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4 - 로마와 지중해 세계 리비우스 로마사 4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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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01년] 카르타고와의 강화 조약 이후에 마케도니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마케도니아와의 충돌은 상황의 위험성, 적군 지휘관의 자질, 교전 부대들의 전력 등에서 포에니 전쟁과는 비교될 수 없는 소규모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포에니 전쟁 못지않게 유명해졌는데, 마케도니아의 옛 명성과 마케도니아 제국의 광대한 영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마케도니아는 정복 사업을 통해 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얻었고 아시아에서는 그보다 더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던 것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12/964


  티투스 리비우스 (Titus Livius Patavinus, BCE 59/64 ~ ACE 17)의 <리비우스 로마사 4 Ab Urbe Condita Libri>은 <리비우스 로마사> 31~45권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  2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통해 강력한 해운국 카르타고를 꺾고 서지중해 패권을 장악한 로마는 이제 그 시선을 동지중해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Magnus, BCE 356 ~ 323)의 후손들에게로 돌린다. 그렇지만, 한때 인도변경에까지 이르렀던 마케도니아의 위세는 이제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로 분할되고 약해졌다.


 <리비우스 로마사>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3차례에 걸친 마케도니아 전쟁은 포에니 전쟁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포에니 전쟁 때와 같이 한 번도 이탈리아 반도에 마케도니아 군이 발을 들여다 놓은 적도 없었으며,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 BCE 216)와 같이 로마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가하지도 못한 채 마케도니아는 로마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이에 반해,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 당시 카르타고에게 사용한 절차대로 마케도니아를 압박해 들어갔다. 한니발 전쟁 때 에스파냐의 사군툼을 통해 한니발을 자극했던 로마는, 이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Philippos V of Macedonia, BCE 221~179)에게 카르타고와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181) 지원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전쟁을 시작한다. 


 로마 군이 승리를 거두게 된 가장 분명한 원인은 다수의 소규모 전투를 유도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런 소전투들이 중장보병 밀집 대형(Phalanx)을 무질서 속으로 빠뜨렸고 이어 완전 해체시켰다. 중장보병 부대는 밀집 대형을 유지하고 장창을 밖으로 내밀 때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여러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오면 그 대열은 장창의 길이와 무게 때문에 날렵하게 상황에 맞춰가며 전선을 재정비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중장보병 부대는 하나의 거대하고 무질서한 덩어리로 해체되고 말았다. 전열의 측면과 후면에서 계속 소음이 발생하여 그들을 혼란 속으로 빠트렸고 이어 전체 대열이 완전 궤멸하고 말았다. 이것이 이 전투의 핵심사항이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842/964


 로마군은 한니발 전쟁을 통해 자신들에게 처절한 절망을 안겨주었던 칸나에 전투에서 얻은 전술적 교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를 자마 전투(Battle of Zama, BCE 202)에서 입증한다. 그리고 '망치와 모루 전술 Hammer and Anvil military tactic'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마케도니아 군의 팔랑크스(phalanx)를 포위 섬멸하면서 전술적인 우위를 확인한다. 


 그렇지만, 로마 군의 우위는 전술적인 측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개인 병기(兵器)에 있어서 차이 또한 현저했기에 마케도니아는 각개 전투에서도 전술 단위의 집단전투에서도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후대에 마케도니아 동쪽 지역 시리아 일대에서 다마스쿠스 강(鋼) 제조법을 통해 강력한 검(劍)이 만들어지며 명성을 떨치지만, 이 시기 글라디우스(Gladius)는 최강의 양산화된 개인병기였다. 요약하자면, 오랜 전투 민족이었던 로마인들은 한니발이라는 최강의 적으로부터 규화보전(葵花寶典)을 전수받아 진정한 지중해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스파르타 인들은 투척 무기로 싸웠지만, 로마 군인들은 소지하고 있는 커다란 방패 덕분에 그런 무기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었다. 이외에도 던져진 많은 창이 목표를 맞추지 못했고, 맞았다고 하더라도 영향이 미미했다. 공간이 제한적이고 병력이 한가득 모여 있어 스파르타 인들은 창을 던지기 전에 달려올 공간이 없었고, 그래서 던지는 창엔 속력이 붙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견고하게 투척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할 공간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던진 창은 그 어떤 것도 로마 인들의 몸을 정확히 맞추지 못했고, 그나마 명중한 몇 안 되는 창도 방패에 가로막혔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241/964


