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극단적 빈곤은 남아시아와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두 지역에 심하게 집중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모든 지역 중에서도 1인당 소득이 가장 낮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이들 지역이 겪는 박탈의 본질과 내용이나 그들 각각의 빈곤에 대한 비교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빈곤을 기본적 역량의 박탈로 본다면, 이들 지역의 삶의 양상에 대한 정보를 통해 더욱 통찰력 있는 전체 상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만일 불만을 가질 이유가 있다면, 대부분의 경제학에서 불평등을 매우 좁은 영역, 즉 소득 불평등만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협소한 시각은 불평등과 평등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들을 간과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경제정책의 형성에 더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책 논쟁은 소득 빈곤과 소득 불평등을 강조함으로써 왜곡되었고, 실업이나 건강, 교육의 부족, 사회적 배제 같은 다른 변수와 관련된 박탈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대적인 삶에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거래의 기능은 그것을 지나치게 당연시함으로써 종종 간과된다. 이는 (일탈이 발생하면 그에 대해서만 관심의 초점을 두면서) 발전된 자본주의 경제에서 어떤 행동 규칙(예를 들어 기본적인 기업윤리)의 역할이 과소평가되거나 종종 무시되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들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을 때, 그들의 일반적인 존재 혹은 부재는 중대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발전에 관한 연구에서 기초적인 기업윤리의 역할은 모호하게 놔두는 대신 명확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거래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그 자체가 여러 상황에서 중요한 문제다.

사실상 불평등의 문제는 관심사를 소득 불평등에서 실질적 자유와 역량의 분배의 불평등으로 옮길 때 더 확대된다. 왜냐하면 주로 소득 불평등이 소득을 역량으로 전환시키는 기회의 불평등함과 ‘결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장 메커니즘의 자유-효율성과 자유-불평등 문제의 심각성은 동시에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불평등 문제는 특히 심각한 박탈과 빈곤을 다룰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정부의 보조와 같은 사회적 개입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잊지 않겠습니다
416가족협의회 지음, 김기성.김일우 엮음, 박재동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4월 16일, 너희가 구명조끼 입고 서로 격려하며 공포에 떨면서 구조를 기다릴 때, 이틀 동안 아무도 너희를 구하려 하지 않았단다. 너희가 자랑스러워하던 대한민국이 말이다. 아직까지 진상 규명도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구나. 너희들의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과 가족들의 분노, 아픔만 있을뿐.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88/572

4.16 세월호 9주기. 세월호의 아픔이 치유되지 않았고, 진실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로 정권이 교체되었고(물론, 세월호가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촛불혁명으로 이뤄낸 새 정부에서 가졌던 희망도 실망으로 바뀌어, 이제는 더 큰 절망속에 우리가 밀려난 듯하다.

각본대로 움직이는 정치인들이 싫고 그런 정치인들이 좌지우지하는 이런 나라도 싫은데, 사람들은 이제 너희들을 잊으라고 재촉하는 것 같구나. 처음엔 모두 우리를 위로해주며 관심을 가져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보는 시선들이 너무나 따갑고 차가워.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210/572

세월호의 비극이 정권 교체의 빌미가 되었음을 강하게 의식해서인지,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로 대처하는 공권력 앞에서 또다른 역사의 퇴보를 지켜봐야하는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제는 기억해야 하는 이들이 더 늘었지만, 분명한 것은 망각이 기억을 이겼을 때, 기억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더 커질 뿐.

이제 시간이 계속 흐를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김주열 학생의 주검이 떠오르며 4.19가 시작되었듯 해마다 4.16이 되면 아이들의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해마다 아이들과 희생자들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566/572

글의 마지막은 지난 2016년 제주도 출장 당시 제주도 앞 바다를 촬영한 사진으로 마무리한다. 여객선 바깥의 검푸른 바다는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는데, 서서히 검은 바다 속으로 잠겨야 했던 아이들과 탑승객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차디차고 컴컴한 바닷속에서 구해달라며 엄마, 아빠를 찾았을 너를 생각하면 아직도 엄마는 잠을 잘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어. 뜨거운 물에 씻을 수도 없더구나. 엄마는 너 따라가고 싶어도 아직 갈 수가 없어.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396/57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3-04-17 0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제 아침, 4.16이네 하고 마음이 가라앉았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04-17 09:45   좋아요 3 | URL
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기억해야 하는 사건이 참 많습니다...
 
