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저는 이게 파당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다음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한다거나 제1당이 되는 사태가 없어야지 그때부터 비로소 합리적인 보수집단이 "아, 이거 수구세력 따라다니다가 우리 망하는구나, 지금이라도 우리가 주도하는 보수진영을 만들고 거기에 합리적으로 재구성된 진보(잡지 게재본에 ‘재구성된 보수’로 나오지만 오식이며 ‘재구성된 진보’라야 맞음)와 힘을 합쳐서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가야겠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전도가 밝아질 것같습니다.

만약 2013년 이후로도 경기침체가 지속되거나 심화된다면 한국경제는 이명박시대와는 비할 바 없이 어려워질 것이다. 거기에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라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제약요인이 더해지고 ‘후꾸시마 이후’의 원전문제?당장의 안전성 확보와 중기적인 원전 축소 및 궁극적인 철폐 문제?마저 겹칠 때, 다음 정부의 곤경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 가운데도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집권세력의 책무다. 비록 성장에 대한 요구가 자본주의로 잘못 길들여진 대중의 비뚤어진 욕망 탓이라 해도 그러한 욕망의 존재 자체가 엄연한 정치현실인데다, 2013년체제가 기약하는 복지의 확대나 한반도평화체제 수립 등 제반사업을 위해서도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게 마련이다. 게다가 현존 세계체제가 존속하는 한 일정한 성장을 못하면 비참하게 몰락하기 십상인 자본주의사회의 논리를 피해가기 어렵고, 세계체제 변혁의 동력을 마련할 길도 없어지기 쉽다. 그런데도 진보와 변혁을
이야기하는 학자나 정치인일수록 성장담론이 약하지 않은가 한다

나 자신은 87년체제를 낳은 6월민주항쟁이 "남한의 역사에서 아무리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해도 분단 한반도의 절반에 국한된 만큼은 그 ‘획기적’ 성격 또한 제한되게 마련"임을 일찍부터 강조해왔는데, 달리 표현하면 87년체제가 군사정권과 개발독재의 ‘61년체제’를 대체했지만 양자가 공유하는 토대인 ‘1953년체제’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는 말이 된다.

복지의제도 평화, 정의, 생태, 성평등, 민주주의 같은 여타 의제와의 지혜로운 결합이 관건이다. 그 점에서 6·2지방선거에서 크게 부각되어 한때 또 하나의 근본주의로 치달을 위험마저 보이던 복지담론이 점차 세련을 더해가는 현상이 다행스러운데, 먼젓번 글에서 ‘복지국가 모델에 포함되어야 할 것들’을 말한 의도 역시 그런 세련화에 이바지하려는 것이었다. 포함되어야 할 것의 하나로 ‘공정·공평’을 제시했는데, 동시에 그것은 상식이라든가, 교양, 염치지심, 정직과 신뢰처럼 정책의 차원보다 ‘더 기본적인 것들’의 차원으로
설정한 것이기도 했다.

‘민주·평화·복지사회’가 약칭으로 채택되든 않든 2013년체제의 내용이 그 세가지 의제로 국한될 수는 없다. 물질적 불평등의 폐기와 생태친화적 사회로의 전환, 성차별 극복 같은 세계체제 공통의 장기적 과제가 어떤 식으로든 반영된 중·단기적 정책기획이 포함되어야 한다.

반면에 정부와 여당에 대한 국민적 분노에도 불구하고 야권이 분열하여 총선승리를 놓친다면, 국민들의 분노·불신·경멸은 고스란히 야당들로 옮겨갈 터이며, 차라리 박근혜 후보를 택하는 게 안전하다는 심리가 확산될 것이다.

앞서 ‘보수 대 진보’의 낡은 구도를 넘어서는 첫걸음은 현재 남한의 지배세력이 보수라기보다 수구 또는 수구세력 주도의 수구·보수동맹임을 인식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오늘의 한국에서 흔히 ‘보수’로 일컬어지는 세력은 실제로 대부분이 수구이고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그보다 훨씬 소수다. 여기에 중도보수와 좀더 적극적인 반대세력에 해당하는 중도개혁파, 진보파 등이 포진한 것이 한국정치의 독특한 지형인 것이다.

그만큼 수구세력의 헤게모니를 깨기가 힘든 지형인 것이며, 따라서 이런 현실에서 수구에 가담하는 보수주의자의 수효를 최소화하면서 중도 및 진보 세력을 총집결하는 일이 단일정당(적어도 연합형 통합정당이 아닌 단일정당)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연합정치의 전략적 의의가 바로 거기서 나온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반도의 통일은 앞으로도 오랜 기간 진행될 장기적 과정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남북연합이라는 1단계와 어쩌면 또다른 중간단계를 거쳐서 진행되기 십상인 과정이다. 오늘의 국지적 현장에서의 실감으로 전체 과정의 성격을 재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북의 정상들 스스로 2000년에 이미 그 상식을 공유하고 한반도는 국가연합(내지 ‘낮은 단계의 연방’)이라는 중간과정을 거쳐서
통일로 간다는 점에 합의했다. 그리고 이렇게 합의한 순간, 당국자들의 의도가 무엇이건 민간사회가 베트남, 예멘 또는 독일에서와는 다른 수준으로 개입할 공간이 열린 것이다.