 그들은 창, 화살, 드물게 긴 창으로 부상당한 병사들의 시신들을 보아 왔지만 그것은 그리스 인과 일리리아 인의 싸움에선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스페인' 칼로 예리하게 잘린 주검을 보게 되었다. 양팔은 어깨가 붙은 채로 잘렸고, 머리는 목이 완전히 잘린 채로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내장이 그대로 드러났고, 다른 끔찍한 상처도 보였다. 장병들은 이런 부류의 무기, 그리고 그들이 대적해야 할 상대를 깨닫고 심한 두려움을 느끼면서 전반적인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필리포스 왕 자신도 두려움에 휩싸였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60/964


 <리비우스 로마사 4>에서 로마는 이러한 압도적인 무력만을 선보이지 않는다. 이를 바탕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고립시켜 결국 굴복시키는 외교술을 통해 마케도니아 뿐 아니라 아테네, 스파르타, 로도스 등 그리스 제국들과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조 등이 차례로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게 되는 역사가 소개된다.


 로마 인들은 선왕을 상대로 싸울 때 그리스를 해방시킨다는 기만적인 구실을 내세웠다. 이제 저들은 노골적으로 마케도니아를 노예로 만들려고 한다. 로마 제국 주위에 왕국이 아예 없게 만들고 또 전쟁에서 용맹함을 떨친 국가가 아예 무기를 지니지 못하도록 하려는 속셈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759/964


 이런 논쟁을 다 들은 뒤에 로마의 조사위원들은 그들의 결정사항을 발표했다. 마케도니아 주둔군은 거론된 도시들에서 물러나야 하며, 필리포스의 영토는 마케도니아의 과거 국경으로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쪽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고 불평하는 잘못들에 관해서 조사위원들은 그 문제에 적용될 법적 원칙을 확립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원칙이 마련되면 관련된 민족들과 마케도니아 인들 사이의 분쟁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583/964


 지중해 패권을 둘러싸고 강대국인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 제국을 무너뜨린 로마는 이제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다. 로마가 한때 자신보다 강력했던 이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자신보다 강력한 상대의 장점을 흡수하는 로마인들의 학습 능력이 그들을 '진화하는 전투민족'으로 만들었지만, 그 근간에는 신(神)의 뜻을 넘어선 인간 의지(意志)가 자리한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더 거슬러 올라가 이탈리아 반도 내에 자리한 고대 헬라 문명(그리스 문명)의 영향력이 의식에서의 인문혁명(人文革命)을 가능케 했고, 그 결과 칸나에 패전의 절망에서도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포에니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은 인간과 바알, 제우스와 12 올림푸스 주신(主神)들과의 이데올로기 전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기저에는 리비우스가 강조한 '근검과 절약'과 소박한 '로마인 정신' 대신 부(富)를 향한 개인의 욕망과 내부 체제의 문제를 외부로 돌리려는 체제의 욕망이 자리하겠지만...