러시아 지정학 아틀라스
델핀 파팽 지음, 권지현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는 막강했던 소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러시아는 지도상으로도 줄어들었고 세계 인구가 증가하는 가운데 인구 위기로도 세력이 약해졌다. 그러나 힘의 역학 관계에서는 여전히 가공할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게댜가 러시아는 새로운 무기를 내세우고 있다. 상호의존적인 세계 경제에 꼭 필요한 원자재인 에너지다. _ 델핀 파팽, <러시아 지정학 아틀라스> , p6

<러시아 지정학 아틀라스>는 2022년 2월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다른 의미에서 세계의 중심이 된 러시아의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책이다. 러시아에 대한 상세한 인포그래픽 자료가 담긴 객관적인 책이면서, 동시에 프랑스인 저자의 서구중심주의적인 관점이 드러난 주관적인 책이기도 하다.

객관적인 데이터는 신뢰성을 높여주지만, 주관적인 해석은 냉전 이후 러시아푸틴의 '옛 소련 제국의 부활'이라는 야망이 현재의 위기를 부추겼으나, 서구 세력의 견제와 기후 위기 등의 변화된 환경이 그의 야망을 저지시키고 있다는 쪽으로 흐른다. 그렇지만, 과연 러시아의 행보를 그렇게만 해석해야 할 것인가?

12세기 몽골제국, 14세기와 15세기에는 폴란드와 독일 기사단에 의해, 17세기에는 스웨덴에 의해 눌려 지내다가 17세기 이후에야 겨우 동부 유럽의 강호로 등장했고, 다시 18세기 나폴레옹, 20세기 초에는 히틀러에 의해 큰 희생을 당했던 러시아-소련의 과거를 생각해본다면, 강국과 직접적인 국경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외교정책을 단순히 팽창정책으로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에 앞서 90년대 냉전 종식 후 2000년대 초반 아프리카와 중동, 2010년대 이후 NATO의 세력 확대가 가상적국 러시아를 겨냥한 것임을 먼저 생각해본다면, 구 소련 해체 이후 조용하던 불곰을 자극한 것이 오히려 미-NATO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러시아 지정학 아틀라스>에 담긴 객관적인 자료는 분명 러시아와 그 나라가 당면한 문제를 잘 알려준다. 이와 함께 본문의 해설에는 절반의 진실과 관점이 담겨있다는 점도 함께 생각하고 읽는다면, 러시아 문제를 보다 폭넓고 깊이있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갱지 2023-04-14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토도 나토지만 조용하던 불곰을 건드리면 화를 입는 건 인지상정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제가 읽어본 책이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저런 늬앙스는 별루네요-

겨울호랑이 2023-04-15 10:40   좋아요 1 | URL
단적으로 저는 러시아, 중국을 악의 축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90년대 체제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세방세계의 태도는 일단 차치해놓더라고 하더라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자체만으로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100도씨에서 물이 끓는다면 과연 러시아가 100도까지 온도를 다 올렸던 것인가.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봤을 때 저는 <러시아 지정학 아틀라스>가 크림반도와 발트해를 통해 세력을 펼치려는 러시아 위협을 바라보는 서구의 관점과 사할린과 쿠릴열도에서 일본과 대립하는 러시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러시아의 단편을 보여주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악의 제국=러시아‘가 아닌 ‘러시아의 복합성‘과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가 그런 면에서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갱지 2023-04-15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악의 축을 한쪽으로 모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마따나 간단하게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겨울호랑이 2023-04-15 12:55   좋아요 0 | URL
어느 한 쪽의 시각이 아닌 종합적인 관점에서의 관찰과 판단이 특히 분단체제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참 어렵네요. 갱지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경제개발기 한국의 정책들은 이른바자유시장 이론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분들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면서 한국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그래서 자칭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박정희를 신봉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 박정희의 경제발전 기조엔 개발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섞여 있었다. 박정희 자신이 젊었을 때공산주의자였고…. 모든 상황에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경제학적 해결책이나 모델(예컨대 신고전학파)은 존재하지않는다. 각 사회가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맞는 경제학적 답을 찾아야 한다. - P11

