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무오일(8일)에 웅진도(熊津道)행군총관·우위위(右衛威)장군인 손인사(孫仁師) 등이 백제의 남은 무리와 왜병(倭兵)을 백강(白江)에서 깨뜨리고 그들의 주류성(周留城, 백제의 임시 도읍지)을 뽑았다.

흑치상지는 두려워서 주위에 있던 10여 명과 더불어 숨어서 본부로 돌아가서 도망하여 흩어진 사람들을 거두어 모아서 임존성(任存城)을 지키면서 목책을 묶어서 스스로 견고하게 하였는데,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귀부한 사람이 3만여 명이 되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였고 흑치상지는 막으며 싸웠는데 당의 군사들이 이기지 못하였다. 흑치상지가 다시 200여 개의 성을 빼앗자 소정방은 이길 수가 없어서 돌아왔다.

폐하께서는 그들을 해외에 남겨두어 고려와 백제를 없애려고 하지만 고려의 옛날 사람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 돕고 왜인(倭人)은 비록 멀리 있지만 역시 함께 영향을 주고 있는데, 만약에 진수하는 병사를 없애면 다시 한 개의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고려의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죽었고 맏아들인 연남생(淵男生)이 대신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처음 국정을 처리하게 되자 나가서 여러 성을 순시하면서 그의 동생인 연남건(淵男建)과 연남산(淵男産)으로 하여금 남아서 후사(後事)를 처리하게 하였다.

"수 양제가 동쪽 정벌을 떠나서 이기지 못하였던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고 원망하였던 연고입니다. 먼저 돌아가신 황제께서 동쪽 정벌을 가셨다가 이기지 못한 것은 고려에 아직은 틈새가 생기지 않았었습니다.
지금 고장(高藏)은 미약(微弱)하고 권력을 가진 신하들이 명령을 멋대로 부리며 연개소문이 죽자 연남건의 형제들이 안에서 서로 공격하고 빼앗으며, 연남생이 마음을 기울여서 속으로 귀부하여 우리를 위하여 길을 인도하니, 저들의 사정과 속임수는 이를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고려의 백성들 가운데 이반(離叛)하는 사람이 많아서 칙령을 내려서 고려의 호구 3만8천200을 장강과 회수의 남쪽과 산남(山南)과 경서(京西)에 있는 여러 주(州)의 텅 빈 땅으로 옮기도록 하고 그들 가운데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남겨서 안동(安東)을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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