한반도문제가 비핵화라는 당면과제에 집중됨으로써 남북연합을 위한 시민운동의 현실주의적 타당성이 오히려 더 확실해진다. 북이 완전한 비핵화에 동의하려면 이른바 체제보장에 대한 북측의 요구가 어느정도 충족되어야 할 터인데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수교 그리고 대규모 경제원조가 더해지더라도 남한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앞에서 지적했다

이렇게까지 검찰이 커지고 막강해진 건 이 정권 아래서지만 그 체질은 사실 87년 이전부터 죽 계속되어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검찰, 경찰, 국정원 등 공안기구가 대표적이고요.3) 전·현직 고위장성들도 대부분 그 체질을 그대로 유지해왔습니다. 물론 김영삼정권에서 하나회 같은 정치군인들의 써클을 해체한 것은 군개혁의 중요한 업적이었고 그 덕에 87년체제의 민주화가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로까지 진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군부는 그대로고, 특히 천안함사건 이후 조사과정에서 국방부가 모든 정보를 독점하면서 멋대로 말을 바꾸고 자기들이 부실한 부분이 있었음에도 거기에 대해 뭐라고 하면 고발하고 탄압하는 것을 볼 때,
남쪽에서 이북처럼 ‘선군정치’까지 안 갔는지 몰라도 국방당국의 수구적인 행태가 여전하다는 것을 실감했지요.

또 흔히 조·중·동이라고 말합니다만 거대언론들도 딱히 역주행이랄 것 없이 수구적 행태를 지속해왔습니다.

87년체제가 우리 국민들의 민주항쟁의 결과로 탄생했고 많은 좋은 일을 해냈고 창조적인 동력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크게 볼 때 1953년체제라고도 할 분단체제를 허물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전의 독재정권과 마찬가지로 53년체제라는 토대 위에 건설됐기 때문에 민주화나 민주주의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다보니 반민주적 수구세력이 계속 위세를 떨쳐왔고 국가나 사회의 유리한 고지들을 오늘날까지도 점령하고 있다고 앞서 말씀드렸는데, 이걸 좀 다른 각도에서 부연해보면 우리 헌법이 처한 변칙적 상황자체가 반민주세력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다는 시각이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의 헌법은 민주공화국 헌법이지만 분단 때문에 이 헌법이 제대로 실행되기 어렵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민중의 자치라고 봅니다. 민중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게 민주주의지, 남의 다스림을 받는데 그 절차를 만들어서 거기에 따라 진행한다고 참된 의미의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이 어느정도 잘먹고 잘사는 것도 민주주의의 본질은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은 이런 원론적인 문제점이 ‘1퍼센트 대 99퍼센트’로 상징되는?이건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이후로 널리 알려진 구호인데?그런 극단적인 양극화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속성과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양극화사회에서는 아무리 민주주의적 절차가 잘 규정되었다고 해도 민중자치와는 점점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87년체제를 극복하고자 할 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되었지만 그것은 분단 한반도의 남쪽에 국한된 사건이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그 때문에 발생한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에 가해지는 여러 제약을 시원하게 털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87년체제를 통해 남한의 군사독재를 허물면서도 그 토대를 이루는 ‘1953년체제’ 즉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고 나서 통일도 안되고 평화도 이룩하지 못한 채 휴전상태로 60년 가까이 지나면서 성립된 분단체제를 좀더 안정된 평화체제로 대체하지
못했다. 53년체제의 토대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87년체제의 민주화나 남북화해 노력에 커다란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2)

북핵문제는 핵문제에만 매달려서는 결코 풀 수 없는 전체 한반도 문제의 급소에 해당한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풀기 어려워진 것이다. 비핵화 협상은 그것대로 진행하고, 평화협정 체결도 그것대로 추진하고, 한반도 평화만이 아니라 동북아 평화 구축작업에도 다시 시동을 걸고, 경제적 지원도 하고, 북미·북일관계를 개선하는 교섭도 진전시키는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의제들을 정교하게 조율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명박정부가 한가지 확실히 가르쳐준 것이 있다. 미국이 아무리 초강대국이고 중국이 아무리 새로 떠오르는 강국이라 해도 한반도문제에서는 한국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이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이명박정부가 역설적이지만 잘 보여주었다.