 "불멸의 신들께서 부여하실 수 있는 여러 물건들 중에, 우리 로마 인들은 신들께서 직접 주신 것들만 지니고 있소.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의지에 속하는 것이오. 우리는 온갖 흥망성쇠 속에서도 그런 정신을 바꾼 적이 없고, 여전히 바뀌지 않은 채로 지니고 있소. 성공했다고 그런 정신이 칭송된 적도 없고, 역경을 겪었다고 그런 정신이 저하된 적도 없소. 이런 로마 인의 강건한 정신을 목격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증인들을 모두 건너뛰고, 나 역시 그런 증인들 중 한 사람으로서 그대들의 친우인 한니발을 내세울 수 있소. 이젠 그대들도 증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말이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443/964


 카르타고에선 지휘관들이 성공적으로 전쟁을 끝냈더라도 전술이 나쁘면 십자가형에 처해지지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모든 일의 시작과 수행에 신들을 관여시키는데, 이는 신들이 승인한 이런 행동들이 누구에게도 비판을 받을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공공 감사제나 개선식을 결정하는 데 있어 그 의례 방식엔 '그가 공무를 훌륭하고도 성공적으로 수행했기에'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528/964


 동료 시민 여러분, 저는 여러분 중 그 누구도 이런 파멸적인 잘못에 휘말려 인생이 파탄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습니다. 종교 문제에서 드러나는 변태적 집착만큼 사람을 잘 속여 넘기는 것도 없습니다. 저들이 신들의 뜻을 범죄 행위의 구실로 삼는 곳에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이런 두려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의 비행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혹시 신의 뜻에 위배되는 짓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저들의 범죄에 신의 뜻이 가미되어 있다고 주장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런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로마의 사제단이 내린 무수한 결정, 원로원 결의, 그리고 추가로 예언자들의 반응을 통해 선례가 정립되어 있으니까요.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571/964


 현존하는 리비우스(Titus Livius Patavinus, BCE 59 ~ 17)의 <로마사>는 45권이 마지막이다. 그렇지만, 한때 동경했던 그리스마저 발밑에 둔 로마인들이 주변 민족을 대하는 시선은 경멸을 넘어서지 못한다. 자신들의 제국(帝國)으로 편입시키면서, 이민족을 야만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로마의 해방 정복 전쟁은 이후 역사에서 가속화될 것이고, 리비우스는 여태까지와 같은 논조로 이를 서술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리비우스가 CE 9년 아르미니우스(Harminius, BCE 17 ~ CE 21)에게 당한 토이토부르크 전투(Schlacht im Teutoburger Wald)의 패배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궁금해지지만,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다소의 아쉬움이 남지만, 로마인이 바라본 로마 역사서인 <리비우스 로마서>에 대한 정리는 이것으로 마무리하자. 


 이제 <리비우스 로마사>를 바라본 다른 시선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 ~ 1527)의 <로마사논고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을 꺼낼 차례가 되었다. '분할하여 통치'(divide and rule)할 수 있었던 제정 시대를 살았던 리비우스와는 달리 중앙집권국가들인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에스파냐 제국들로부터 '분할되어 통치'되었던 15세기 말을 살았던 마키아벨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이 예나에서 시대정신을 발견하기 이전, 시대정신에 근접했던 'the prince'의 모델을 로마에서 발견한 것과 <로마사 논고>는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다음 리뷰에서 보다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아테네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성급하고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모험에 나선다는 평판이 있습니다. 반면에 스파르타 사람들은 성공을 확신하는 일에서조차 첫 걸음을 떼는 것이 어렵고 망설인다고 합니다. 나는 아시아 전역이 이런 무책임한 성격을 만들어냈고, 우리가 허세를 부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881/964


 온 세상의 다른 모든 민족을 상대로 한 것보다 갈리아 인들을 상대로 치른 개선식이 더 많다. 우리는 경험으로 아는 바가 있다. 그들이 불처럼 타오르는 격정과 맹목적인 분노로 몸을 던져 가하는 첫 공격을 우리가 버텨내면 그들의 사지는 곧 땀과 피로로 늘어지고, 손에 쥔 무기는 흔들리게 된다. 격정이 사그라지면 그들의 몸은 축 늘어지고, 그들의 결의도 마찬가지로 축 늘어진다. 그들은 태양, 먼지, 목마름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해 제군이 그들을 상대할 때 무기조차 필요 없을 정도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483/964


PS. 동방불패(東方不敗)가 익힌 것으로 알려진 '규화보전'은 최강의 무공이지만, 그 대신 고자가 되어야 하는 반대급부가 따른다. 최강의 무력을 얻은 로마는 대신 동방으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재물로 사치와 향락에 빠지면서 다른 의미에서 대가를 치룬다...


