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그려낸 세계는 그가 일생을 바쳐 보고 듣고, 이야기를 수집하고, 자료를 모으고, 연구해 써낸 결과물이지, 한 인물의 증언만으로는 복원할 수 없는 세계였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요즘 4·3을 다루는 많은 작품에서 때로 아쉬움을 느끼는 까닭은 바로 그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4·3 이전 제주 사람들이 어떻게 울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며 살았는지, 어떤 일로 생계를 이었고 무엇을 믿고 받들며 살아왔는지, 그런 일상의 깊이 말이다.

강만길 역사학이 지닌 특징을 정리할 때 ‘현재성’은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선생은 역사학이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민족과 사회가 한층 더 인간다운 삶을 이루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다. 현재성을 강조한 강만길 역사학의 대표적인 예는 1970, 80년대 ‘분단시대 역사인식’을 제창하여 분단사학과 냉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를 제공한 것이라 하겠다.

‘강만길 역사학’은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 선생 자신께서 평생 자신의 논지를 끊임없이 고치고 심화해간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역사학은 언뜻 보면 평이해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넓고 깊은 바다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는 학문적 측면에서 보자면 선생이 ‘총체적인 역사’를 추구한 역사학자였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지만 견디는 방법은 있다. 오래 걷고 깊은 잠을 자는 것. 야외에서 동물을 찾아다니면서 오래 걷는 날은 하루 7만보를 걸었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눈길에 미끄러지며 걷다보면 평지를 걷는 것보다 더 피곤했고, 기지에 돌아오면 지쳐서 금세 잠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체력단련실에서 러닝머신을 뛰거나 자전거를 타며 땀을 흘렸고 어떤 사람들은 늦게까지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외로움을 견딘다.

노동력의 세계적 이동과 고령화 현상을 막을 수 없고 저출생 문제는 심각하잖아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우리 고령자 인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이 노동시장의 규율을 어떻게 구성할지 계획을 확실히 세우고 실행하다가 정말 인력이 절대 부족하다는 판단과 사회적 합의가 생길 때 외국인노동자가 들어와야 한다고 봅니다.

죽음이 공동체의 경계와 문턱을 설정하고 그것을 둘러싼 개인적·집단적 주체화의 문제에 개입하는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감벤(G.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비국민’이라는 주체를 탄생시키는 통치성이 죽음의 이름으로 신체화된 형상이라면, 쁘리모 레비(Primo Levi)의 글쓰기는 홀로코스트가 우리의 ‘인간’됨을 재고하게 하는 객관적 사실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아메리(Jean Amery)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특권으로 죽음을 지목했다. 그 자신이 실행하기도 한 이른바 ‘자유죽음’은, 신이 내린 삶이라는 은총을 모독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행위로서의 자살이 아니라 규범적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창조적 행위이다. 그의 죽음론은 주어진 삶의 고통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삶의 논리가 아닌 죽음의 논리로 인간과 그가 속한 사회를 통찰하기 위해 그는 ‘삶’이라는 연속성을 ‘죽음’이라는 불연속성으로 재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므로 1인칭일 수 없다. 특히 사회 내에서 공유되는 객관적 인식 대상으로서의 죽음은 3인칭의 속성을 띠며, 이때 죽음은 지식이나 정보의 형태로 "공동의 관념, 공동의 환상"이 된다.4 죽음이 일종의 담론이 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이미 죽은 자들이 아닌 산 자들의 삶에 작용한다는 점은 죽음이 강한 행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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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사 1 -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 한국경제사 1
이영훈 지음 / 일조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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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들은 지적 공백상태에서 서구의 학문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수입하였다. 지적으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 경험 자체가 빈약하고 단순하였다... 이같은 현실적 제약에 눌려 남한의 역사학자들은 알게 모르게 인간 사회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으로 그린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정립한 한국사상 韓國史像에 공감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4


  이영훈(李榮薰, 1951 ~)의 <한국경제사 1 :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는 저자 자신이 구분한 4개 시대 중 제1시대(기원전 3세기 ~ 기원후 7세기), 제2시대(8~14세기), 제3시대(15~19세기)의 3개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 시기의 변곡점들은 고전 출현, 삼국통일, 조선건국과 일본에 의한 강점(저자에 따르면 일본에 의한 근대문명 이식)이다. 한국경제사지만 이 책의 주된 분석 대상은 조선시대이며, <한국경제사 1>에서의 초점 중 하나는 노비제 국가 조선이다.


