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들은 평화 회담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1919년 5월 7일 독일 대표단에게 전달된 베르사유 조약의 최종안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독일은 영토의 14퍼센트를 내주어야 했고, 그로 인해 인구의 10퍼센트와 철광석 절반, 석탄 매장량의 4분의 1을 내주어야 했다. 또한 모든 해외 식민지를  포기해야 했으며, 해외에 투자한 자금과 특권을 모두 잃게 되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전쟁 배상금에 대한 요구였다. 10년 동안 그들은 석탄 생산량의 60퍼센트, 상선 90퍼센트, 거의 대부분의 기차 내연 기관, 철도 차량, 젖소 절반, 화학 제품과 의약품 4분의 1 가량도 양도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독일 군대는 육군 1만 명과 해군 1만 5,000명으로 제한되었으며 탱크와 비행기, 잠수함과 독가스 보유가 금지되었다.(p270) <케임브리지 독일사> 中


 <평화의 경제적 결과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에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 ~ 1946)은  제1차 세계대전 종식을 위해 열린 파리평화회의와 그 결과로 만들어진 평화조약(베르사유조약)을 비판하였다. 능력을 넘는 과도한 전쟁 배상금과 승전국의 요구 속에서 저자는 이미 다른 세계 대전의 불씨를 예견하였다.

 

 독일을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서부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 채택되고 거기에 미국의 재정적 지원이 더해진다면, 하늘은 유럽인 모두를 도울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서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교묘하게 중부 유럽을 빈곤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잡는다면, 감히 예견하건대, 머지않아 복수전이 펼쳐질 것이다.(p246)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약속을 존중하고 정의를 충족시키는 것이 파리평화회의의 임무였다. 그러나 삶을 재구축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임무는 승자의 아량이라는 원칙에 따라 필요한 것 못지않게 유럽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다.(p36)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파리평화회의는 세계대전 후 유럽의 재건을 위해 당사국 모두가 '관용(寬容)'의 자세로 임할 필요가 있었지만, 현실을 그렇지 못했다. 베르사유 조약이 패자에게 특히 가혹했던 조약이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서 베르사유 조약은 강력한 이웃을 가지지 않으려는 프랑스 클레망소(Georges Benjamin Clemenceau, 1841 ~ 1929)의 경계심과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 ~ 1924)의 무능력 그리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 ~ 1945)의 욕망이 결합된 결과로 분석한다.


 프랑스 정책의 솔직한 목적, 즉 독일 인구를 제한하고 독일 경제 체계를 악화시키는 것이 윌슨 대통령을 위해 자유와 국제적 평등이라는 장엄한 언어로 포장되었다.(p65)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협상의 다른 측면은 차치하더라도, 독일로부터 일반적인 전쟁 비용을 받아내겠다는 약속을 선거운동에 활용한 것은 영국 정치인들이 언젠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정치적 무모함의 극치를 보여준 행위라고 나는 믿는다.(p143)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각국의 정치인들이 자신의 나라와 개인을 위해 패전국에 강요한 조약의 결과는 가혹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평화조약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었기에 한편에서는 극우 파시즘(Fascism)이, 다른 한편에서는 극좌 공산주의(Communism)가 집권하는 계기를 주게 되었다.


 경제적 박탈은 아주 쉽게 일어나며, 사람들이 그런 박탈을 인내하는 한, 바깥 세계는 그 문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육체적 능률과 질병에 대한 저항력은 서서히 약화된다. 그러나 삶은 어쨌든 계속된다. 그러다 결국엔 인내의 한계에 닿게 될 것이고, 절망과 광기의 구호가 무력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선동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분발하여 일어나고, 인습의 끈들은 풀리게 된다. 그것이 곧 위기이다... 파리에서는 평화조약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못하고 또 희망을 걸만한 것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인내할 것인지, 또 사람들이 불행을 피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인지 누가 알 수 있을까?(p229)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저자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서 '관용'에 입각한 전후 처리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성(理性)보다는 감정(感情)이 지배한 평화회의장의 모습 속에서도우리는 계몽시대(Enlightenment)의 종언을 확인할 수 있다. 더이상 볼테르(Voltaire, 1694 ~ 1778)의 주장을 귀담아 듣는 이는 없었다.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연약한 존재이므로 서로를 도우시오. 당신들은 무지하므로 서로를 가르치고 용인하시오. 만약 당신들 모두가 같은 의견이고 단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이라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여러분 각자가 책임이 있기 때문이오... 당신들 인간들이 걸핏하면 벌이는 잔인한 전쟁 한 복판에서도 나 자연만이 당신들을 결합시킬 수 있소. 나는 당신들 인간에게 땅을 경작할 팔을 그리고 자신을 인도해 줄 한 줌의 이성(reason)을 주었소. 이 싹을 꺽거나 썩히지 마시오.(p178) <관용론> 中


 이러한 암울한 당대 현실 속에서 케인즈는 절망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비록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시대 흐름 속에서 그는 '교육'과 '상상력'의 역할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 했다. 