 여자 류트 연주자와 하프 연주자, 그리고 다른 유쾌한 여흥 제공자들이 만찬에 따라오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연회 그 자체에 엄청난 공과 더욱 큰 비용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고대 로마 인들이 노예 중에서 가장 가치가 없다고 여겨 몸값과 대우도 그에 맞추어 낮았던 요리사들이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고, 단순한 서비스가 예술로서 대우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경이롭게 여겼던 것들은 앞으로 다가올 사치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557/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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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기원은 저자가 1989년 여름 내셔널 인터레스트지에 기고한 "역사의 종말? The End of History?)"이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거기서 나는 하나의 정부형태인 자유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가 군주제나 파시즘, 또는 최근의 공산주의와 같은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게 됨에 따라, 지난 수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의 정통성에 대해 주목할만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자유민주주의가 "인류의 이데올로기 진화의 종점"이나 "인류 최후의 정부형태"가 될지도 모르며,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종말"이 된다고 주장했다. - P7

그러나 내가 종말이 왔다고 주장한 것은 심각한 대사건을 포함한 여러역사적 사실의 발생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이다. 즉, 어떤 시대, 어떤민족의 경험에서 생각하더라도 유일한, 그리고 일관된 진화의 과정으로서의 역사가 끝났다는 것이다. 역사를 단 하나의 일관된 진화의 과정의로 간주하는 것은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G. W.F 헤겔의 사상에서 유래한다.  - P8

이를 위해 나는 자연과학을 역사의 방향성과 일관성을 설명하는 장치또는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근대 자연과학은 이와 같은 논의에 있어서유효한 출발점이 되는데, 이는 자연과학이 인간의 행복에 대해 궁극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해도, 자연과학만큼 일반적으로 그 누적속성이나 방향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있는 주요 사회활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P11

하지만 역사에 대한 경제적 해석이라는 것은 역시 불완전하며,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것은 인간이 단순한 경제적 동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제적 해석은 특히, 우리들이 왜 민주주의자인가 하는 점,
즉 우리들이 왜 인민주권의 원리와 법의 지배 아래 기본권에 대한 보장을 신봉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책의 제3부에서는 역사의 과정에 대해 첫번째 관점과는 평행인 새로운 관점에 대해 설명하고, 인간의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그 전체적인 모습을 재파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헤겔과그의 "인정받기 위한 투쟁‘에 기초한 비유물론적 역사관으로 되돌아가야한다. - P13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제2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를 경제적 관점에서 설명할 때 누락되었던 자유주의 경제와 자유주의적 정치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가 바로 인정받기 위한 욕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업화 과정이나 기타 경제 활동의 대부분은 욕망과 이성의 두 가지에 의해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은 설명할 수 없으며, 이는 인정받고자 하는 영혼의 ‘패기‘ 부분에서 궁극적으로 비롯되는 것이다. 공업화의 진전에 따른 사회적 변화, 그중에서도보통교육의 보급은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때까지 느끼지못했던 인정받기 위한 욕망을 불러 일으킨 것 같다.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도시화가 진전됨과 아울러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사회가 전반적으로 평등화되면서 사람들은 단순히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지위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 P17