 새로운 연구는 14~17세기가 한국사에 있어서 노비제의 전성기임을 명확히 하였다. 그 이전의 삼국, 통일신라, 고려 시대에 노비의 인구 비중은 그리 크지 않으며, 아무래도 10% 미만이었다. 그에 비해 15~17세기의 노비는 전체 인구의 30~40%에 달하였다. 그리고 노비의 일부분은 세계사적으로 노예의 범주에 속하였다. 노비 인구의 팽창은 생산자 대중에 가해진 인격적 예속이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6


 저자는 15세기의 시대 변화에 주목한다. 앞선 시대인 고려시대 이전 사회의 특성이 공동체 중심 사회라면,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로 변화했고 그 과정에서 높은 조세(역)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이들이 노비로 전락하면서 시대적 단절이 야기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5세기는 커다란 전환기였다. 토지가 개인의 재산으로 바뀜에 따라 사회가 신분관계로 분열하였다. 그 이전의 신라~고려 시대는 농민, 수공업자의 생산활동, 국왕/귀족의 수조 收租활동, 사원을 중심으로 한 종교활동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에 기반을 둔 사회였다. 왕도에 집결한 귀족, 관료, 중앙군의 공동체가 지방의 군현공동체를 지배하는 체제였다. 그 공동체사회가 15세기에 이르러 각 사람이 양반, 상민, 노비라는 신분으로 구분되고 대립하는 신분제사회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앞서 강조한 대로 인구의 13~40%가 노비로 떨어졌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47


 그렇다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단절을 가져온 계기는 무엇인가. 저자는 '정호(丁號)'에서 그 차이를 찾는데, 고려시대의 정호 제도가 토지와 인구에 대한 역(役)이 부과되었다면, 조선시대의 역은 오로지 인구에 대한 부과라는 점에서 일종의 퇴행이 일어났다고 파악한다. 


 고려의 정호는 토지와 인구의 구조적 결합이었다. 그에 비해 15세기 초의 호는 토지와 무관한 순수한 인적 구성이었다. 전술한 대로 조선왕조는 양전을 행함에 있어서 토지를 5결의 규격으로 구획하고 거기에 천자문으로 정호 丁號를 달았다. 그 과정에서 8결 또는 17결을 표준적 규모로 했던 고려의 정호가 크게 해체되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48


 1468년, 보법을 시행한 지 4년 만에 세조가 사망하였다. 이후 양반관료들은 세조의 개혁을 하나씩 취소하거나 수정해 갔다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는 양반관료의 이해관계를 각인하는 형태로 변질되어 갔다. 1471년 토지 5결을 1정으로 간주하는 보법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취소되었다. 이로써 토지와 인구의 구조적 결합으로서 정호를 기초로 했던 고려왕조의 백성 지배체제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조선왕조는 개별 호에 대해 호가 보유한 토지와 무관하게 호의 인정 수를 기준으로 군인을 선발하는 순수 인신지배체제로 전환하였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56


 토지와 인구에 대한 역 부과가 아닌 인구에 대한 역 부과가 극심한 신분의 양극화를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토지를 고려하지 않은 역 부과는 대규모 토지, 농장을 소유한 계층에게 상대적으로 세부담을 경감시켜주었던 반면, 토지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과도한 부담을 안겨주게 된다. 특히, 역성(易姓)혁명과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과 같은 정치사건은 세조 이후 지방의 사림(士林)의 세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양민들의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인적 교류는 왕조의 교체기를 맞아 더욱 활발해졌다. 역성혁명과 뒤이은 정치적 격변은 양반관료로서 실세한 많은 사람들을 농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처변 妻邊 등의 다양한 연고를 좇아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은 그 지역의 강세한 지방세력을 피해 주로 속현이나 향/부곡에 정착하였다. 그렇게 그 모습을 드러낸 농촌사회의 새로운 지배세력을 가리켜 보통 품관 品官이라 하였다... 세조 연간에 군대 편성에서 진관체제 鎭管體制가 성립함에 따라 중앙군의 위상이 격하되었다. 한성은 더 이상 고려의 개경과 같은 지배세력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67