한국, 특히 윤석열 정부와 그 주변의 엘리트들 사이에선 ‘경제개발을 왜 했는지‘ 자체가 의문스러워지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 같다. 1인당 GDP가 3만5000달러에 달하는 나라에서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라거나 ‘싼값으로 외국 여성을 수입해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자‘ 같은 대책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사실 한국은 저런 행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를 발전시킨 것이다. 반(半)농담처럼 말하자면, 신자유주의는 ‘선진국이 후진국처럼 되자‘라는 주장이다.  - P11

(다른 나라 진보성향 정당들과) 비슷한 흐름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너무거친 것만 좀 다듬자는 것 아닌가? 민주당 정책을 보면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총리 같은 기독민주당 좌파보다도 오른쪽이라서 진보로 부르기 쑥스럽다. 그러니까 집권해도 금방 밀려나고 만다. 시민들 입장에선 큰 긍정적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진보 정권의 실수와 부정 사례가 자꾸 노출되니 다시 표를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후임 보수 정권은 그나마 진보 정권에서 이뤄진 성과도 퇴보시켜버린다. - P13

미국은 원래 그런 나라다. 국익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어떤 일이든 한다. 패권국이 되기 전엔 자유무역을 반대했다. 링컨의 후임인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은 ‘영국이 자꾸 자유무역하자는데, 미국도 할 거다. 한 200년쯤 뒤에, 미국 경제가 영국만큼 강해지면‘이라는 취지로 연설하기도 했다. 이랬던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패권국으로 부상하면서 자유무역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 P14

결국 ‘내‘가 좋아하면 자유고, 싫으면 자유가 아니란 말이다. 누가 자유를 부르짖으면 반드시 반문해봐야 한다. 첫째, 무엇을 할 자유인가? 둘째, 누구를 위한자유인가? 정치적 자유가 있고 사회적 자유가 있고  경제적 자유가 있고 문화적 자유가 있다. 경제적 자유라도 ‘누구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자유냐‘란 문제가 따라붙는다. 자산가를 위한 자유인가 아니면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얻어맞지 않고 일하며 노조를 조직할 수 있는 자유인가?
반드시 물어봐야 한다. - P16

수산업계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일본정부의 오염수 방출을 규탄하는 집회를열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반대에 나섰다. 예정된 방출 시기가 코앞에 다가온 지금은 오히려 조용하다. ‘최악의 상황‘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반쯤은 포기한 상태다.  - P26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는 4월5일 주목할 만한 자료가 발표됐다. 국내 대표적인 경제단체에서 발표한 자료다. 대한상공회의소 임진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원장은 시민단체인 에너지전환포럼 5주년 기념 토론회에 참석해 놀라운 수치를 공개했다. 한국이 ‘저탄소 사회‘로 전환할경우 그에 따른 편익이 2100년까지 무려2347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태양광·풍력 발전, 배터리 등 신기후체제아래서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는 데 따른 편익이다. - P31

부역 혐의자란 인민군이 점령하던 시기 점령지 행정과 치안 등을 도운 주민들을 말한다. 그런데 말이 부역자이지 미처: 피란 가지 못한 채 인민군 행정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간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부역 혐의를 받았다. 또 부역자 가족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일가족이 대거 학살당한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들까지도 단순히 부역 혐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 P33

시위대만의 문제일까. 기후위기에 대한 시민들의 이중적 인식은 언론을 통해꾸준히 지적되어 왔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독일 시민들은 기후위기에 관한 높은인식을 보여줬다. 하지만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각종 정책적 금지에 대해선 반대목소리가 높았다. - P42