‘한반도식 통일’의 특성 중 하나는 단계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그냥 점진적인 것만이 아니고 중간단계를 거친다는 것이다. 한반도가 아직도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점도 특이하지만, 통일을 하되 중간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룩하기로 쌍방의 정상이 합의했다는 사실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한반도식 통일’의 또 한가지 특징은 ‘시민참여형’이라는 점이다. 이는 남북관계에 대한 시민들의 관여가 양적으로 얼마나 많으냐는 문제가 아니라, 통일과정의 단계적 진행에 합의한 순간부터 그 과정을 정부당국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다는 질적인 차이를 뜻한다. 무력통일이든 평화적 통일이든 ‘원샷’으로 통일할 경우에는 민간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천천히 하고 느슨한 결합을 거쳐서 통일로 간다고 하면, 민간사회가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그 과정에 끼어들 여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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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를 규정하는 핵심요소는 그것이 끝없는 자본 축적의 추진력에 의거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문화적 가치가 아니라  일종의  구조적 필요조건이다. 이 말은, 그 논리에  따라서  움직이는 이들에게는 중기적 차원에서  보상을 해주지만 그것과는 다른 논리들에 따라서 움직이기를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물질적으로)징벌을 가하는 메커니즘들이 체제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체제가 유지되려면 몇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기축적 노동 분업이 존재해야 한다. 즉 이윤은 낮은데 경쟁은 매우 치열한(즉 주변부의 필수품들과 이윤이 높고 준독점화된 (즉 중심부의) 상품들 간의지속적인 교환 같은 것이다. 기업가들로 하여금 그 체제 내에서 성공적으로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효력(힘)의 정도가 서로 다른 의사주권 국가들로 구성된 국가간체제가 추가적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준독점적 이윤 창출 기업들의 항구적인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주기적 메커니즘들이 또한필요하다. 그 결과로 그 체제의 특권적 중심들의 매우 느리지만 끊임없는 지리적 재배치가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이  근대세계체제에서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서로에게 외부인 두 지역들의 "평등" 교환과 자본주의 세계정제 내에서의 "불평등" 교환이 결정적인 이론적 차이를 만든다는 느낌을 지을수 없다. 바로 그와 같은 작동 양식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고도의 양극화체제이다. 그것이 이 체제의 가장 부정적인 특징이며, 장기적으로는 이 체제의 치명적 결함들 중의 하나이다.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장기의 16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종류의 체제들과도 매우 다르다. 이 기본적인 현실을 놓치는 것은 분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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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강연효에게 양에서 벌어진 일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양조(梁朝)의 땅은 좁지도 않고 군사의 수도 적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의 행하는 일을 추적해 보면 끝내 반드시 패배하여 망하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냐고요? 주군은 이미 어둡고 나약하여서 조암과 장한걸의 형제들이 권력을 멋대로 하며 안으로는 궁액(宮掖)
과 교분을 맺고 밖으로는 재화와 뇌물을 받아들이면서 관직의 높고 낮음은 오직 뇌물이 많고 적음을 보며 재주와 덕망으로 선택하지 않고 공훈과 노고도 비교해보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머리를 감지도 빗질도 못하고 갑옷을 벗지 못한 지도 15년이 넘었는데, 그 뜻은 집안과 나라의 원수와 수치를 씻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미 존호(尊號)를 바르게 하여 하북(河北)에 있는 사인과 백성들은 매일 태평하게 되기를 바라보는데, 비로소 운주(?州, 산동성 동평현)에 있는 한 자와 한 치 정도의 땅이라도 얻었다가 지킬 수 없어 그곳을 버린다면 어찌 중원을 모조리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장사들이 해체되고 장래에 식량이 다 떨어져서 무리들이 흩어질까 두려운데, 비록 하(河, 황하)를 그어서 경계로 삼는다 한들 누가 폐하를 위하여 그곳을 지키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강연효(康延孝)에게 하남(河南, 황하 이남)의 일을 자세히 물었으며, 자기를 헤아리고 저들을 헤아려서 낮이고 밤이고 그것을 생각해보니 성공과 패배의 기틀은 올해에 결정됩니다.

왕언장이 말하였다.
"나는 본래 필부(匹夫)로서 양의 은혜를 입어 지위가 상장(上將)에까지 이르렀으며, 황제와 더불어 15년 동안이나 교전(交戰)하였는데, 지금 군대는 패배하고 힘은 다하여서 죽는 것이 나 스스로의 몫인데 설령 황제가 불쌍히 여겨서 나를 살린들 내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사람들을 볼 수 있겠는가? 어찌 아침에는 양의 신하가 되었다가 해질녘에는 당의 신하가 되는 일이 있겠소? 이는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이오."

이사원이 말하였다.
"병법에는 신속한 것을 귀히 여깁니다. 지금 왕언장이 사로잡혔는데, 단응이 반드시 아직 이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바로 어떤 사람을 도주하게 하여 보고하게 한다고 해도 의심하던지 믿던지 간에 오히려 사흘이 필요합니다.

양주는 사람됨이 온순하고 공손하며 절약하여 주색에 빠지는 실수가 없었는데, 다만 조엄과 장한걸을 총애하고 신뢰하여 위엄과 복(福)을 멋대로 하게하고 경상과 이진의 옛 신하를 소외시키고 버려서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황상이 그를 심히 후하게 대우하면서 조용히 물었다.
"짐이 오와 촉에 군사행동을 하려고 하는데, 두 나라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하겠소?"
고계흥이 촉의 길은 험하여 빼앗기가 어려워서 마침내 대답하였다.
"오의 땅은 척박하고 백성들은 가난하니 그들을 이겨도 이익이 없고, 촉을 먼저 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촉의 토질은 풍요롭지만 또 주군은 거칠고 백성들은 원망하니 그들을 정벌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촉을 이긴 후에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서 오를 빼앗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좋소!"