 

  저자는 이러한 논의를 조선시대 초기로부터 한국사 전반으로 확장시켜 일본 강점 시대 이전 사회를 전근대적 노예사회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 뉴라이트 사관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다른 실증적 자료에 의한 반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에 대한 반론은 <한국경제사 1>내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 이전 '정호제도'를 토지와 인신에 대한 역부과임을 저자가 밝히고, 이것이 조선시대와 앞선 시대의 다른 점이라고 언급했음에도 한국사회에서 토지지배로 가지 않았다는 설명은 무엇인가. 만약 이것이 온전한 토지에 대한 과세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에도 토지와 건물에 과세되는 재산세와 인구에 대해 과세되는 주민세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렇게 토지지배와 무관한 인신지배는 이전의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요컨대 한국사에서 지배계급의 생산자 대중에 대한 지배체제가 인신지배에서 토지지배로 이행한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생산자 대중이 노예에서 농노로 진화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역사의 진행은 14세기 이후 17세기까지 인격적 예속이 강화되는 역의 추세였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6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조선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논지를 함께 제기한다. 납공노비를 노예로 볼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노예제 생산양식이 과연 지배적 생산양식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저자는 노예제로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점도 함께 제기한다.


 조선시대가 되어 전체 사회구성에 있어서 노예제 범주가 대폭 확장했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노비 가운데는 주인가와 떨어져 자신의 가족과 토지를 보유한 납공노비의 범주가 있었다. 납공노비의 토지는 법적으로 그들의 소유였다. 납공노비는 그들의 토지에 부과된 조세와 공물을 조선왕조에 납부하였다. 그에 관한 한 납공노비는 일반 양인농민과 마찬가지로 공민이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88


 15~17세기 조선시대 노예제 생산양식인 가작 家作농업이 동시대의 지배적 생산양식이었을까. 이 같은 가설을 논박하기는 어렵지 않다.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생산양식은 조선왕조와 전부 佃夫와의 관계였다. 국가가 전국의 토지를 국전 國田으로 지배하고 일반 백성이 그 토지를 차경하면서 조세와 공물을 납부하는 관계야말로 동시대의 가장 규정적인 생산관계를 이루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89


 <한국경제사 1>에서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보다 넓고 깊게 이루어진다. 좌파인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역사철학의 틀을 통해 극우 역사사상인 뉴라이트 역사관이 나오는 상황이 다소 역설적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역사사료에 충실하고자 한 실증분석은 책이 갖는 장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제한적인 데이터에 대한 좁고 한정적인 해석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예를 들어, 세조 시대 이후 향촌에 정착한 양반들의 움직임을 단순하게 반(反)도시화, 근대화에 역행되는 움직임으로만 볼 수 있을까. 조카를 죽이고 숙부가 왕이 된 사건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들 사건은 지방 귀족에 의한 주민 착취의 의미를 결코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한 한계는 다른 자료를 통해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16세기 후반이면 농촌사회에서 이른바 사족 士族으로 불리는 양반신분의 범주가 뚜력하게 대두하였다. 그렇게 양인의 범주로부터 양반신분이 분리되면서 양역을 부담하는 일반 양인을 상민 常民으로 천시하는 신분감각이 발달하였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신분제는 초기의 양천제에서 점차 양반-상민의 반상제 班常制로 바뀌어 갔다 - P359

조선왕조는 소규모 가족경영을 지배체제의 기초로 삼은 농노제 내지 공납제 국가였다.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으로서 양반관료는 대규모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였다. 조선왕조는 양반관료와 대립하면서 결탁하였다. 그 같은 지배연합은 토지에 대해서는 소유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은 몰인격적 지배체제를, 인구에 대해서는 공적 예속의 양인과 사적 예속의 노비를 구분하는 지배체제를 창출하였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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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인천의료원 원장은 ‘재난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코로나19 환자를 보는 동안에는 손실보상금이 나와서 그때는 지방의료원의 재정도 안정적이었다. 시민들 사이에서 존재감도 커졌으니 오랫동안 외면당했던 한국의 공공의료가 성장하겠구나, 기대감을 품었다.
천문학적으로 풀린 정부 예산 대부분이 민간병원으로 가서 우리 의사와 간호사들을 빼가는 데 쓰일 줄은 몰랐다."  - P13