 유럽이 파산과 쇠퇴를 겪도록 내버려둔다면, 그 상태는 장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다행한 것이 한 가지 있다. 지금 나아가고 있는 길을 재점검토하고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볼 시간은 아직 있는 것이다. 미래를 좌우할 사건들이 지금 전개되고 있고, 유럽의 운명은 더 이상 몇몇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일어날 사건들은 정치인들의 교묘한 술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역사의 표면 아래에서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숨겨진 물결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이 숨겨진 물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이다. 그 방법은 의견을 변화시킬 교육과 상상력의 힘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진실을 굳게 믿고, 망상을 깨뜨리고, 증오를 불식시키고, 사람들의 가슴과 마음을 활짝 열고 또 확장시켜야만 숨겨진 물결의 방향을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p270)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그리고, 이러한 그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장기균형보다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지출을 강조한 그의 경제학 이론과 통하는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But this long run is a misleading guide to current affairs.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장기(長期)는 현재 사안에 대해 잘못된 안내를 해준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화폐개혁론> 中 [출처 : 위키백과]


 국가는 부분적으로는 과세를 통하여, 부분적으로는 이자율을 정함으로써,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아마도 다른 방법을 통하여 소비성향(消費性向)에 대해 지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자율에 대한 은행정책의 영향력이 그 자체로서 최적투자율(最適投資率)을 결정하기에 충분하리라는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나는 상당히 광범위한 투자(投資)의 사회화(社會化)가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를 확보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리라고 생각한다.(p455)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中


 저자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의 본문을 각국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통계자료를 활용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들은 대신 '전쟁의 경제적 결과'가 '피'임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비극이라 할 것이다.


 2019년 2월 28일.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별다른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한 채 끝낸 후 글을 쓰기 시작해서, 2019년 3월 1일 3.1운동 100주년 기념일 새벽까지 글을 쓰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300년 전 3.1 운동을 불러온 베르사유 조약이 가져온 평화와 지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평화의 결과는 무엇이 될 것인지 되물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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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3-01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극소수의 사람들이나 겨우 예상할 수 있었던 ‘결렬 시나리오‘가 막상 눈 앞의 현실이 되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들을 해 보게 됩니다. 우선,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개념 자체가 2차 북미회담 직전까지도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북한 비핵화‘에 대한 어려움을 극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우리 정부의 무분별할 정도로 지나친 낙관론을 이제는 좀 더 냉철히 되돌아볼 때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트럼프의 말대로, 결국 ‘비핵화는 핵을 없애자는 것‘인데, 지금까지의 북한의 태도로 봐서는 ‘비핵화를 구실로 내세워 결국 UN의 제제 완화만 얻어내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비핵화를 하자는 것인지, 핵무기 체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풍계리 핵실험장,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 영변의 핵시설 폐기 등을 잘게 썰어서 ‘핵 장사‘를 하자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까요.(이번 회담이 결렬되고 나서야 마침내 이런 측면들이 비로소 극명하게 부각된 게 이번 회담의 진정한 소득이라면 소득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더군요. 아무튼 북한 비핵화는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만 가까스로 도달 가능한 매우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한 듯합니다. 여의도의 세 배나 되는 면적에 400여개나 되는 건물로 둘러싸인 영변 핵시설만 해도 끔찍한데, 그거 말고도 굉장히 규모가 큰 핵시설이 또 있다고 하니 정말 소름이 끼치더군요.)

겨울호랑이 2019-03-01 18:22   좋아요 1 | URL
oren님 말씀처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갈 길이 참 멀어 보입니다. 저는 회담의 결렬 원인에 대해서 Oren님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합니다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한반도의 평화, 세계의 평화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서로 다른 북한과 미국의 기자 회견 내용을 접하면 혼란스럽기도 합니다만, 어제의 협상 결렬이 평화로 가는 과정이라는 점으로 위안을 삼아 봅니다...