황제가 고계흥을 남기려고 하자 곽숭도가 간하였다.
"폐하께서 새로이 천하를 획득하였는데 제후들은 자제와 장좌(將佐)들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진공하게 하는데 지나지 않았지만, 오직 고계흥만은 몸소 스스로 들어와서 조현하였으니 마땅히 포상하여서 오는 것을 권고해야 하며, 마침내 얽어매서 남겨두고서 보내지 않은 것은 신뢰를 저버리고 의리를 이지러뜨리는 것이어서 사해(四海)의 마음을 막는 것이지 계책이 아닙니다."
마침내 그를 보냈다. 고계흥이 배나 빠른 길로 떠나 허주(許州, 하남성 허창시)에 도착하여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번 행차에는 두 가지 실수가 있었다. 와서 조현한 것이 하나의 실수요, 나를 풀어주어서 떠나오도록 한 것이 또 하나의 실수였다."

또 장좌(將佐)들에게 말하였다.
"새로운 왕조가 백번 싸워서 바야흐로 하남(河南)을 얻고서 마침내 공신들에 대하여 손을 들고 ‘나는 열 손가락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말하였소.?
자랑함이 이와 같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공로가 없다는 것이니, 그 누가 흩어져 버리지 않겠소! 또 수렵과 미색에 거칠어져 있으니 어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겠소?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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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세계체제 2 - 중상주의와 유럽 세계경제의 공고화 1600-1750년, 제2판 근대세계체제 2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유재건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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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개진한 두 번째 새롭고 중요한 주제는 헤게모니(hegemony)라는 것이다... 내 논지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다. 중세의 장기적 흐름과 근대초의 장기적 흐름 사이에 모종의 기본적인 유사성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 둘 모두를 팽창하는 A국면과 수축하는 B국면을 가진 장기적 흐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둘을 주의 깊게 비교하면, 둘 사이에 어떤 중요한 질적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 흐름의 기본적 유형은 적어도 인구와 경제활동 그리고 물가의 세가지 중첩되는 팽창과 수축을 포함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서문.


 헤게모니란 드문 상황으로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를 통틀어서 헤게모니 국가는 홀란트, 영국, 미국 뿐이며 더욱이 이들 나라가 그 위치를 유지했던 기간도 비교적 짧았다. 특히 홀란트는 그 시대의 군사적 거인이 아니었던 만큼 헤게모니 국가라는 것이 그럴싸해 보이지 않는다. 헤게모니는 핵심부 지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핵심부 국가의 생산효율이 아주 높아져서 그 나라의 생산물이 대체로 다른 핵심부 국가들에서까지 경쟁력이 있는 상황, 그래서 그 핵심부 국가가 최대한 자유로운 세계시장에서 가장 큰 이익을 누릴 상황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63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의 <근대세계체제 2 The Modern World-system>의 시대적 배경은 17세기와 18세기 중반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1권에서 자본주의적 농업의 시작으로 이윤이 축적되고 이를 바탕으로 대외팽창(특히 아메리카 지역)이 이루어졌다면, 이어지는 17세기에서는 이러한 팽창이 본격화된다. 이 시기가 이전과 구분되는 점은 헤게모니(패권 覇權)이다. 이전 시대의 패권국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합스부르크 제국(Habsburgerreich)의 일부로 전성기에 프랑스와 잉글랜드, 러시아, 이탈리아 일부 지역 등을 제외한 거의 전역을 장악했기에, 경제적 패권을 장악한 세력은 등장하지 못했지만, 2권이 배경이 된 시기에 이르면서 양상이 달라지게 되었다.  


 사회경제적 위기가 귀족계급을 크게 약화시켰으므로 1250년에서 1450년 또는 1500년까지 농민들은 꾸준히 자기들의 경제 잉여의 몫을 늘려가고 있었다. 이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유럽 전역에 걸쳐 공통된 현상이었다. 상층계급에게 진짜 위기이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는 "연소"의 선행조건 따위가 아니라 하층민들의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소득의 상대적 평등화 추세였다. 이제 격렬한 사회적 변화말고는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잇는 길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 길이란 바로 잉여 수탈의 새로운 형태인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봉건전 양식을 자본주의적 양식으로 바꾸는 것이 영주 반동의 실체였던 것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54


 근대세계에서 자본주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첫 번째 국가는 네던란드였다. 카를 5세( Karl V, 1500~1558)의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신교도들이 저지대 연합국으로 몰려들면서 높아진 인구밀도는 이 나라의 생산양식을 자본주의적으로 빠르게 변모시켰다. 농지 확보를 위한 풍차의 개발, 청어잡이를 위한 조선업의 발달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농어업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이와 함께 상업, 조선업, 금융업의 발달이 동반되면서 네덜란드는 17세기 핵심부에서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높은 생산효율은 먼저 역사상 가장 오래된 형태의 식량 생산 형태인 채집경제에서 이루어졌으니 즉 물고기의 채집, 특히 "네덜란드의 금광"이라고도 불렸던 절임용 청어잡이 어업(그것만은 아니지만)으로 이룩되었다(p64)... 네덜란드인들의 농업은 지질학적으로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약점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 강점으로 바뀌었다. 먼저 토지를 만들기(간척하기) 위해서 물을 퍼올려야 했는데 이 바람에 풍차가 발명되고 공학이 발전했으며 그래서 홀란트는 여러모로 "목제기계 시대의 중심"이 되었다... 척박한 자연조건이 낳은 두번째 결과는 한층 더 중요했다. 즉 어쩔 수 없이 네덜란드인들은 집약적 농업으로 나아갈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최초로는 그 이전의 불황과 곡물 가격 저하가 새로운 집약적 농업의 창안에 이르게 된 1300년 무렵에, 그뒤에는 집약적 농업이 더 크게 팽창한 1620년에서 1750년 사이에 일어났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66