역설적 상황이다. 공공병원에 요구되는 시대적 과제는 점점 무거워지는 데 반해 지방의료원들은 경영난과 의료진 이탈 등 좀처럼 출구를 찾기 어려운 수렁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가뜩이나 취약했던 한국의 공공의료 기반도 나날이 침식되고 있다. - P15

한국 보건의료가 민간병원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는 것, 정말 맞는 얘기다. 농촌, 시골, 지방 소도시에도 다 민간병원이 들어가 있다. 공공병원인 지방의료원은 전국 통틀어 35개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방 소멸이 심화되면서 지역에서 민간의료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게 돼버렸다. 심폐소생을 해서도 더이상 살아나기 힘든 지경이다.  - P18

우선은 현 정부의 국정 철학이 공공의료 확대와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보건의료에 대해서는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고, 기획재정부의 경제 논리에서도 어느 정도 보호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공의료 강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공공의료기금‘ 신설을 제안하고 싶다. - P19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백서에서, 이명박 정부 초기 블랙리스트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인물로 유인촌 문체부 장관 후보자를 지목한다. 총 10권(본책 4권, 부록 6권)에 유 후보자 이름만 총 104회 등장한다. 유후보자는 이명박 정부 초대 문체부 장관이었고, 최장수 장관 기록(3년)을 세우고퇴임했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문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 P22

 김학의 사건 등 검찰의 권한남용에 대한 공수처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게 지금 사실관계가 다 맞다면, 또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면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는데 권력기관에 있는 사람은 처벌을 안 받는다, 그것은 법 앞의 평등원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법의 지배 원리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헌법 질서 상 허용되지 않는다. 공수처의 의의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 P25

뉴스 유통 플랫폼인 포털사이트도 본격적으로 도마 위에 올라왔다. 5월12일국민의힘은 정부가 포털의 기사 배열 기준을 들여다보고 개입할 수 있는 법안을 발의했다. 방통위는 9월25일 네이버 사실 조사‘에 들어갔다. 지난 7월5일부터 실시해온 네이버 뉴스 서비스 실태점검 결과 언론사 제휴와 관련해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사항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방송·신문·인터넷 뉴스 그리고 포털사이트까지, 임기 2년 차 윤석열 정부의 ‘언론 장악 의혹‘ 타임라인이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다. - P31

부동산 PF는 한국경제의 핵심뇌관으로 지목받고 있다. 저금리 환경에서 시작된 부동산 PF가 고금리 환경에서 부실화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한국에서 PF를동원한 부동산 개발사업은 크게 3단계자금이 동원된다. 브리지론(1차 대출)을통해 토지를 구입하고, 인허가 후 본PF(2차 대출)로 대출을 갈아탄 뒤, 분양(판매)을 통해 공사비를 충당한다. 시행사가처음부터 자기자본을 대거 투자하는 방식이 아니다. - P40

서울시 역시 2004년 버스 준공영제도입 이후 2019년까지 총 4조320억원에달하는 운송 적자를 지원금 등으로 충당했다. 김형수 팀장은 민간사업자의 이윤보전을 위해 사용되는 비용을 대중교통의 공공성 확보 차원에서 지자체가 직접투자할 때라고 말한다. - P47

