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에 신라왕 김법민(金法敏, 30대 문무왕)은 이미 고려의 배반한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고 사람을 시켜서 이를 지키게 하였다. 황상은 크게 화가 나서 조서를 내려서 김법민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그의 동생인 우교위원외(右驍衛員外)대장군·임해군공(臨海郡公)인 김인문(金仁問)이 경사에 있었는데, 세워서 신라왕으로 삼고, 귀국하게 하였다.

무릇 사람이 명성을 사모하는 것은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고,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하게 됩니다. 폐하께서 만약에 인재를 뽑는데 덕행을 먼저로 삼고, 문예를 끝으로 삼으신다면 많은 인재들이 우렛소리처럼 달려들어서 사방에 바람이 일 것입니다.

애초에, 유인궤(劉仁軌)가 군사를 이끌고 웅진(熊津)에서 돌아오자 부여융(扶餘隆)은 신라의 압박을 두려워하여 감히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얼마 후에 역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2월 정사일(24일)에 공부상서 고장(高藏,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주(遼東州)도독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하여 요동으로 돌아가게 하여 고려의 남은 무리들을 안무(安撫)하게 하였다. 고려의 먼저 여러 주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보내어서 고장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또 사농경 부여융을 웅진(熊津)도독으로 삼고, 대방왕(帶方王)에 책봉하여 또한 돌아가서 백제(百濟)의 남은 무리들을 안무하게 하며 이어서 안동(安東)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서 그들을 통괄하게 하였다.

이때에 백제는 황폐화 되고 부서져서 부여융에게 명령하여 고려의 경계에 우거(寓居)하도록 하였다. 고장이 요동에 이르자 반란을 하기로 모의하고 몰래 말갈(靺鞨) 사람들과 내통하였는데, 불러서 돌아오게 하여 공주(?州, 사천성 공래현)로 옮겼더니 죽었으며,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 황하 이남)과 농우(?右, 농산의 서쪽)에 있는 여러 주에 흩어서 옮기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안동성의 옆에 머물게 하였다.

고려의 옛날 성은 신라에 병합되고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서 말갈과 돌굴(突厥)로 들어갔고, 부여융 역시 끝내 감히 옛날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고씨(高氏)와 부여씨는 드디어 망하였다.

옛사람의 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늘 지니는 습속이 없지만, 정치에는 잘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한 것이 있고, 군사에는 강약의 구분이 없지만 장수는 교묘한 사람과 바보 같은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장수를 고르는 것은 지략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용기와 힘을 맨 끝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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