 네덜란드의 상업적 우위의 이유는 이미 획득한 농-공업의 높은 생산효율과 관련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높은 효율은 주로 배삯, 보험비용, 일반적인 경상비를 통해서 상업상의 효율로도 옮겨갔다. 네덜란드의 배삯은 왜 그렇게 쌌을까? 가장 큰 요인은 선박 건조비가 적게 들었다는 점이었다. 페리는 비용절감의 이점을 여섯 가지로 꼽았다. 즉 네덜란드 선박 목공의 기술, 재료 사용의 경제성, 노동절감형 기계, 대규모 표준 규격 생산, 대규모 재료 구입, 네덜란드 배를 통한 건설자재의 값싼 수송이 그것이다(p88)... "[네덜란드] 무역의 기초가 해운이었다"면 가장 큰 이익은 거대한 암스테르담 화물집산지에서의 판매 및 거래에서 왔으며 그 성공은 네덜란드 상업조직의 형태가 뛰어난 덕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89


 네덜란드가 융성한 17세기는 기본적으로 유럽경제의 수축기였다. 30년 전쟁(1618~1648)에서 보여지듯 유럽 전역이 신구교의 대립으로 최초의 국제전이 독일 지방에서 일어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국력이 내리막길에 들어섰기에 신흥강국  네덜란드의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국가는 많지 않았다. 유럽 전체의 인구는 감소하던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밀도와 앞선 산업생산력을 갖춘 네덜란드 북아메리카 지역과 인도네시아, 대만을 주변부로 하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뒤를 이은 제국을 건설하게 된 것은 당시 유럽의 정세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지만, 17세기 중반 이후 30년 전쟁이 종결되며 종교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영토형 절대주의 국가'가 등장한 시기에 핵심부에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와 국토를 갖춘 네덜란드의 패권은 위협받게 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1650년 이후 반세기는 인구가 감소하거나 보합세를 유지하여 전체적으로는 정체상태였던 시대였지만, 17세기 말에 인구는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는 30년전쟁의 참화, 일부 지역에서 지역적인 식량 부족으로 이어진 생태적 압박(그 결과 전염병의 유행) 그리고 세계경제 전체에서 과잉생산에 의한 곡물 가격의 세계적인 하락이 한데 어우러졌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설명하는 데에 가장 정확한 것은 지역적인 편차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17세기 초에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플랑드르에서 북부 이탈리아에 이르는) 유럽의 구(舊) 등뼈 지역과 유럽 세계경제의 새로운 핵심부 지역(네덜란드 연합주 서부, 잉글랜드 남동부, 프랑스 북동부와 서부)에 주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116    


17세기가 지나면서 농-공업 부문이 우위를 잃자 그 부문 쪽에서 관세를 요구한 적도 있었고(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영국 및 프랑스와 경쟁하면서 연합주 의회가 보복관세를 설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국가의 역할은 보호주의 아닌 문제들에서 뚜렷했다. 국가의 역할은 사기업(私企業)의 성공조건을 만들어냈다(p96)... 네덜란드 국가는 자기 나라 기업가의 이익을 옹호했지만 그렇게 하는 데에 이데올로기적 일관성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네덜란드 헤게모니의 이데올로기는 해양자유론(mare liberum)이라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휴전협정이 맺어진 1609년에 출간된 책에서 그로티우스가 줄기차게 주장한 것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97


 앤더슨에 의하면, "절대주의란 본질적으로...... 재정비되고 재충전된 봉건적 지배기구였다. 그것은 널리 퍼진 지대금납화로 농민 대중이 획득한 이익들을 무효화시키려고 농민 대중을 그들의 전통적인 사회적 지위에 되돌려 묶어두려는 것이었다."... 핵심적 요소는 국가가 얼마나 강했느냐이지 정부형태가 얼마나 절대적이었느냐가 아니다. 17세기에 가장 강한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지배한 국가들이었다. 이 점에서 연합주(네덜란드)가 첫째였고, 영국이 그 다음이었고, 프랑스는 고작 세번째였다. 영국 혁명은 영국의 국가를 강화시켰다. 이에 반해서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루이 14세의 주장은 국가의 상대적 약체성의 표지였다. 17세기의 수축은 체제의 위기가 아니었다. 정반대로 그것은 체제의 공고화 기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57