지금처럼 극소수 강경파가 판치는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우선 차기 의장과 공화당 주류 의원들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강경파 의원들의요구로 지난 1월 개정된 하원 규칙, 즉 ‘단 한 명의 의원이라도 해임안을 제출하면 의장은 재신임 투표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부터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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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된 <뮤지엄 산>은 지붕의 기복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입구에서부터의 긴 산책로를 거쳐 뮤지엄 본관에 도착하며, 다시 그 앞에 스톤 가든을 배치한 직선 구조를 이루고 있다. 본관 건물은 세 개의 직육면체가 평행하게 비껴가게 늘어서고 또 하나의 직육면체가 비스듬하게 그것들을 연계하는 배치이며, 그것들의 결절점에 정육면체와 원통(실린더), 이른바 <안도적 입체>가 들어가서 명쾌한 기하학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동선을 이끄는 공간의 연쇄는 복합적이므로 높이가 달라지고 갑자기 개구(開口)가 열리는 등 안도 다다오의 문법이 고스란히 실현되어 있다.... 한국은 석재가 풍부한 만큼, 돌을 사용하는 데는 공을 들였다. 그래서 채용한 아이디어는 안팎의 이중 상자로 이루어진 중첩 상자 구성으로, 바깥쪽은 돌 붙임 벽으로 덮은 상자, 안쪽은 노출 콘크리트로 소재의 차이를 도드라지게 했다. 30만 개의 돌판이 필요했으며, 그것을 설치하는 작업은 장관이었다. _ 미야케 리이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p187


[사진] 뮤지엄 산 안내도


 지난 주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에 다녀왔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뮤지엄 개관 10주년을 맞이한 <안도 타다오-청춘>이란 주제의 대규모 개인전. 건축가의 전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만, 전시회가 열리는 공간 자체가 이미 작품이니 그 안에서 건축가의 의도, 건축의 특징을 느끼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1976년부터 10년 동안의 안도 주택 특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세련된 노출 콘크리트에 의한 디자인. 둘째, 기하학적인 형태. 셋째, 빛에 대한 집착. 넷째, 시선과 동선을 중시. _ 미야케 리이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p85


[사진] 뮤지엄 산 전시관 외부


 콘크리트 소재감이 흡사 스키야의 나무처럼 단정하여 내부 공간의 품위와 밀도를 높이고 있다. 안팎의 뛰어난 공간 배치와 어우러져 당대 비할 데 없는 철근 콘크리트 주택이 되고, 심지어 건축의 변치 않는 본질에 다가가며 어떤 가식도 없다.  _ 미야케 리이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p105


 건축가에게 기하학이란 도형이나 공간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형태 자체를 만들어 가는 원리이다. 계산에 따라 끌어내는 대수 값으로 길이나 크기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형적으로 풀어야 한다. _ 미야케 리이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p130


[사진] 빛의 공간 The space of Light 입구


[사진] 빛의 공간 The space of Light 내부 천장


 실내에 발을 들여놓는다. 벽이 평행하게 여러 개 겹쳐서 투사되는 그림자에 농담이 생긴다. 벽은 빛을 흡수하여 바깥 세계의 소리가 소멸한다. 굳게 침묵을 지키는 실내에서 시간이 정지한다. 스며 나오는 그림자는 신비한 느낌을 휘감은 침묵의 두께로 모습을 바꾼다. 가늘고 긴 슬릿을 통해 흘러 들어와 떨어지는 빛이 투명한 층으로 순화되어, 방 전체를 밝히지 않고 벽에 흡수되어 간다. _ 미야케 리이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p148


 내외부가 연결된 콘크리트 구조와 기하학적인 구도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어둠의 대비. 물과 바람의 길처럼 건물을 크게 가로지르는 구도. 그 여백을 통해 안도 다다오의 공간(空間)을 읽는다. 그렇다면, 시간(時間)은 어디에 있을까?


 정육면체 등의 근원적인 도형이 그대로 유지되면 기하학의 절대성은 흔들리지 않는데, 안도는 지오메트리와 풍토성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는다. 르코르뷔지에 같은 플라톤주의 계승자들과의 차이가 거기서 드러난다. 대지를 읽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대지의 배후에 있는 지형, 문화, 기맥(氣脈) 같은 것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_ 미야케 리이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p137


  뮤지엄 내부에서 우리는 시간을 발견하지 못한다. 건물 바깥에 심어진 가을꽃들이 자태를 뽐내지만, 건축의 수명에 비길바는 아니다. 뮤지엄 산에서 안도 다다오의 시간을 찾기 위해서는 좀 더 멀리서 지켜봐야 한다. 뮤지엄 산을 둘러싼 수십 억년의 역사가 담긴 대지(大地)와 산. 거기에서 자라난 수십 년 수령의 나무들. 이들이 바로 공간을 둘러싼 시간이 아닐까.