2019-03-02 1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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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2 15: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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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7: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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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8: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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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1987년 6월 13일 밤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출처 : 연합뉴스]

얼마 전 고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년을 보내며, 진정으로 가슴 아픈 일은 한 어른과의 이별이 아니라, 그 어른이 가신 빈 자리를 아직까지도 채우지 못한 한국천주교회의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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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4 07: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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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4 07: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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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4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정 시대의 어른이라 부를 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에 비하면 종로에 등장하시는 분
들은 정말... 부끄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2-24 19:21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2009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원로이신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 스님, 김대중 대통령 님 등 여러 분이 계셨고, 친근한 아버지 같은 노무현 대통령도 계셨는데, 한 해 동안 모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분들의 빈 자리가 아직까지 크게 느껴지네요...

2019-02-25 2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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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5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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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5 23: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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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6 0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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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2 1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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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2 15: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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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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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의 <수리철학의 기초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는 제목 그대로 화이트 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 ~ 1947)와 함께 만든 <수학 원리 Principia Mathematica> 입문서다. 수학을 기호논리학을 통해 재구성한 <수학 원리>처럼 이 책은 주로 집합론(集合論, set theory)과 논리학을 연계하여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이 페이퍼에서는 이를 알아보려 한다. 러셀의 주장을 들어보기 전 우리는 먼저 다른 수학자를 만나야 하는데, 그는 바로 칸토어(Georg Ferdinand Ludwig Philipp Cantor, 1845 ~ 1918)다.  

 

 칸토어는 두 집합 A와 B사이에 전단사함수(bijection)가 존재하면 그들의 크기, 즉 "기수(cardinality)가 같다"라고 정의했다. 이는 A의 원소와 B의 원소 사이에 일대일대응(one-to-one correspondence)이 있다는 뜻이다. 만일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존재하지 않고 A와 B의 부분집합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있으면 'A는 B보다 기수가 작다'라고 한다. 결국 칸토어가 보인 것은 모든 대수적 수의 집합의 기수가 모든 실수의집합의 기수보다 작다는 것이었다.(p1013)... 칸토어는 각각의 닫힌 집합(closed set)에 대해 Xα = Xα+1을  만족하는 가산 순서수 α가 있음을 증명했다.(p1013) <The Princeton companion to Mathematics 1> 中


 집합론에 선구적인 업적을 쌓은 칸토어의 업적은 '적어도 둘 이상의 다른 종류의 무한 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사실과 '초한기수'의 도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연수 [0,1] 사이에 있는 소수의 개수와 { 1,2,3,4....n,,,}과 같은 집합은 둘 다 무한 집합이다. 이처럼 무한 집합은 무수히 많이 정의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지만, '초한기수 transfinite cardinal number'라는 개념을 알기는 쉽지 않다. 이에 대해 저자의 설명을 보자.


 

귀납적 수와 이 새로운 수 사이에서 가장 뚜렷하고 놀라운 차이점은 이 새로운 수에 1을 더하거나 1을 뻬거나, 또는 2배를 하거나 반분하거나, 혹은 그것에 그 수를 반드시 크거나 작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연산을 해도 그 수가 변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1을 더하여도 변치 않는 점을 칸토어가 '초한기수 transfinite cardinal number'라 부르는 수를 정의하는 데 이용하였다.(p90)... 어떤 집합이 1을 더하여도 변하지 않는 수를 갖는다는 것은, 그 집합에 포함되지 않는 하나의 항 x를 들었을 때 정의역이 그 집합이고, 역정의역이 그 집합에 x를 더한 것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1대1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p91) <수리 철학의 기초> 中


 정의역이 그 집합이고, 역정의역이 그것보다 꼭 한 항이 작은 집합으로 이루어진 1대1인 관계가 있다. 바로 이 같은 것이 성립하는 경우와 겉보기는 더 일반적인 것같이 보이는 "'한 부분(전체가 아닌)'과 '전체' 사이에 1대1 관계가 주어진다"는 경우가 내용상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같은 대응이 성립할 경우, 우리는 그 대응을 만드는 매개자는 전체를 그것의 한 부분에 '반사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같은 집합을 '반사적 집합'이라 부른다. 즉 반사적 집합 reflexive class이란 자신과 자신의 진부분 집합이 대등한 집합을 뜻하며, 반사적 기수 reflexive number라 함은 반사적 집합의 기수를 말한다.(p91) <수리 철학의 기초> 中


  그렇다면, 칸토어의 주장처럼 Xα = Xα+1을  만족하는 가산 순서수 α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진부분집합이 대등한 반사적 집합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러셀의 반론이 유명한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이다.