 그 결과 17세기 이후 네덜란드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만, 네덜란드 제국은 이전 제국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과 두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첫째, 주변부를 금은의 산지가 아닌 사탕수수 재배 등 농산물의 산지로 활용했다는 점과 둘째, 은행과 회사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해외산물과 금은 등의 수입에 치중했기에 그들의 위치가 핵심부에 서지 못하고 주변부와 핵심부를 중개하는 역할에 그쳤던 반면, 네덜란드의 정책은 스스로를 핵심부에 위치시키고 나아가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단지 1621년 서인도회사가 세워진 후 네덜란드인들이 다음 사반세기 동안 대서양으로의 팽창을 꾀했던 것이었다... 세계경제에서 네덜란드의 헤게모니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짧은 기간에 과연 무엇이 이룩되었을까? 첫째로 네덜란드인들은 남북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를 몰아내면서 "해군 방패막"을 제공했는데 그 덕분에 스코틀랜드인을 포함한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정착 식민지를 건설했다. 둘째로 남북 아메리카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한 것은 브라질이었는데 네덜란드인들이 브라질에서 쫓겨나자 바베이도스 점으로 그 재배가 옮아갔고 이 섬은 영국령 카리브 해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플랜테이션 식민지가 되었다. 셋째로 네덜란드인들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인력을 대기 위해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노예무역에 손을 댔다. 플랜테이션을 잃을 후에도 네덜란드인들은 노예무역에 손을 댔다. 플랜테이션을 잃은 후에도 네덜란드인들은 노예무역 상인으로 이 지역에 남으려고 했지만 1675년이 되면 네덜란드의 우위가 끝나고 새로 설립된 영국 왕립 아프리카 회사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83


 유럽의 구 등뼈 지역은 일찍부터 은행조직들을 발전시켜왔다. 17세기에는 홀란트가 선례에 따랐는데, 이는 홀란트 헤게모니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7세기 말에 프랑스보다 영국이 이러한 경로에 이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두 가지 생각을 나란히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유럽 세계경제 내에서 세 가지 화폐용 금속의 사회적 용도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즉 금은 국제결제와 국가적 사업 그리고 퇴장용으로 쓰이고, 은은 대규모 국내 상업용으로 쓰이며, 동은 가계 및 소규모 상업용으로 쓰인다... 두번째 생각은 동화의 역할, 아니 오히려 "세기의 악몽"이라고까지 하는 동화의 급증과 관련이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172


 네덜란드가 선취한 자본주의 제국의 길은 그 뒤를 이은 영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영국 이전의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이기고 네덜란드의 헤게모니를 계승할 가능성은 여러모로 희박해 보였다. 그렇지만,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거치며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들과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 지역의 신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모여들면서 네덜란드에 집중된 자본(資本)은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결합과 직물산업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결합, 비(非)가톨릭지역이라는 종교적 이점 등으로 인해 신흥강국 영국으로 투자처를 옮기게 되고, 헤게모니 역시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 


 우리는 영국을 프랑스보다 더 더 강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야한다. 가장 간단한 대답은 그것이 1689-1714년 시기의 전쟁들에서 프랑스를 저지할 수 있었던 영국의 군사적 능력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전쟁들에서 이길 수 있엇던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 간에 맺어진 동맹의 결과였는데, 이 동맹은 네덜란드의 군사적 원조 때문이 아니라 네덜란드인이 투자를 통해서 영국 국가에 제공한 재정적 뒷받침 때문에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인과 맺은 관계는 영국의 신용을 높혔고, 이로 인해서 잉글랜드 은행의 창설이 가능했으며 나아가 잉글랜드 은행이 남해 거품 사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스튜어트 왕조 초기에 시작되었고 1689-1715년 시기의 첨예한 토리-휘그 투쟁에서 다른 형태로 계속된 영국 통치계급 내의 분열이 마침내 월폴 일당국가에서 해결될 수 있었다. 영국이 강력해지고 나아가 영국 기업가가 경제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은 영국이 프랑스보다 더 민주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영국이 더 민주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434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 2>는 네덜란드의 자본의 이동과 금융제도의 영국이식을 영국이 프랑스를 물리치고 다음 세기의 패권을 장악한 핵심 요인으로 파악한다. 일례로 1907년 네덜란드와 영국의 합작기업인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이 오늘날에도 석유 메이저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보듯  네덜란드-영국의 결합은 매우 긴밀했다. 이 결합이 이후 영국-미국의 결합의 전신으로 발전되었다고 파악한다면, 결국 오늘날 헤게모니 체제의 근간이 이미 17세기로부터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사이 중심산업과 헤게모니 국가는 바뀌어도, 체제의 근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근대세계체제 2>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사실상 자본주의의 성격을 확정시켰음을 알게 된다. 뒤이은 <근대세계체제 3>에서는 팽창기의 영국 헤게모니를 확인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1600-1750년의 시기는 우선 네덜란드의 헤게모니를 파괴하고 다음으로 그 최고의 자리를 이어받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노력으로 특징지어졌다. 이 장기적인 상대적(즉 잘 알려진 장기 16세기의 경제적 확장에 비하여 상대적) 불황기에, 주변부 지역들에서는 직접생산자들에 대한 착취가 크게 심화되었고 토착 착취층의 이익은 줄어들었다(즉 핵심부 국가들의 같은 착취층이 얻은 이익에 비하여 줄어들었다). 반주변부 국가들은 훨씬 더 복잡한 모습을 보였다. 핵심부 국가들은 반주변부 국가들을 주변부와의 중개지로, 즉 잉여가치의 전달장치로 삼으려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 성공했지만, 핵심부간의 대규모 경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부 지역들은 자신의 상대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스웨덴의 경우였고 뒤에는 브란데부르크-프로이센의 경우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366