 식물은 성장한다. 특히 수목은 수명이 몇십 년, 때에 따라서는 1백 년이라는 규모이며, 사찰 경내에 있는 나무는 몇백 년에서 1천 년 단위이다. 안도의 내면에 있는 시간의 계측 단위에는 두 가지 표준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건축으로, 몇 년이 걸려서 준공하고 그 후에는 수십 년 단위로 유지, 보수하면서 지속된다. 다른 하나는 수목 또는 식생으로, 이것의 수명은 최소 50년에서 1백 년이며 앞으로도 긴 세월 동안 생명을 유지한다. 안도의 신체에는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 수명이 함께 갖춰져 있어서 건축과 수목, 양쪽을 오가면서 생명을 불어넣는다. _ 미야케 리이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p76


 때마침 단풍의 계절이었다. 산등성이에 펼쳐진 이 땅을 본 안도는, 거기서 다른 데서는 맛볼 수 없는 '생명의 힘'을 느꼈다고 한다. 이 흙에서 솟구쳐 오르는 힘은 미래의 아이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자손 대대로 이어져 갈 땅이라고. 이 절묘한 대지를 보고 안도는 그 자리에서 설계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스케치도 그린다. _ 미야케 리이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p499


[사진] 뮤지엄 산 외경


 젊은 시절 프로권투선수였던 안도는 두가지 싸움을 펼친다. 자연을 대상화하고 그것을 인간의 세계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서구적 가치관과의 싸움 그리고 주어진 환경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자 하는 싸움. 모든 예술가가 마찬가지겠지만, 안도 다다오에게도 작품은 치열한 싸움의 결과물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주거야말로 거점이며 전투의 요새이다. 안도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어디까지나 개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산다', '생활한다'는 것에 대해 자아가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질 정도까지 드러내는 원시 욕구를 사고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주거는 그것들을 폭 감싸서 덮어 버린다"... 자신의 주거를 만들어 그 안에 기존 마을 풍경 속에서 키워 온 생활을 외부 자본에 맡기지 않고 관철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이다. _ 미야케 리이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p48


 건축은 싸움입니다. 거기에는 긴장감을 지속시킬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모든 것이 걸려 있습니다. 긴장을 지속하고 사물을 끝까지 파고들어 그 원리까지 되돌아가서 재조합하는 구상력이야말로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기존의 조합을 깨부수는 강력함을 가진 건축을 낳는 것입니다. _ 미야케 리이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p58


 

 <뮤지엄 산>에서 안도 다다오의 도록 <TADAO ANDO : YOUTH>를 구입했다. 이 도록은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에서 설명된 주요 작품에 대한 생생한 컬러 사진을 제공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더해준다. <안도 다다오-안도 다다오가 말하는 집의 의미와 설계>는 건축의 도면에 대한 정리가 잘 되어 이들을 통해 안도 다다오의 건축을 바라본다면, 보다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물의 교회>에서는 무덤 앞에 세우는 표시처럼 우리를 마주 보는 네 개의 십자가를 빠져나와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게 되며, 거기서 다시 물의 정원에 우뚝 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 반대로 <빛의 교회>에서는 성당 정면에 벽을 찢고 빛이 된 십자가가 출현한다. 전자가 행진에 의한 죽음과 재생의 의식이라면, 후자는 현현(顯現) 그 자체이다. _ 미야케 리이치,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p187