 "최대기수에 관한 모순 contradiction of the greatest cardinal"에서도 논리형에 관한 이론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개체, 개체의 집합, 집합의 집합 등을 모두 하나로 묶으면 그것의 부분집합은 자신의 원소가 된다. 어떤 것이든 셀 수 있는 것은 모두 한데 묶어 하나의 집합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그 집합이 최대의 기수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그 집합의 부분집합은 모두 원래 집합의 원소이므로 그것의 부분집합의 수는 그들 집합의 원소의 수보다 크지 않다. 이는 하나의 모순이다... 모든 것을 한 묶음으로 한 매우 큰 집합은 자기 자신도 원소로 포함한다. 즉 '모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자신 역시 그 '모든 것' 중의 하나이므로, 그 '모든 것'의 집합의 원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서는 집합이 그 자신의 원소가 아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집합, 즉 인류라는 것은 절대로 그것의 원소 어떤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다.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집합 전체를 생각하자. 틀림없이 이는 한 집합이다. 그러나 이 집합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는가? (p156) <수리 철학의 기초> 中

 

 당시 칸토어를 좌절시킨 이러한 러셀의 공격이었지만, 현대 수학에서는 칸토어의 초한기수나 러셀의 역설 모두를 집합론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만 간단히 참고하도록 하고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 보자. (칸토어와 러셀의 이야기는 만화 <로지코믹스>에서도 쉽고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순서수이다'라는 성질을 생각해보자. 만약 이 성질로 결정된 집합은 모든 순서수의집합이 될것이다. 하지만 잠시 숙고해보면 이 집합은 정렬집합으로서 모든 순서수보다 더 큰 순서수에 대응되어 모순이므로 존재될 수 없다. 비슷한 논리로 '자기자신을 원소로 가지지 않는 성질'도 집합을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A가 그러한 집합일 때 A가 A의 원소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A가 A의 원소가 아니라는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에 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의 모임이 어떤 한 성질에 의해 결정되더라도 이 모임을 항상 집합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p1018) <The Princeton companion to Mathematics 1> 中


  <수리철학의 기초>는 초중반에 칸토어의 집합론에 대해 논박을 가하지만, 후반부에는 공격방향을 살짝 돌리는데, 그 대상은 바로 플라톤(Platon, BC 424 ~ BC 348)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의 일절에 다음과 같은 논법이 있다.  만일 1과 같은 하나의 수가 있다면 그 수 1이 존재를 가지게 된다. 또한 그 수와 존재가 같은 것이 아니므로 1과 존재는 둘이 된다. 따라서 수 2가 된다. 이 2와 1의 존재를 합하면 3개의 원소를 갖는 집합이 된다. 이 같은 방법으로 이 논법을 끝없이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라는 말은 어떤 정해진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고, 존재에 일정한 의미를 주었다 해도 수는 존재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이 논법은 잘못이다.(p158) <수리 철학의 기초> 中


 <수리 철학의 기초>의 마지막 부분에서 플라톤의 '존재' 증명 방식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저자는 기술(description)에 대한 논의를 잠시 언급하고 책을 마무리한다.  


 대체로 다음 두 가지를 비교해야 한다. 즉 (1) 이름, 이는 단순한 기호이고 그 기호가 의미하는 개체를 직접 가리킨다. 그리고 다른 낱말의 의미와는 완전히 독립해서 오직 그 자신의 권리에서 그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기술, 이는 미리 뜻이 정해진 몇 개의 낱말로 구성되며, 그 기술의 의미에 의해 생각되는 것은 모두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낱말의 의미에서 도출되는 것이다.(p202) <수리 철학의 기초> 中


 여기까지 읽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이게 무슨 플라톤 비판이야?' 책을 보다 즐기기 위해 우리는 두 권의 책을 곁들어 읽을 필요가 있다. 러셀의 <서양 철학사>와 <철학의 문제들>이 두 권의 책인데, 해당 책들에서 '기술'과 관련한 부분을 옮겨본다.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가령 외국어로 번역될 잘 모르지만 어쨌든 실제의 언어가 매개물이 되고, 언어 자신이 그 부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름이 단지 이름으로만 쓰였다면 "스콧은 바로 그 월터이다"라는 명제도 "스콧은 스콧이다"라는 명제와 마찬가지로 자명한 사실을 공연히 반복해 표현하는 것이 된다.(p203) <수리 철학의 기초> 中