"나는 이렇게 (테이블 끝을 손끝으로 감싸면서) 마무리를 하면서 소리를 놓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소리가 적벽가를적벽가답지 않게 한다. 누가 들으면 잘 모를 순 있지만 내 귀에는 들린다. 이걸 뜯어 고치려면 정말 어렵고 힘들다. 근데 그게 연습이다. 뜯어 고치면서 새로운 스타일을 습득하고, 자다가 벌떡 깼을 때도 내 목이 새로 연습한 그 방식으로소리 나게 하는 것." 그러면서 그는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우아하게 소리를 연마했는지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너무 기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 P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5 - 습속, 윤리, 도덕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5
카를-하인츠 일팅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한상희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행동의 근원은 신념이며 신념만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가치판단의 대상일 수 있다는 가르침은 헬레니즘의 일반적인 도덕관 속에서도 계속된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완료된 행위여야 비로소 심판의 대상이 되지만, 신약의 율법에 따르면 행동에 이르지 않은 마음의 동요만으로도 이미 유죄판결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사람들이 타인의 인정이나 감탄을 구하기 때문에 바로 이유에서만 선을 행한다는 헬레니즘 사상의 자명한 경고와도 일치한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5 : 습속, 윤리, 도덕> , P33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25번째 주제는 습속, 윤리, 도덕(Sitte, Sittlichkeit, Moral)이다. 제목에는 3개의 단어가 소개되지만, 본문 내용은 주로 윤리, 도덕에 중점을 둔다. '윤리/도덕'의 의미가 근대 이전과 이후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것은 다른 개념어와 마찬가지이나, 언어의 의미가 자유, 평등과 같은 사상이나 국가, 조합 등과 같은 구체적 형태를 의미를 포괄하기에 여기에서는 보다 시대상의 변화가 잘 드러난다. 


 구체적으로 윤리/도덕의 의미는 서양의 역사에서 2개의 변곡점을 갖는다. 하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만남을 통해서,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서양의 역사 속에서 긍정/부정의 평가를 떠나 기독교의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것이 윤리/도덕이기에 종교사상의 변화가 언어의 사용에 그대로 남겨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구약 시대의 윤리가 '결과'에 집중하는 반면, 헬레니즘(Hellenism)을 통해 신약 시대의 윤리는 '동기'로 이전되었음을 말한다. 결과의 '좋음/나쁨'이 아닌 동기의 '선/악'으로 옮기는 관점의 변화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Hebraism)의 만남을 통해서, 선/악과 유용성의 결합은 스토아(Stoic) 철학을 통해 성공적으로 안착된다. 


 기독교에서 직접 자신의 신과 대면하고 난 후 개인은 더 이상 자신을 우선적으로 공동체적 존재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적 존재 질서를 넘어 절대적 명령권으로서 신의 의지가 도덕 규범의 타당성에 대한 근거로 인식되었고, 신의 명령의 절대적 구속력은 윤리성 Sittlichkeit의 토대로서 유용성에 대한 단순한 고려와 마찬가지로 행복 추구에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로써 키케로가 지키려고 했던 '도덕적 선 honostum'과 '예의범절 docorum', '유용함 utile'의 통일성을 깨졌고, 절대주의 시대에 합리적 법체계의 발전과 더불어 법과 도덕의 차이 또한 점점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5 : 습속, 윤리, 도덕> , P50


 이러한 개념어의 안정 상태는 종교개혁이라는 변수를 만나면서 변화하게 된다.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敎會)라는 공동체를 통한 신(神)과의 만남은 종교개혁 이후 '개인-신'과의 관계로 바뀌었으며, 이로 인해 개인윤리와 공동체 윤리의 분리가 초래되었다. 이에 대한 문제는 민족국가의 출현과 궤를 같이 한다. 개인과 공동체 윤리간의 조화. 독일 철학사에서 이 문제는 칸트와 헤겔에 의해 단계적으로 풀려간다.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을 통해 개인 윤리에 있어 보편 법칙의 정립을 이루었고,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은 <정신현상학 Phanomenologie des Geistes>에서 정(靜)적인 법칙을 동(動)적인 단계적 고양을 통해 가족으로부터 국가를 아우르는 운동을 밝혀낸다. 


 칸트가 얻은 최초의 중요한 성과는 '윤리성 Sittlichkeit' 개념이 사실들 또는 실제로 그러한 것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력 있는 규범들 또는 실제로 그러해야 하는 것과 관계되며, 이 규범들을 준수하거나 위반할 때 우리를 이끄는 의도와 관련이 있다는 통찰이었다(p66)... 그러므로 어떤 행위의 도덕적 가치나 성격은 행위자의 의도와 행위자를 그 행동으로 이끄는 규칙(원칙)이 도덕적으로 권할 만한 것인가, 즉 "도덕법칙 Sittengesetz"에 맞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5 : 습속, 윤리, 도덕> , P67