[사진] 물의 교회


[사진] 빛의 교회


 서로 다른 두 개의 교회를 연결시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재림의 의미를 해석한 글 안에서 스토아학파적인 안도 다다오의 면모를 깨닫게 된다. 이 참에 임석재의 서양 건축사도 정리해봐야겠다...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1970년대 이후의 현대는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1970년대 이후의 건축과 도시계획에 있어 포스트모더니즘은 개별 건축물부터 도시에 이르기까지 통일감 있는 디자인으로 구성하겠다는 야망을 단념하고 유동하는 하나의 무리가 된 세계 속에서 로컬한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스승인 단게 겐조(1913~2005)의 모더니즘으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전향한 이소자키 아라타(1931~2022)를 에피쿠로스학파에 비교한다면, 단게-이소자키와 같은 국가적 엘리트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맨주먹으로 출발한 안도 타다오(1941~ )는 스토아 학파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처럼, 형성된 질서는 반드시 해체되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게 되므로 그 운명에 화내고 슬퍼해봤자 소용이 없으니, 오히려 사태를 냉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더 나아가 운명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일까? _ 아사다 아키라,<안도 타다오, YOUTH> <안도 타다오의 스토아학파적 건축>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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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0-16 0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 님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뮤지엄 산에 다녀오셨군요 그런 곳이 있다는 말 들어본 적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느새 십년이 되다니... 안도 다다오 이름만 알고 잘 모르기도 하네요 안도 다다오 건축을 보고 서양건축사를 정리하시려 하다니 멋지시네요 저는 그런 거 보면 그걸로 끝일 텐데... 하나에서 다른 걸로 이어지는 공부를 하면 좋을 듯하네요


희선

겨울호랑이 2023-10-16 07:42   좋아요 2 | URL
저도 뮤지엄 산 근처에 자주 가면서도 제대로 감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사실 이번에도 거의 지나칠 뻔 했는데 다행히 기회가 잘 맞았고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많은 기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가 놓쳐버린 것이 얼마나 많을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기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계획에는 어긋나지만, 우리 삶을 재밌게 해주는 일탈이 아닌가 싶습니다. 희선님, 감사합니다! ^^:)

yamoo 2023-10-16 09: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기 어디 인가요? 저도 시간되면 가볼까 합니다만..^^;;

겨울호랑이 2023-10-16 10:13   좋아요 2 | URL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안쪽에 있는 <뮤지엄 산>입니다. <안도 다다오 - 청춘>은 10월 29일까지 예정되어 있어 시간이 조금 촉박하네요... 조금 멀지만 좋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yamoo님 좋은 하루 되세요! ^^:)

2023-10-16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16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23-10-20 1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아 <뮤지엄 산>이로군요!!! 저는 2017년에 다녀오고 다시 못 가서 아쉽습니다. 너무 예쁘고 신기한 곳이었죠. 그 때는 백남준 전시 보고 제임스 터렐관 갔었어요.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건축가들도 천재인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23-10-16 17:47   좋아요 2 | URL
지금도 백남준 전시와 제임흐 터렐관에서 전시 중이라 안도 다다오 전 이외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 도한 산 속에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재생과 부활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다른 분들에게도 멋진 공간으로 기억되는 것 같아 반갑습니다 ^^:)
 

《정의론의 핵심은 우리가 타고난 천부적 재능과 사회적 지위 모두가 도덕적 정당 근거가 없는 우연적인 것인 까닭에 그것들을 공동의 자산으로 간주하고 중립화하는 데서 정의에 대한 생각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 P43

그런데 형식적 기회 균등도 아니고, 실질적 기회 균등도 넘어서서 공정한 기회 균등까지 보장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여기에서 롤스는 우선 절차적 정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되 그 문제점을 ‘최소 수혜자 최우선 배려의 원칙‘을 통해 보완하는 전략으로 자신이 구상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한다. - P43

롤스는 ‘무지의 베일 the veil of ignorance‘을 통해 각자의 운명을 모르는 상태에서 가장 불운한 계층의 일원이 될 각오 아래 선택한 것이 바로 정의의 원칙으로서 정당화된다고 보았다.  - P48

이런 점에서 롤스의 정의론은 절차주의적 측면과 결과주의적 측면의 상호 보완을 통해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즉 기회 균등을 중심으로 수행되는 절차주의적 과정의 부족한 측면을 공정 분배라는 결과주의적 조정으로 보완함으로써 롤스의 정의론이 완성되는 것이다. - P60

"모든 사회적 가치들-자유, 기회, 소득, 재산 및 자존감의기반은 이들 가치의 전부 또는 일부의 불평등한 분배가모든 사람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되어야한다."(《정의론》, 107쪽)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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