 기술 이론에 따르면 '존재'는 기술 어구를 통해서만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웨이벌리>의 그 저자는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지만, "스콧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틀린 어법, 아닌 틀린 구문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시작된, '실존 existence'을 둘러싸고 2000년 동안 지속된 지리멸렬한 수수께끼가 풀린다.(p1033) <서양철학사> 中


 저자에 따르면 '스콧'이라는 존재는 소설가, <웨이벌리>의 작가, 영국인 등등 그를 설명하는 많은 기술 어구에 의해 설명된다. 때문에, "스콧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정의역과 역정의역이 '기술함수'에 의해 맺어진 관계로 분석되고, 이는 "황금산이 존재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제의 참거짓을 판단할 수 없는 명제가 된다. 반면, "<웨이벌리>의 그 저자는 존재한다"의 명제는 정의역과 역정의역이 명제함수에 의해 맺어진 참,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명제가 된다.


 

복합체가 요소들이 아니라면 복합체는 요소들을 제 자신의 부분들로 가지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복합체가 요소들과 동일한 것이라면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거나 할 게 필연적이지 않나?... 사태가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복합체를 요소들과 다른 것으로 놓았던 것 아니겠나?... 다음은 어떤까? 요소들이 복합체의 부분들이 아니라면 자넨, 복합체의 부분들이지만 그러면서도 복합체의 요소들이 아닌 그런 어떤 것들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럼 테아이테토스, 전적으로 이렇게 될 걸세. 즉 지금의 논의에 따르면 복합체는 부분으로 나뉠 수 없는 어떤 단일한 형상일 걸세.(205b) <테아이테토스> 中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복합체는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단일한 형상이라고 말한다. 이는 정의역과 역정의역이 1:1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지만, 러셀에 따르면 이들은 '스콧은 존재한다'라는 틀린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복합체의 존재성은 기술에 의해 설명되기에, 결코 단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러셀이 <수리철학의 기초> 나아가 <수학의 원리>를 통해 말하고 싶은 바는 무엇이었을까. 러셀과 화이트 헤드는 <수학의 원리>를 통해 모호한 언어 대신 수학의 질서를 통해 우리의 인식을 보다 명료하게 가져가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다음의 구절을 마지막으로 수리 철학과 관련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기술구들을 가진 명제들의 분석에서 기본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오성에 의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명제는 우리가 직접 대면에 의해 인식한 요소들로 전부 구성되어야만 한다."(p97)... 기술구에 의한 간접적인 인식의 일차적인 중요성은 이러한 인식 방법이 우리의 사밀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해준다는 데 있다. 우리가 직접 대면하여 경험할 수 있는 용어들로만 전부 구성된 진리들은 우리가 직접 인식할 수 있다 해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사물들에 관해서는 기술구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98) <철학의 문제들> 中


 PS. 이로써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1장 집합 부분만 열심히 공부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집합은 쉬운 분야'라는 30년 동안 지속된 근거없는 내 자신감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나는 집합을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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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9-02-23 0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학의 정석> 1장 집합. 집합이 이렇게 아름답고 심오한 학문이라니..
요즘 수학의 정석을 다시 풀고싶은 생각이 들어요. 수학의 논리적 아름다움을 느끼며..
근데 사실 고등학생때는 수학과 안 친했습니다 ㅋ

겨울호랑이 2019-02-23 00:45   좋아요 1 | URL
^^:)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같다면님과 같지 않을까요? 성적의 부담이 없다면 생각보다 수학이 재밌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입니다.나와같다면님 평안한 주말 밤 되세요!