 니체에 의하면 근대의민주주의란, 예전의 노예가 스스로 주군이 된 것이 아니라, 노예와 일종의 노예적 윤리가 무조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전형적인 시민이란, 근대 자유주의의 창시자들로부터 조련되어, 쾌적한 자기보존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훌륭한 가치에 대한 긍지 높은 신념마저 내던져 버리는 "최후의 인간"이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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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거는 이런 지적 재능이 요행이 아니라 독특한 인격의 긍정적인 부작용일지도 모른다고 가정했다. 매우 좁은 한 가지 주제에 깊이 빠져드는 능력은 어쩌면 한눈팔지 않고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윙이 아스퍼거의 소년들을 주목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자신이 제시한 스펙트럼이란 개념을 강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학문헌 속에 몇 가지 자폐성향을 나타낸다는 이유만으로 언어와 지능이 잘 발달하지 못한 사람과 언어능력과 지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 동일한 스펙트럼에 속하는 것처럼 기술한 예가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스퍼거는 정신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과 부족한 사람에게 모두 전형적인 자폐성향이 나타날 수 있으며, 그 강도 또한 매우 다양할 수 있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하지만 윙과 달리 이런 관찰을 이곳저곳에 단 한 문장, 또는 단 한 단락으로 묘사하여 되도록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논문은 그보다 인상적인 지적, 언어적 능력을 나타내는 어린이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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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이하 공산당)은 중국에서 ‘유일한 집권당(執政黨, ruling party)’이면서 동시에 ‘영도당(領導黨, leading party)’이다. 공산당이 집권당이 된 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국민당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 공산당 일당 체제,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왔던 방식으로 말하면, 중국의 ‘당-국가 체제(party-state system)’ 혹은 ‘공산당 영도 체제(領導體制, leadership system)’가 유지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다섯 가지의 ‘공산당 통제 기제(統制機制, control mechanism)’가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림 1〉은 공산당의 다섯 가지 통제 기제가 공산당 영도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상황을 집(家)에 비유하여 묘사한 것이다. ‘다섯 가지의 기둥’ 중에서 첫째는 인사 통제, 둘째는 조직 통제, 셋째는 사상 통제, 넷째는 무력 통제, 다섯째는 경제 통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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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지 - 군웅할거에서 통일전쟁까지 184~280
최진열 지음 / 미지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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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역사학자의 눈으로 보면, <삼국지>는 잘 쓴 책이라는 서진시대의 평가와 달리 엉성하고 빈 부분이 많다. 본기와 열전에 정반대의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가 하면위나라를 다룬 기록과 촉나라를 다룬 기록이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게다가 사건의 줄거리가 엉성하다. 예컨대 소설 삼국지에서 비중있게 다루는 적벽대전이 <삼국지>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역사서로서 <삼국지>는 사실을 잘 기록한 책이라기보다는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문제를 잘 해결한 책이었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8/431

현대의 소설 삼국지는 삼국시대 이야기를 명청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다.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인 후한 말과 위진시대는 신분(계급)이 점차 엄격해지던 시기였다. 이를 세습계급이 없던 명청시대 분위기에 맞게 바꿔서 마치 능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시대처럼 묘사했다. 관직과 지명도 명청시대 중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명청시대의 것을 섞어 썼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11/431

최진열의 <역사 삼국지 - 군웅할거에서 통일전쟁까지 184~280>는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삼국지>와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 三國志>의 한계를 함께 보여준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민중들을 대상으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되, 흥미를 위해 사실 왜곡에 주저함이 없었던 소설 <삼국지>는 물론, 우리가 정사(正史)로 알고 있는 <삼국지> 역시 조조(曹操, 155~220)와 위(魏)나라를 천하의 중심에 놓고 당시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당대의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소설이 허구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사 <삼국지>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적기에, 이러한 저자의 지적은 신선하게 느껴진다. 본문에 소개된 대표적인 역사서 <삼국지>의 왜곡 사례는 형주의 유표(劉表, 142~208)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유표 관련 기록을 비교하면, 전자는 유표를 평범하면서도 관도 전투 때 원소와 조조 사이에서 간을 본 기회주의자이자 황제 놀이를 했던 역적으로 묘사한 반면, 후자는 유표가 형주에서 선정을 베풀고 헌제를 돕고 조세를 낙양 조정에 보낸 충신으로 기록했다. <삼국지>는 유표가 먼저 헌제를 도왔다는 기록을 누락함으로써 조조만이 헌제를 도운 유일한 군벌이라고 부각시킬 수 있었다. 불쌍한 헌제를 도운 조조는 당연히 정통성을 지녔고, 이 공 때문에 조조와 조비 부자는 찬탈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16/431