  헤겔이 "인륜성 Sittlichkeit" 이라는 제목 하에 서술한 기관들("가족, 시민사회, 국가")은 무엇보다도 특히 기독교를 통해 형성된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자의식의 조건 아래 인륜 Sittlichkeit이라는 고대적 이념의 부흥으로서, 즉 '인륜적 국가 Sittlicher Staat'로서 파악되고 해석되었다. 합리적 자연법과 이에 역사적으로 상응하는 합리적 윤리의 "추상적" 규범들이 칸트가 제시한 것처럼 혁명 후 국가의 "윤리 Sittlichketi" 안에서 지양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헤겔은 분명하게 강조한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5 : 습속, 윤리, 도덕> , P89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5 : 습속, 윤리, 도덕>은 이처럼 윤리/도덕의 개념어 역사를 기독교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시키면서, 19세기 칸트/헤겔에 의해 관념론적인 완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독교 사상의 종말을 외친 한 사상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를 소개하며, 칸트/헤겔에 의해 완성된 기독교적 윤리와 이에 대한 도전으로 본문을 마무리한다. 그 사이 토마스 아퀴나스, 펠라기우스, 둔스 스코투스에 대한 설명은 서양 윤리사상사의 큰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만, 얇은 페이지에 많은 내용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다보니 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니체는 그의 말년의 저작들에서 인간적이고 기독교적인 미덕들인 '유럽적인 도덕 die europaiische Moral'을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의 결과로 파악했다. 이 노예 반란을 통해서 유대인은 "가치의 전도라는 저 기적과 같은 작품을 완성했고, 그 덕분에 지상에서의 삶은 몇 천 년동안 새롭고 위험한 자극이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5 : 습속, 윤리, 도덕> , P119


도의적인 sittlich(도덕적으로 훌륭한, 의로운 honestum) 것은 사회로부터 칭찬받지 않을 때조차도 명예로운 것이다. 누구로부터 칭찬받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당연히 칭찬할 가치가 있다." "유명하지는 않을지라도 명예로울 수 있으며, 아무도 칭찬하지 않더라도 칭찬할 말한 것일 수 있다. "도의 Sittelichkeit"와 "유용성" 간의 갈등은 일찍이 키케로가 유용성에 대한 고려보다 도덕적인 의무가 앞선다는 규범을 인정하면서 해결되었고, 다른 한편 규범적인 기본질서는 자기보존과 안녕을 위한 자연스러운 노력에 모순되지 안혹 오히려 부합하며, 그런 까닭에 "자연스러운" 것임을 확인하는 가운데 해결되었다. - P30

칸트가 개인의 도덕성으로 표현했던 의지의 입장 Willenshaltung은 헤겔이 ‘인륜성 Sittlichkeit‘으로 이해하려 한 "삶의 공동체 eine Gemeinsmakeit des Lebens"를 원칙적으로 부인한다. 여기서 그는 우선 "도덕성"을 "인륜성 Sittlichkeit"의 변질된 형태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예나 Jena 시대 말기에 헤겔은 그리스 민족의 삶이 갖는 원래의 "도덕적 sittlich" 통일성을 파괴시킨 개인 자의식의 역사적 발전을 더 이상 변질이 아닌 인간적 자기 이해의 보다 높은 단계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이 같은 전제조건에 의문을 제기했다. - P87

헤겔의 ‘인륜성 Sittlichkeit‘ 개념은 한 공동체가 지탱되고 그 공동체의 기관들에서 표명되는 신념으로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 결과 공동체 안에서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고 후원하는 모든 것을 ‘인륜적 Sittlich‘인 것으로 칭하고, 그런 공동체의 삶을 파괴하는 모든 것을 ‘비인륜적 unsittlich‘인 것으로 부르게 되었다. - P100

근본적으로 모든 교육의 최고 목표는 더 고급한 문명과 정신문화라는 전제하에서 그는 이 목표로 이끄는 모든 것을 "인륜적인 Sittlich 무엇"으로 간주한다.... 사회적 진보라는 이상적 개념은 인륜성 Sittlichkeit 이념과 결합하여 슈타인에게서 보듯 보편적이고 문화적인 진보의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 P11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23-04-13 1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코젤렉의 개념사가 25권까지 나왔군요! 전 9권까지 모았는데요..ㅎㅎ

겨울호랑이 2023-04-13 17:45   좋아요 1 | URL
네, 한동안 번역이 정체되었다가 몇 년 전부터 밀린 번역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덕분에 진도를 따라가느라 행복한 바쁨을 느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