의자, 그리고 수가 정신 세계나 물질 세계가 아닌 제3세계를 구성하는 독립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실재론자와 수학적 대상의 본성에 관해 팽행한 논쟁을 벌였다.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254


 앤서니 케니(Anthony Kenny, 1931 ~ )의 <현대철학 A  New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volume 4 : Philosophy In The Modern World>은 시리즈의 마지막이자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부터 1970년대까지 철학을 다룬다. 철학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앞 장에서 정리하고, 뒷부분에서 세부적으로 내용을 정리하는 케니의 서양철학사의 서술은 흔들림없이 시리즈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현대 철학의 이 이전 시기의 철학과 가장 크게 구분되는 점은 무엇일까. 중세의 유명론(nominalism)과 실재론(realism) 논쟁과 같은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반복되는 주제가 현대 철학에서도 다뤄지기도 하지만,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자연과학의 독립과 수학의 도입이라 생각된다. 


 지칭 대상의 불투명 문제는 이 모든 양상 문맥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그 문제는 두 종류의 다른 지칭 대상을 구별함으로써 처리될 수 있다. 어떤 용어가 진정한 이름이 되기 위해서는 크립키의 전문 용어로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라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그 용어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지칭 대상이 동일해야만 한다. 그와 달리 뜻에 의해 지칭 대상이 정해지기 때문에 가능 세계에 따라 지칭 대상이 달라지는 표현들도 있다. '9=행성들의 수'에서 '9'는 사실상 어느 가능 세계에서나 계속 그 지칭 대상을 유지하는 고정 지시어이다. 그러나 '행성들의 수'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수를 지칭할 수도 있는 일종의 기술(description)이다.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174


 근대 철학에서 인식과 관련하여 감성(感性), 지성(知性), 이성(理性) 등 인간의 사고 능력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는다면, 현대 철학에서는 "내가 하는 '무엇'은 무엇인가?"라는 한 단계 더 들어간 질문과 답이 논의된다. '무엇'이라고 지칭되는 대상의 기호와 의미와의 관계 속에서 전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언어(言語)의 문제가 현대철학에서는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언어와 대상 사이의 관계, 지각(知覺) 이전의 관계가 새롭게 주목되고, 사회와 언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오염을 최소화하기 위한 간결한 수학적 표현 양식의 등장 등이 현대철학과 이전 철학의 큰 차이점으로 생각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에 정통하는 것이 의심의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p라는 것에 대해 의심을 보이기 위해서는, 누구든 p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데카르트의 극단적인 의심은 그 의심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낱말들의 의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떼문에 자멸하게 된다. (OC 369, 456)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237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은 이전 시대의 다른 어떤 철학보다 불명확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이전 시기의 철학들이 권위를 통해 극단적인 경우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진 데 반해, 반증가능성이라는 과학의 특성과 다원화된 민주주의 체제가 보편화된 현대철학에서는 보다 세분화된 영역에서 간결한 방식으로 다양한 양태로 수많은 사상이 공존하는 것이 아닐까.


 다윈주의는 많은 것이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개체종이 이전의 종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진화론적 압박과 선택의 메커니즘에 의해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메커니즘은 그와 같은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에 의한 설명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전형적인 번식 집단, 즉 종이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419


 제임스는 결론에서 우주의 최상의 실재(supreme reality)를 흔쾌히 '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설명은 지극히 불투명하다. 그것은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가 신을 '모든 사물이 그들 존재의 법칙을 실현하려는 경향성의 흐름' 또는 '의로움을 향한 우리 자신이 아닌 영원한 힘'이라고 정의한 것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제임스는 종교를 본질적으로 감정의 문제로 간주했고, 감정을 본질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의 불분명한 표현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435


 근대 이후 과학을 새롭게 떠나보내고, 미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현대철학. 지금도 계속 새로운 이론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철학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큰 흐름을 잡는다는 생각으로 정리를 한다면 케니의 <현대철학>은 좋은 개론서가 되리라 생각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크로체의 경우, 예술은 역사와 과학 사이에 위치한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일반 법칙이라기보다는 특수 사례를 다루기는 하지만, 예술의 특수 사례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된 것이며, 과학처럼 보편적 진리를 예시한다... 크로체에게 예술의 핵심은 직관(intuition)이다. 직관은 실증주의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느낌(feeling)과 동일하지 않다. 느낌은 표현을 필요로 하는데, 표현은 인지적 문제이지 감정상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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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이란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국가 장치 아닌가. 바른 자세로 수업을 경청하라는 지도는 규율화된 신체를 양산해 사회적 유용성을 극대화하려는 학교-감옥의 통치술일지도 몰랐다.

20세기 초 유럽 강대국들은 선제타격만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선빵의 미신’을 신봉하다 자신의 발을 찍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그 미신의 결과였다. 야만의 시대였던 20세기가 종식된 지도 20년이 넘었지만 ‘선빵의 미신’은 여전하다.

미 국무부의 추산에 따르면 한국의 국방비는 북한의 10배 이상으로 이는 북한 국내총생산(GDP)의 세배에 가까운 액수다.1 2019년 시점에서 북한이 경제생산활동을 100퍼센트 군사활동에 집중해도 한국의 국방비를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사실 한국은 1970년대 초부터 북을 능가하는 국방비를 지출하기 시작한 데 이어 그 격차를 계속 벌려 이제 북을 압도하고 있다. 2023년 글로벌파이어지수에서 한국이 6위, 북한이 34위인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제 모두가 선제타격 능력을 확보하고, 이를 연습하는 상황이 됐다. 통일부조차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에 맞서는 북중러 연대 구도"를 우려하는 상황이다. 지금 동북아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제는 전쟁 자체를 우려해야 하지 않는가.