역사 <삼국지>에서는 정통(正統性)의 관점에서 조조와 위진(魏晉), 지역적으로는 화북(華北)지방을 강조한다면, 소설 <삼국지>에서는 후대에 신으로 추대된 관우(關羽, ? ~ 219) 그리고 그가 속한 유비(劉備, 161~223)과 촉한(蜀漢)이 중심이다. 때문에, 실제로 동탁의 부하 화웅을 벤 손견(孫堅, 156 ?~192 ?)의 공도, 문추를 벤 이름 모를 무장의 공도 관우에게 돌리고, 관우의 무용을 과시하기 위해 오관참육(五關斬六)이라는 허구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중국에서는 자기 지역의 유명한 인물을 신처럼 떠받들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산시성 사람들은 산시성 출신 가운데 가장 유명한 관우를 제사 지냈다. 산서상인들이 부를 축적하자 다른 지역 사람들은 산서상인들이 돈을 잘 버는 이유가 관우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도나도 앞다투어 관우의 사당인 관제묘에서 제사 지내며 돈을 잘 벌게 해달라고 빌게 되었다. 이 덕에 관우는 산시성의 토착신에서 전국적인 재물신(財神)이 되었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72/431

저자는 소설과 역사서 <삼국지>에서 각각 조조와 관우를 강조하는 한계 점을 가지며 이로 으로 인해 독자들이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후한서 後漢書> <자치통감 資治通鑑>등 다른 문헌 등과 비교 고증을 바탕으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새롭게 시대를 바라본다.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이 워낙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역사서와 소설이 보여주지 않는 진실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책을 읽는다면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몰랐던 많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 이 점이 책이 갖는 장점이라 생각한다.

<역사 삼국지>는 소설 뿐아니라 역사책 또한 저자의 '독사(doxa)'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삼국지연의>에서 <정사 삼국지>로 넘어가기 전 읽으면 도움이 될 듯하다. 저자가 삼국의 지형, 정세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역사 삼국지>는 시대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를 통해 도탄에 빠진 백성과 황실을 구하는 정치적 명분 대신 폭도로 규정된 태평도와 오두미교에 쏠린 민심과 후대 화북을 능가하는 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하게 될 강남(江南) 개발의 중요성 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이 소설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지점이 되지 않을까...

손권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강남 개발이다. 당시에는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하는 것을 뜻했는데, 조조가 둔전제를 실시한 것처럼 손권도 둔전을 실시했다. 손권이 언제 둔전을 실시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어떤 학자는 203년 혹은 204년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조조의 둔전이 민둔의 비중이 큰 반면 오나라의 둔전은 군둔이 많았다(p202)... 전한과 후한 시대에는 관리들에게 돈이나 곡식을 봉록으로 주는 제도가 이미 존재했다. 따라서 손권 통치 시기 봉읍제가 실시되었다는 것은 강남 지역이 수취 체계가 잘 작동하지 않은 낙후된 지역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한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의 행정 시스템이 보다 공고해지는 손권 통치 푸기에는 봉읍이 없어지고 지방관과 무장을 열후로 봉하고 식읍을 주는 제도로 바뀐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04/431

백성들이 태평도로 몰려든 까닭은 태평도가 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안식처를 어느 정도 제공했기 때문이다. 관리들이 백성들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무소불위로 괴롭히는 데 반해 태평도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피난처를 제공햇다. 가렴주구와 무거운 세금을 견디다 못해 떠돌전 유민과 빈민들에게 장각과 태평도는 실로 '구세주'였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31/431