2019-02-23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3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2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2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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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다르네스여, 그대는 상황을 잘 몰라서 우리에게 그런 조언을 하시는 것이오. 그대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그런 조언을 하시니 말이오. 그대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도, 자유가 무엇인지는 전혀 경험해보지 않아 그것이 달콤한지 아닌지 모르신단 말이오. 그대가 자유를 경험했더라면 우리에게 창 뿐 아니라 도끼를 들고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조언했을 것이오. <역사 제7권 135> 中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5 ~ BC 425)가 그의 저서<역사 Histories apodexis>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페르시아 전제정으로부터 그리스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한 이후, 후세 서양사가들은 이러한 구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이 역사를 바라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이 형성되었다고 해석하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이오니아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이민족'이라 불렀다... 마라톤 전투는 아태네 뿐만 아니라 전 그리스에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주었다. 강대국에 대한 굴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이후에도 누차 강조하게 되겠지만 대왕의 군대도 격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거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자유는 끝내 지켜질 것이었다.(p339) <페르시아 전쟁> 中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여 정복하려 한 과정은, 크세르크세스가 잡동사니 테러국이라 칭한 나라들의 독립을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어쩌면 외국인 왕의 백성이 되어 아테네 고유의 민주주의 문화를 발전시킬 기회를 영영 갖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스 문명의 특징이 된 여러 가지 요소들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마터면 서구는 독립과 생존을 위해서 싸운 최초의 전쟁에서 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구 the West'라는 실체 자체를 탄생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p34) <페르시아 전쟁> 中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가의 설명과는 달리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도 심지어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 ~ BC 404)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크세토폰(Xenophon, BC 431 ~ BC354)의 <헬레니카 Hellenika>에서는 페르시아를 동맹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는 테바이와 아테나이의 모습이, <페르시아 원정기 Anabasis>에서는 페르시아 용병으로 고생하며 퇴각하는 그리스 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서구(Europe)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 없게 들린다.

 

"전우들이여, 내가 지금 상황에 괴로워하더라도 여러분은 놀라지 마시오. 퀴로스는 내 친구가 되어, 조국에서 추방당한 나의 명예를 여러 가지 다른 점에서도 높여주었을 뿐더러 내게 1만 다레이코스를 주었소. 그리고 나는 그 돈을 받아 내 개인 용도를 위해 빼돌리거나 탕진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썼소.<페르시아 원정기 제1권 제3장 (3)> 中


 테바이인들은 어떻게 하면 헬라스의 패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만일 페르시아 왕에게 사신을 보내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알고 아테나이도 티마고라스와 레온을 파견했다... 조약 내용이 알려지자, 레온은 왕이 듣는 데서 "맙소사, 이제 아테나이 인은 왕 대신 다른 우방을 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소"하고 말했다. <헬레니카 제7권 1:33 - 37> 中


 그렇다면, 당대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이스퀼로스(Aeschylos, BC 525 ~ BC 456)의 <페르시아인들 Persai>에서는 다리오스의 입을 빌려 살라미스 전쟁의 패배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이스퀼로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패배는 휘브리스(hybris 오만)의 결과로 해석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일단 교만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

 그대들은 이런 과오들과 이에 대한 벌을 보고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기억하고, 차후에는 누구도

 자신의 현재 분복(分福)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다가

 자신의 큰 복마저 엎지르지 않게 하시오. (820 ~ 827) <페르시아 인들> 中


 <페르시아인들> 속에서 페르시아 왕은'세계정복'을 꿈꾸는 야망가의 모습이 아닌 단순히 '막대한 부'를 원하는 탐욕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페르시아인들> 속에서 당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침략이 탐욕에 의해 일어난 결과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인들의 인식 속에서 '페르시아 전쟁'은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부(富)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자유민주정 VS 전제정'의 구도로 이 전쟁을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이제는 <페르시아 전쟁>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이 전쟁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더라도, 이 전쟁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미의 실마리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322)의 <정치학 Politika>을 통해 그리스 폴리스(Polis)를 살았던 여성과 노예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헬라(Hella) 공동체는 결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여성임과 노예임은 자연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런데 비(非)헬라스 사람들에게서는 여성과 노예가 동일한 지위를 가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연적으로 지배하는 어떤 것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공동체는 남성 노예와 여성 노예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시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헬라스인들이 비헬라스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주 그럴듯하다 <정치학 제1권 5 - 9>中


 페르시아는 전제 군주정으로서 1인 군주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평등(平等  Equality)한 사회였다. 그렇다면, 오히려 페르시아 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자유와 평등'의 대결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유'를 이데올로기로 내세운 집단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에서, '자유'는 전체의 자유가 아닌 소수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면에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 하다. 즉, 오늘날 소수 글로벌 대자본에 의한 체제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  neoliberalism)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해석은 어떨까. 


 톰 홀랜드(Tom Holland)의 <페르시아 전쟁 Persian Fire>를 훒어보다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두서없이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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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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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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