 네덜란드 은행들은 여전히 다른 은행들이 자신들의 금은을 맡길 수 있는 확실한 보관장소였고, 화폐주조율도 18세기 동안 계속해서 상승했다. 1763년 이후에야 세계 금융 중심지로서의 암스테르담에 대한 유럽의 신뢰가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18세기로의 전환기에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의 자금을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곳으로 옮기고 있었고, 그곳이 바로 영국이었다. 그것은 "노골적인 상거래"였는데, 그 속에서 네덜란드인 투자자들은 높은 수익을 얻은 대신 영국 국가가 자신의 대부비용을 줄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427


 앤 여왕의 치세기였던 1689-1714년의 전쟁기에, 영국인들은 장기 공공대부 제도를 창설하고 그리하여 공채제도를 설립하는 획기적 조치를 취했다. 이것은 국가를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안정된 재정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1694년에는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었다. 그에 더하여 이 시기에 재편된 동인도회사가 세워졌고 남해회사가 새로 설립되었다. 이들 세 회사는 모두 국가에 대한 장기 대부를 해준 대가로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세 회사의 대부금은 "유동공채를 정리국채로 전환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423

이 책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근대 세계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형태를 띠며 이 세계경제는 장기 16세기 유럽에 그 기원을 둔 것으로 여기에는 봉건 유럽의 특정한 재분배적 혹은 공납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질적으로 다른 사회체제로의 전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1) 지리적으로 지구 전체를 뒤덮게 팽창하며 (2) 팽창과 수축의 주기적 유형을 나타내고, 경제적 역할을 맡는 지역이 지리적으로 이동한다는 것 그리고 (3) 기술의 진보, 공업화, 프롤레타리아트화, 체제에 대한 정치적 저항의 구조화 등 지금도 진행 중인 장기적인 이행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 P21

토폴스키에 따르면 17세기의 수축은 체제 전반에서 "불균형의 증대"에 있었다. 불균형의 증대란 수축에 대립된 어떤 것이 아니다. 수축의 시대에 불균형은 사실상 자본주의의 주요 메커니즘의 하나이자 자본의 집중과 축적의 증대를 가져오는 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빌라르의 다음 설명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 "전반적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각기 다른 나라들은 각기 다르게 대응하게 되며 거기서 불균등 발전이 생기고 결국 그것이 역사를 만들어간다." - P36

1600년에서 1750년 사이의 기간이 이 세계경제의 한 가지 결정적인 과정을 지속시키고 심화시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브로델과 스푸너의 조사가 보여주듯이 유럽의 기본적인 3대 물가권역 사이에 불가의 격차는 차츰 사라져갔다... 상인 자본주의는 물가 평준화의 진전과 교류 채널의 창출에 기여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서 조건이 더 나은 곳을 찾아다니도록 관심을 돌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이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진행된 하나의 자본주의적 과정이 공업의 도약을 가능하게 했으며 물가의 평준화는 이 과정의 본질적인 일부였던 것이다. - P49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의 계급투쟁들은 복잡해서 다양한 겉모습을 띠고 비틀어져 나타난다. 한 헤게모니 국가가 지배적 위치에 서기까지의 시대는 국가 내부가 주목받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시장에서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국내의 정치적 제약을 쓸어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헤게모니가 쇠퇴하는 시대는 국가간 형태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시장에서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국가간 정치적 제약을 쓸어버려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 P112

하강의 시기는 훨씬 더 복잡하다. 우선, 그 시기는 훨씬 더 뚜렷하게 불균등하다. 후퇴, 정체, 위축, 불경기의 시기이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불경기인 것은 아니다. 세계경제를 전체로 볼 때 총생산은 총가치로 보나 일인당 생산량으로 보나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 지역에서 생산량으로 보나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 지역에서 생산량 혹은 생산성 혹은 그 양자가 증가한 것이 다른 지역의 하락으로 상쇄된 결과이다. 피고용자들의 실질임금이 상승할 수도 있으나 실업률도 같이 증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점은 하강이 활동의 둔화이지 정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그것은 이윤 추구를 가로막는 일련의 걸림돌이 되어서 말하자면 염소 무리에서 자본가라는 양을 솎아낸다. 강한 것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곧잘 번영한다. - P196

경제의 경기후퇴, 토지와 노동력에 대한 압력의 증가, 토지와 노동의 집중과 상품화의 심화 등은 모두 실제로 동유럽에서처럼 남유럽에서도 나란히 진행되었다. 이제 "17세기의 불황"이 오랫동안 주된 논쟁거리였던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로 눈을 돌려보자. 세계경제의 이 주변부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제도인 아시엔다(hacienda)의 등장을 먼저 살펴보자(p221)... 16세기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주요 수출품인 은은 1590년에서 1630년까지의 시기에는 고원현상을 보였고 그뒤 수치는 갑자기 뚝 떨어졌다(p224)... 이른바 자급자족적인 대규모 아시엔다는 바로 시장의 힘에 민감하게 적용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었다. 그것은 이윤율의 변동에 따라서 생산을 줄이거나 늘릴 수 있었고 자원 이용의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늦출 수 있어서 장기간에 걸쳐 농업생산과 세계경제의 연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시엔다는 새로운 직물 생산의 거점이었다. - P234