장로가 순순히 조조에게 항복한 것은 나름대로 정치적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조조에게 항복한 후 장로는 조조와 부하들에게 오두미교를 포교했다고 한다. 훗날 조조의 아들이 세운 위魏나라와 사마의의 손자가 세운 진晉나라 지배층 가운데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장로가 한중 일대에서 포교한 대상은 가난한 백성들이었지만 위나라에서는 지배층을 상대로 포교하면서 교리와 의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로는 전투에서 패했지만 전쟁에서 이긴 셈이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55/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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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1-25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공도가 손견의 수하 장수인데 화웅을 베었다고요? 와.... 더운 술이 식기 전에 얼른 나가 관우가 목을 쳐버린 장수 아닙니까? ㅎㅎㅎㅎ 게다가 공도는 황건적 잔당인데 정규군 최고 장수 화웅을 베었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문추도요? ㅋㅋㅋㅋ 할 말이 없군요.

겨울호랑이 2023-01-25 20:39   좋아요 2 | URL
에고, 골드문트님 글을 읽고 제 글을 다시 보니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네요... 죄송합니다. 저는 공훈(功勳)을 관우에게 몰아주었다는 의미로 적은 글이었는데, 미처 황건적 출신 공도(龔都)를 고려하지 않아 그를 명장으로 만들어 버렸네요...ㅜㅜ <역사 삼국지>에서 해당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관우가 반동탁연합군에 종군하는 동안 더운 술이 식기 전에 동탁의 부하 화웅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소설 초반부터 관우의 압도적인 용맹함을 보여주며 독자를 사로잡는데, 정작<삼국지>에 따르면 화웅을 죽인 사람은 관우가 아니라 손견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데워먹는 술, 즉 증류주도 없었다. 증류주는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 시대 아랍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삼국지/관우전>에서는 관우가 안량을 참했다고 기록했지만 문추를 죽인 주체는 기록하지 않았다. 또 그렇게 조조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다가 유비가 원소 진영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으러 떠나는 도중에 5개의 관(五關)에서 자신을 막아서는 여섯 장수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459/723

관우는 안량만 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후세의 이야기꾼 덕분에 화웅과 문추를 죽인 무공도 증류수와 함께 얻은 것을 보면서 관우에 대한 대중의 사랑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와 함께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삼국지연의>에서 비중도 낮은 인물인 공도를 짧은 순간 떠올리시는 골드문트님 내공에 깊이 감탄하게 됩니다...

레삭매냐 2023-01-25 19: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산정왕 후예 타령을 하는
유비야말로 시대정신에 어긋
나는 캐릭이 아니었나 싶습
니다.

연의에서는 불세출의 영웅으
로 그려지지만, 결국 꼴랑 서
천과 한중에 할거한 군벌정권
이 실제가 아니었을까요.

오월의 손씨 정권이 강남개발
의 선구자였다는 분석도 흥미
롭네요.

겨울호랑이 2023-01-25 20:45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유비가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표현되지만 그의 세력이 익주와 형주 일부에 그쳤던 것을 보면 당대 백성들 역시 그에게서 시대정신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었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가 사천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위나라를 정통으로 해석한 것도 이러한 생각의 반증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또는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인 관우와 같은 편이어서 좋게 본 측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관우에 대한 존경은 소설 삼국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설 삼국지를 읽은 독자들은 대충 느꼈겠지만, 소설 삼국지 전반부의 주인공은 유비, 조조, 손권이 아니라 관우였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458/723

바람돌이 2023-01-25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삼국지에 나오는 그 많은 인물들 중에서 관우가 유난히 신으로 추앙받고 사당이 많은 이유가 늘 궁금했는데 오늘 그 이유를 알았네요. 역시 후손이 돈을 잘 벌어야 해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3-01-26 07:51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님 말씀을 들으니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가지 않는다‘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후대의 신앙 덕분에 살아서 ‘한수정후(侯)‘에 머물렀던 관우가, 죽어서는 ‘관제(帝)‘가 된 것을 보면서 생각나게 되네요. 다만, 아쉽게도 관우의 후손들은 촉나라 멸망 후에 방덕의 후손들에게 멸문당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관우도 제삿상을 보며 조금은 씁쓸해하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