윤석열정부가 이전 문재인정부의 정책을 ‘거짓 평화’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단 그 이유는 잘못됐다. 북한의 선의에 의존한 평화였기 때문에 거짓 평화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는 대화와 협상을 대북정책의 한 축으로 삼았지만 ‘힘을 통한 평화’를 또다른 축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대화를 하고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동시에 무기체계를 개발·생산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윤석열정부가 힘을 통한 평화의 일환으로 구축하고 있는 ‘3축체계’는 문재인정부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판문점선언에서 ‘군비감축’에 합의했지만 국방비를 증액하는 등 군비를 확산했다. 말과 행동이 다른, 말 그대로 ‘거짓 평화’였다.

지금까지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이 실패한 것은 ‘거짓 평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한국 자체가 평화적 전환을 이루지 않는다면 정상회담만으로, 또는 정상 간의 합의만으로는 한반도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당위적 명제를 배우는 데 30여년이 걸렸다.

이보다 당장 시급한 것은 우발적 사고나 실수가 위기로, 나아가 전쟁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남북간의 핫라인 및 유엔사와 조선인민군 간의 군사핫라인 재가동이 절대적으로 시급하다. 민간 차원에서도 군사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감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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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즈나(prajna)는 지혜인데, 이것은 다르마(Dharma, 얼나)의 변형이고 바라미타(Paramita)는 니르바나님께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얼나(다르마)로 니르바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프라즈나 바라미타‘의 뜻이다... 니르바나님은 반야바라밀다의 체(體)요, 반야바라밀다는 니르바나님의 용(用)이다. 니르바나님의 얼(반야바라밀)을 받은사람은 얼나의 붓다(Buddha)가 된다. - P48

개체(個體)의 제나(自我)가 전체의 얼나(三我)로 돌아가 불안과 공포와 절망의 제나(自我)가 없어지고 사랑과 기쁨과 광명의 얼나가 황홀하다. 석가붓다가 깨달음을 알고서 3칠일 동안 법열(法悅)에 있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나 쪽에서 말하면 제나의 죽음인 상아(喪我)의 좌망(坐忘)이다. 그러나 얼나 쪽에서 말하면영원한 생명인 얼나(다르마, 프뉴마)의 실현이요 영광이다. 이 얼나로 솟나야 혈연(血緣)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것이 붓다가 되고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개체의 생명이 전체의 생명과 하나(一)되는 것이다. 이것이 귀일(歸一) 신앙이다. - P325

류영모가 말씀만을 믿는다는 것이 니르바나님의 말씀(만트라)은 참되어 거짓이 없다는 말인 것이다. 몸나도 거짓이고, 세상도 거짓이고, 우주도 거짓인데 오직 니르바나님만이 그리고 니르바나님의 말씀만이 참되어 거짓이 없다. 거짓은 반드시 죽고 반드시 죽으면 거짓이다. 영원한 것이 참이고 참은 영원한 것이다. 니르바나님(하느님)은우리의 사모할 영원한 님이요, 또한 우리가 찾아야 할 참나다.  - P357

석가붓다는 팔정도(八正道)로 사는 사람은 저 언덕(피안)에 이른 것이요, 팔정도로 못 사는 이는 저 언덕(피안)에 이르지 못한 이라고 말했다. 팔정도로 사는 사람은 얼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얼나(法我)는 니르바나님의 생명인 얼(Dharma)인 것이다.
그러므로 얼나를 깨닫는 것이 니르바나님께로 가는 것이 된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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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달타 태자가 6년 동안 결사적인 고행 끝에 얻은 깨달음을 한마디로 나타낸 것이고, 집, 멸, 도(苦集滅道) 4성제(四聖諦)이다. 괴로운 몸과 모여진 맘의 제나(自我)를버리고 니르바나님(Nirvana)이 주신 얼나(法我)로 솟나라는 것이다. 얼나(法我)는 니르비나님(하느님)의 생명으로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노자(老子)와 예수가 깨달은 것도 이것이고 마하트마 간디와 류영모가 깨달은 것도 이것이다. 앞으로어떠한 성인이 온다 해도 이 진리밖에 다른 것은 없다.  - P41

예수가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이 내 마음에 와 얼나(프뉴마)가 되었다고 하듯이 붓다는 니르바나님의 생명인 불성이 내 마음에 와 얼나(다르마)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쓰는 말이 달라 그렇지 실체(世體)는 하나인 것이다. 전체가 하나인데 다를 까닭이 없다. 아버지 하느님과 얼나가 하나이듯이 니르바나님과 다르마가 하나인 것이다. - P69

진여(眞如)인 니르바나님이 보낸 얼나는 제나(自我) 너머에 있다. 거짓나는 참나가있기 때문에 거짓나가 있다. 거짓나(假我)가 참나(眞我) 앞에 서면 거짓나는 없어진다. 이를 무아(無我)라고 한다. 제나가 없어져 무아(無我)가 되면 참나인 얼나(無我)가 드러난다.  - P85

수심(修心)의 명상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제나(自我)가 신기루처럼 홀연히 사라질때가 온다. 그러면 이때까지 여름 장마 때의 구름처럼 내 마음을 덮고 있던 번뇌망상의 잡념이 사라진다. 이것이 이른바 공심(空心)이요 청정심(淸淨心)인 것이다.  - P170

류영모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절대진리(니르바나님)라는 것이 없다. 절대진리는 하늘 위에 있다. 우리는 이 절대를 좇아 올라가는 것이다. 절대(하나)가 아닌 것은 생각하지 말고 땅위의 것은 훌훌 벗어 버리고 오직 하나(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의 님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 사람의 일이다. 절대진리(니르바나님)를 위해서는 내버릴것은 죄다 내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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