토지집중화 경향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데에 중심적이었던 것은 장기적으로 지속된 낮은 곡물 가격이었다. 1600-1750년의 시기 전체 동안에 곡물 경기가 좋았던 해는 거의 없었다. 낮은 곡물 가격이라는 불행은 영국의 경우에는 그것이 농업혁신으로 이어졌기에 사실상 행운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주목할 만한 것은 영국이 유럽의 주된 곡물 수출국이 된 것이 바로 곡물 가격이 가장 낮았을 때인 18세기 초반이었다는 점이다. 그에 대한 가장 명료한 설명은 1688년에 영국 정부가 곡물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서 제정한 곡물보조금법이 농업 확장에 "대체로 유리한" 조건을 창출해다는 것이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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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3-28 2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대세계체제 이론도 결국 세계 ‘분업’ 이론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2-03-29 06:42   좋아요 2 | URL
저 역시 동감합니다. 다만 핵심부의 의지에 따라 주변부에 분업의 내용과 역할이 강제된다는 점이 자발적인 분업과 다른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3-29 21:06   좋아요 1 | URL
저도 사회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분업’ 중인데요, 그런데 자발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2-03-29 21:10   좋아요 1 | URL
^^:) 사실 직장에서 하는 업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만... 직장 그만둔다고 해서 정치적, 경제적 억압이 들어오는 경우는 없기에, (울며 겨자먹기식이긴 합니다만) 자발적인 분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ㅜㅜ
 

이홍규(李弘規)가 왕에게 말하였다. "진왕은 하(河, 황하)를 끼고 피나는 싸움을 하며, 바람으로 빗질하고 비로 목욕하고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있는데, 왕께서는 오로지 군대에 공급할 물자를 가지고 위급하지 않은 비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또 때는 바야흐로 어려워서 인심을 헤아리기 어려운데 왕께서는 오랫동안 부제(府第)를 비우고 멀리 나가서 놀기를 좇다가 만의 하나라도 간사한 사람이 있어 변고를 일으켜서 관문을 닫고 서로 거리를 두면 장차 이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단을 엮어서 산을 만들고 그 위에다 궁전 누관(樓觀)을 만들고 혹시 비바람에 무너지게 되면 다시 새로운 것으로써 그것을 바꾸었다. 때로는 비단으로 만든 산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면서 열흘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산 앞에서 해자를 파서 금중(禁中)과 통하게 하여 혹은 배를 타고 밤중에 돌아오면서 궁녀들로 하여금 밀초 1천여 개를 들고 앞에 가는 배에 있게 하고 뒤의 배에 서서 그곳을 비치게 하니 수면(水面)이 마치 낮과 같았다. 혹은 금중(禁中)에서 술을 마시어 취하면 북을 치고 악기를 불며 비등하여 새벽까지 이르렀다. 이것을 가지고 일상으로 삼았다.

오의 서온(徐溫)이 오왕에게 권고하여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예의와 음악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또 당이 남교에서 제사를 지낼 적마다 그 경비는 거만(巨萬)이었는데, 지금은 아직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서온이 말하였다. "어찌 제왕이 된 사람이 있는데 하늘을 섬기지 아니하겠는가? 내가 듣건대 하늘 섬기는 것은 진실한 것을 귀히 여긴다고 하니 많은 비용을 써서 무엇 하겠는가? 당에서는 매번 교서(郊祀)를 지낼 때마다 남문(南門)을 열고 그 돌쩌귀에 기름을 치는데, 기름 100곡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바로 말세에 대단히 사치하였던 폐단인데, 또한 어찌 충분히 본받을 만하겠는가?"

이사소가 노주(潞州, 산서성 장치시)에서 도착하여 역시 말하였다. "지금 강한 적이 앞에 있으니 우리에게는 전진은 있으되 후퇴할 수는 없고, 가볍게 움직여서 인심을 동요시킬 수 없습니다."
진왕이 말하였다. "제왕(帝王)이 일어나는 것은 스스로 천명(天命)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거란이 나를 어찌 하겠는가? 내가 수만의 무리를 데리고 산동(山東, 태행산 동쪽)을 평정하였고, 지금 이 작은 야만인을 만났는데 이들을 피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사해(四海)에 다가갈 수 있겠는가?"

마침 폭설이 열흘 동안 내려서 평지에 수 척(尺)이 쌓였고 거란의 사람들과 군마가 먹을 것이 없어 죽은 사람들이 길에 서로 줄을 이었다. 거란주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노문진(盧文進)에게 말하였다.
"하늘이 아직 나로 하여금 이곳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구나!" 마침내 북쪽으로 돌아갔다.
진왕이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뒤밟아 그들이 가다가 머무는 대로 따르다가 그들이 들판에 유숙하던 곳을 보니, 땅바닥에 볏짚을 깔고 있는데 빙 둘러있는 것이 바야흐로 네모반듯하여 모두가 잘라서 엮은 것 같았으며, 비록 떠나면서도 한 나뭇가지라도 어지럽힌 것이 없었으니, 탄식하며 말하였다. "야만인이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마침내 이와 같을 수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구나!"

대봉왕(大封王) 궁예(躬乂)는 성격이 잔인하였는데, 해군(海軍)통수인 왕건(王建)이 그를 죽이고 자립하여 다시 고려왕(高麗王)이라 칭하고 개주(開州)를 동경(東京)이라 하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왕건은 검소하고 절약하며 너그럽고 온후하여 그 나라의 사람들이 이를 편안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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