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공식적으로 종전에 합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국 문재인 대통령은 오랫동안 종전을 주장해왔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중국이 종선에 합의한다면 보다 원만한 관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것이다. 또 최근 몇 년 동안 회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서먹해진 북미 관계를 개선하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 한반도에 영원한 해빙기가 찾아오면 북한도 결국 핵 프로그램을 재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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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코리아 2022 -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의 2022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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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분식집에 여느때처럼 주문 후 찾아가겠다는 전화를 했다. 재료가 다 떨어져 미안하다는 답을 들었다. 원하는 메뉴를 먹지 못한다는 아쉬움보다 장사가 잘 되는듯하여 안도감이 더 크게 든다. 이런 마음을 작은 공감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소상공인의 어려움을 눈에 띄게 늘어가는 폐업가게를 보며 알아가는 요즘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변화는 피할 수 없겠지만, 위기속에서 우리 역시 달라진다면 미래도 조금은 밝아지지 않을까...

코로나19 이후 어려움을 딛고 빠르게 회복한 업종도 있지만, 여전히 고통의 시간을 힘겹게 버텨내는 업종도 많다. 디지털  플랫폼  기업이나  온라인이  주무대인 기업에는 상당한 기회가 찾아왔지만, 대부분의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은 여전히 사회적 거리두기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다. 단순한 현금 지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소상공인 및 자영업자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등과 같은 전략적 고민을 함께 해야 한다. 경제 · 사회 환경 측면에서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다시금 생각하도록 경종을 울린 핵심 키워드는 결국 ‘타인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이다. 우리에겐 지금 공동체적 공감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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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12-22 23: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먹고 싶은 것 못 먹어도 안도하는 그 마음, 따뜻하네요^^ 좋아하는 곳은 잘 안 되는 것 같으면 걱정되더라구요. 문 닫을까봐…

겨울호랑이 2021-12-22 23:18   좋아요 3 | URL
네, 골목상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깊이 체감하는 요즘입니다.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한다면 생활을 걱정하지 않는 세상이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였으면 합니다... 독서괭님 감사합니다 ^^:)
 

군주의 본래 모습은 마땅히 업무를 위임하고 성공할 것을 책임지우는 것이며, 위임한 자가 마땅하다면 쓰인 자도 자연히 면밀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무릇 천하가 크고 사대부도 많지만, 이를 몇 사람의 손에 맡기고 도필(刀筆)을 채용하여 재주를 헤아리고 부서(簿書, 장부)를 조사하여 덕행을 살피므로, 설사 공평하기가 저울과 같고 밝기가 물과 거울과 같다고 해도 오히려 능력에는 끝이 있고 비추어 보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데, 하물며 위임된 사람이 그에 적합하지 않다면 어리석고 어둡고 아부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폐단이 생길 것입니다.

"재상은 폐하의 배와 심장이고, 자사와 현령은 폐하의 손과 발입니다. 배·심장·손·발을 가지지 못하고서 자기 홀로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천하에는 위험한 기틀이 있는데, 화(禍)와 복덕은 그것으로 인하여 생깁니다. 기틀이 조용하면 복덕이 생기고, 기틀이 움직이면 화(禍)가 발생하는데, 백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릇 큰 옥사(獄事)가 한 번 일어나면 남발되지 못하게 할 수 없고, 억울한 사람들이 탄식하면 화합의 기운을 상하게 하여 곳곳에 유행병을 발생시키고 홍수와 가뭄이 그것을 뒤따라와서 사람들이 생업을 잃게 되니, 화란(禍亂)을 일으키려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도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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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신라왕 김법민(金法敏, 30대 문무왕)은 이미 고려의 배반한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고 사람을 시켜서 이를 지키게 하였다. 황상은 크게 화가 나서 조서를 내려서 김법민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그의 동생인 우교위원외(右驍衛員外)대장군·임해군공(臨海郡公)인 김인문(金仁問)이 경사에 있었는데, 세워서 신라왕으로 삼고, 귀국하게 하였다.

무릇 사람이 명성을 사모하는 것은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고,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하게 됩니다. 폐하께서 만약에 인재를 뽑는데 덕행을 먼저로 삼고, 문예를 끝으로 삼으신다면 많은 인재들이 우렛소리처럼 달려들어서 사방에 바람이 일 것입니다.

