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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지 - 군웅할거에서 통일전쟁까지 184~280
최진열 지음 / 미지북스 / 2022년 4월
평점 :
현대의 역사학자의 눈으로 보면, <삼국지>는 잘 쓴 책이라는 서진시대의 평가와 달리 엉성하고 빈 부분이 많다. 본기와 열전에 정반대의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가 하면위나라를 다룬 기록과 촉나라를 다룬 기록이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게다가 사건의 줄거리가 엉성하다. 예컨대 소설 삼국지에서 비중있게 다루는 적벽대전이 <삼국지>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역사서로서 <삼국지>는 사실을 잘 기록한 책이라기보다는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문제를 잘 해결한 책이었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8/431
현대의 소설 삼국지는 삼국시대 이야기를 명청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다.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인 후한 말과 위진시대는 신분(계급)이 점차 엄격해지던 시기였다. 이를 세습계급이 없던 명청시대 분위기에 맞게 바꿔서 마치 능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시대처럼 묘사했다. 관직과 지명도 명청시대 중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명청시대의 것을 섞어 썼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11/431
최진열의 <역사 삼국지 - 군웅할거에서 통일전쟁까지 184~280>는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삼국지>와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 三國志>의 한계를 함께 보여준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민중들을 대상으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되, 흥미를 위해 사실 왜곡에 주저함이 없었던 소설 <삼국지>는 물론, 우리가 정사(正史)로 알고 있는 <삼국지> 역시 조조(曹操, 155~220)와 위(魏)나라를 천하의 중심에 놓고 당시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당대의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소설이 허구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사 <삼국지>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적기에, 이러한 저자의 지적은 신선하게 느껴진다. 본문에 소개된 대표적인 역사서 <삼국지>의 왜곡 사례는 형주의 유표(劉表, 142~208)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유표 관련 기록을 비교하면, 전자는 유표를 평범하면서도 관도 전투 때 원소와 조조 사이에서 간을 본 기회주의자이자 황제 놀이를 했던 역적으로 묘사한 반면, 후자는 유표가 형주에서 선정을 베풀고 헌제를 돕고 조세를 낙양 조정에 보낸 충신으로 기록했다. <삼국지>는 유표가 먼저 헌제를 도왔다는 기록을 누락함으로써 조조만이 헌제를 도운 유일한 군벌이라고 부각시킬 수 있었다. 불쌍한 헌제를 도운 조조는 당연히 정통성을 지녔고, 이 공 때문에 조조와 조비 부자는 찬탈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16/431
역사 <삼국지>에서는 정통(正統性)의 관점에서 조조와 위진(魏晉), 지역적으로는 화북(華北)지방을 강조한다면, 소설 <삼국지>에서는 후대에 신으로 추대된 관우(關羽, ? ~ 219) 그리고 그가 속한 유비(劉備, 161~223)과 촉한(蜀漢)이 중심이다. 때문에, 실제로 동탁의 부하 화웅을 벤 손견(孫堅, 156 ?~192 ?)의 공도, 문추를 벤 이름 모를 무장의 공도 관우에게 돌리고, 관우의 무용을 과시하기 위해 오관참육(五關斬六)이라는 허구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중국에서는 자기 지역의 유명한 인물을 신처럼 떠받들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산시성 사람들은 산시성 출신 가운데 가장 유명한 관우를 제사 지냈다. 산서상인들이 부를 축적하자 다른 지역 사람들은 산서상인들이 돈을 잘 버는 이유가 관우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도나도 앞다투어 관우의 사당인 관제묘에서 제사 지내며 돈을 잘 벌게 해달라고 빌게 되었다. 이 덕에 관우는 산시성의 토착신에서 전국적인 재물신(財神)이 되었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72/431
저자는 소설과 역사서 <삼국지>에서 각각 조조와 관우를 강조하는 한계 점을 가지며 이로 으로 인해 독자들이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후한서 後漢書> <자치통감 資治通鑑>등 다른 문헌 등과 비교 고증을 바탕으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새롭게 시대를 바라본다.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이 워낙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역사서와 소설이 보여주지 않는 진실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책을 읽는다면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몰랐던 많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 이 점이 책이 갖는 장점이라 생각한다.
<역사 삼국지>는 소설 뿐아니라 역사책 또한 저자의 '독사(doxa)'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삼국지연의>에서 <정사 삼국지>로 넘어가기 전 읽으면 도움이 될 듯하다. 저자가 삼국의 지형, 정세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역사 삼국지>는 시대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를 통해 도탄에 빠진 백성과 황실을 구하는 정치적 명분 대신 폭도로 규정된 태평도와 오두미교에 쏠린 민심과 후대 화북을 능가하는 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하게 될 강남(江南) 개발의 중요성 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이 소설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지점이 되지 않을까...
손권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강남 개발이다. 당시에는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하는 것을 뜻했는데, 조조가 둔전제를 실시한 것처럼 손권도 둔전을 실시했다. 손권이 언제 둔전을 실시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어떤 학자는 203년 혹은 204년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조조의 둔전이 민둔의 비중이 큰 반면 오나라의 둔전은 군둔이 많았다(p202)... 전한과 후한 시대에는 관리들에게 돈이나 곡식을 봉록으로 주는 제도가 이미 존재했다. 따라서 손권 통치 시기 봉읍제가 실시되었다는 것은 강남 지역이 수취 체계가 잘 작동하지 않은 낙후된 지역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한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의 행정 시스템이 보다 공고해지는 손권 통치 푸기에는 봉읍이 없어지고 지방관과 무장을 열후로 봉하고 식읍을 주는 제도로 바뀐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04/431
백성들이 태평도로 몰려든 까닭은 태평도가 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안식처를 어느 정도 제공했기 때문이다. 관리들이 백성들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무소불위로 괴롭히는 데 반해 태평도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피난처를 제공햇다. 가렴주구와 무거운 세금을 견디다 못해 떠돌전 유민과 빈민들에게 장각과 태평도는 실로 '구세주'였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31/431
장로가 순순히 조조에게 항복한 것은 나름대로 정치적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조조에게 항복한 후 장로는 조조와 부하들에게 오두미교를 포교했다고 한다. 훗날 조조의 아들이 세운 위魏나라와 사마의의 손자가 세운 진晉나라 지배층 가운데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장로가 한중 일대에서 포교한 대상은 가난한 백성들이었지만 위나라에서는 지배층을 상대로 포교하면서 교리와 의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로는 전투에서 패했지만 전쟁에서 이긴 셈이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55/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