애초에, 유인궤(劉仁軌)가 군사를 이끌고 웅진(熊津)에서 돌아오자 부여융(扶餘隆)은 신라의 압박을 두려워하여 감히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얼마 후에 역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2월 정사일(24일)에 공부상서 고장(高藏,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주(遼東州)도독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하여 요동으로 돌아가게 하여 고려의 남은 무리들을 안무(安撫)하게 하였다. 고려의 먼저 여러 주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보내어서 고장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또 사농경 부여융을 웅진(熊津)도독으로 삼고, 대방왕(帶方王)에 책봉하여 또한 돌아가서 백제(百濟)의 남은 무리들을 안무하게 하며 이어서 안동(安東)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서 그들을 통괄하게 하였다.

이때에 백제는 황폐화 되고 부서져서 부여융에게 명령하여 고려의 경계에 우거(寓居)하도록 하였다. 고장이 요동에 이르자 반란을 하기로 모의하고 몰래 말갈(靺鞨) 사람들과 내통하였는데, 불러서 돌아오게 하여 공주(?州, 사천성 공래현)로 옮겼더니 죽었으며,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 황하 이남)과 농우(?右, 농산의 서쪽)에 있는 여러 주에 흩어서 옮기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안동성의 옆에 머물게 하였다.

고려의 옛날 성은 신라에 병합되고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서 말갈과 돌굴(突厥)로 들어갔고, 부여융 역시 끝내 감히 옛날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고씨(高氏)와 부여씨는 드디어 망하였다.

옛사람의 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늘 지니는 습속이 없지만, 정치에는 잘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한 것이 있고, 군사에는 강약의 구분이 없지만 장수는 교묘한 사람과 바보 같은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장수를 고르는 것은 지략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용기와 힘을 맨 끝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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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무오일(8일)에 웅진도(熊津道)행군총관·우위위(右衛威)장군인 손인사(孫仁師) 등이 백제의 남은 무리와 왜병(倭兵)을 백강(白江)에서 깨뜨리고 그들의 주류성(周留城, 백제의 임시 도읍지)을 뽑았다.

흑치상지는 두려워서 주위에 있던 10여 명과 더불어 숨어서 본부로 돌아가서 도망하여 흩어진 사람들을 거두어 모아서 임존성(任存城)을 지키면서 목책을 묶어서 스스로 견고하게 하였는데,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귀부한 사람이 3만여 명이 되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였고 흑치상지는 막으며 싸웠는데 당의 군사들이 이기지 못하였다. 흑치상지가 다시 200여 개의 성을 빼앗자 소정방은 이길 수가 없어서 돌아왔다.

폐하께서는 그들을 해외에 남겨두어 고려와 백제를 없애려고 하지만 고려의 옛날 사람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 돕고 왜인(倭人)은 비록 멀리 있지만 역시 함께 영향을 주고 있는데, 만약에 진수하는 병사를 없애면 다시 한 개의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고려의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죽었고 맏아들인 연남생(淵男生)이 대신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처음 국정을 처리하게 되자 나가서 여러 성을 순시하면서 그의 동생인 연남건(淵男建)과 연남산(淵男産)으로 하여금 남아서 후사(後事)를 처리하게 하였다.

"수 양제가 동쪽 정벌을 떠나서 이기지 못하였던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고 원망하였던 연고입니다. 먼저 돌아가신 황제께서 동쪽 정벌을 가셨다가 이기지 못한 것은 고려에 아직은 틈새가 생기지 않았었습니다.
지금 고장(高藏)은 미약(微弱)하고 권력을 가진 신하들이 명령을 멋대로 부리며 연개소문이 죽자 연남건의 형제들이 안에서 서로 공격하고 빼앗으며, 연남생이 마음을 기울여서 속으로 귀부하여 우리를 위하여 길을 인도하니, 저들의 사정과 속임수는 이를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고려의 백성들 가운데 이반(離叛)하는 사람이 많아서 칙령을 내려서 고려의 호구 3만8천200을 장강과 회수의 남쪽과 산남(山南)과 경서(京西)에 있는 여러 주(州)의 텅 빈 땅으로 옮기도록 하고 그들 가운데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남겨서 안동(安東)을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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