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 MIT 경제학자들이 밝혀낸 빈곤의 비밀
아비지트 배너지.에스테르 뒤플로 지음, 이순희 옮김 / 생각연구소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경제가 성장하려면 인력과 지식이 필요하다고 볼 때,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교육받고 영향을 섭취하며 건강을 유지한다면 작은 불꽃이 큰불로 번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의 안정과 더불어 자신감이 생겨 자녀에게 투자하도록 새로운 일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때도 마찬가지다. 당연한 얘기지만 불꽃이 튀기 전까지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p357)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개선할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 첫째, 우리는 정보를 제공하되 사람들이 미처 모르고 있던 것을 알려주어야 하며, 간단하고 흥미를 유발하는 방식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이 제공해야 한다.(p359)

둘째 디폴트 옵션의 힘과 주의를 환기시키는 넛지를 이용해 가능한 쉽게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생활을 크게 개선시킬 수 있다.(p360)

셋째, 가난한 사람들을 아예 외면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장이 있거나 아직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경우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여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시장을 지원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정부가 직접 그 서비스를 지원해야 한다.(p361)

넷째, 기존의 사회 및 정치 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정부 운영 방식과 정책을 개선하여 사소한 혁명을 달성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작은 혁명은 자기충족적 예언으로 전환되어 성공은 또 다른 성공을 낳게 된다.(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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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1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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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1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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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 07: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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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 08: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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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이야기 3- 이야기된 시간
폴 리쾨르 지음, 김한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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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이야기 2- 허구 이야기에서의 형상화
폴 리쾨르 지음, 김한식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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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이야기 1- 줄거리와 역사 이야기
폴 리쾨르 지음, 김한식 이경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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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이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매번 정신은 스스로를 넘어서는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심각한 불안감을 느낀다. 정신이라는 탐색자는 자기 지식이 아무 소용없는 어두운 고장에서 찾아야만 한다. 찾는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창조해야 한다.(p8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찾기 Recherche'에서 본질적인 것은 마들렌 과자나 포석들(鋪石) 안에 있지 않다. 한편으로 '찾기'는 단순히 추억해 내고자 하는 노력, 기억에 대한 탐색이 아니다. '찾기'는 '진리 verite 찾기'라는 표현에서처럼 그 말이 지닌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른 한편 잃어버린 시간 le temps perdu은 단지 지나간 시간 le temps passe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리는 (낭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억이 찾기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수단은 아니다.(p20)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Proust et les signes>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내용을 '진리 찾기'로 규정한다. 그렇지만, 진리는 결코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들뢰즈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기호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기호의 폭력이 난무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진리는 결코 미리 전제된 선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사유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결과이다. - 이것만큼 프루스트가 강조한 테마는 거의 없다. 명시적이고 규약적인 의미는 결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외현적(外現的)인 기호가 감싸고 있고 그 기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런 의미 sens 만이 오로지 근본적이다... 마주침의 [속성인] 우연과 강요의 [속성인] 압력을 프루스트의 두 가지 근본적인 테마이다. 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p41)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그렇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진리를 찾는 이는 누구인가? 들뢰즈는 사랑에 빠졌지만, 애인(알베르틴)의 거짓말로 고통받는 이가 진리를 찾는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사교장, 공연장 등에서 수많은 기호들의 압력을 받으며 진리 찾기를 강요받는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슬펐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았고, 나 이상으로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관대한 그녀는,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날 떠난다면 내가 더 이상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질투를 느낀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믿었다.(p35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中 


 <누가> 진실을 찾는가? 그리고 <나는 진실을 원한다>라고 할 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루스트는 인간이란, 설령 순수하다고 가정된 정신이라 할지라도,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우리가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가는 어던 폭력을 겪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 누가 진실을 찾는가? 바로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어떤 기호의 폭력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친화성 affinite이나 [진리를 인식하고자 하는 인식 주체의 자발적인] 선(善) 의지를 통해서 찾게 되는게 아니다. 진실은 비자발적인 기호들로부터 <누설되는 것이다>(p40)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내 소년 시절을 통해 메제글리즈가 이미 더 이상 콩브레 토양과는 닮지 않은 땅의 기복 탓에 멀리 가면 갈수록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평선처럼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면, 게르망트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 '길'의 종점과도 같은, 적도나 극지방, 혹은 동양처럼 일종의 추상적이고 지리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그 두 길을 서로 다른 두 실체로 간주하며 오로지 정신적인 창조물에만 속하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했다.(p238)... 나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깊은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p31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진리 찾기라고 규정한다면, 이는 기호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실적인 메제글리즈와 관념적인 게르망트. 이들은 배움의 두 측면이며, 주인공(혹은 화자)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배움을 펼친다는 것이 들뢰즈의 해석이다. 그리고, 진리 찾기의 방향은 미래로 향한다.


 이 책은 어떤 배움 apprentissage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는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다. 메제글리즈 Meseglise 쪽과 게르망트 Guermantes 쪽은 추억의 원천들이라기보다는 배움의 원료들이자 배움의 선(線)들이다. 그것은 수련 formation의 두 측면이다.(p22)... 이 배움은 배움의 목적들과 원리들을 통해서 [수단인] 기억을 넘어선다. '찾기'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放出 emettre)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p23)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 삶의 수많은 작은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나란히 보내는 여러 다양한 삶 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많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지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이 삶은 우리 안에 서서히 진행되어, 우리를 위해 의미와 양상을 변화시켜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진리 발견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고,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채로 준비해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 눈에 보이게 된 날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p31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또한, 들뢰즈는 기호들의 세계에서 궁극적인 기호인 예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작가를 지망하는 주인공에게는 문학이 궁극적인 기호로 작용하며, 예술을 통해서만 진리는 비로소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예술의 세계는 기호들의 궁극적인 세계이다. 예술의 세계에서의 기호들은 <물질성을 벗은>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예술의 세계에서 기호들의 의미를 깨달은] 그때부터,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는 [먼저 거쳐 온] 다른 모든 세계들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감각적 기호들에 대해서 그렇다.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들은 감각적 기호들을 자기의 일부로 편입한다.(p37)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기호와 의미의 진정한 통일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본질이다. 그리고 기호가 자신을 방출하는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기호를 구성한다. 또 의미를 파악하는 주체에게로 의미가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의미를 구성한다. 배움의 과정에서 최종적 결론 혹은 최종적으로 깨닫게 되는 계시가 바로 본질이다.... 오로지 예술의 층위에서만 본질은 드러난다.(p68)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내 의식은, 내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열망에서부터 저기 정원 끝 내 눈앞 지평선 너머 보이는 곳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스크린에서 우선 내게 가장 내밀하게 느껴진 것,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지배하던 손잡이는, 바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철학적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었다.(p15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그렇다면, 시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진실은 시간안에서 우리에게 인식되기에, 시간을 빼놓을 수 없다. 들뢰즈의 네 가지 시간 구조는 각각의 진실을 가지고 있으며, 주인공은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부르는 헛되이 보내버린 시간의 의미를 찾는 것. 예술을 통한 절대적인 시간의 획득. 이것을 들뢰즈는 배움의 성과로 해석한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해독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기호  그 자체의 전개와 섞여 버린다. 바로 이 때문에 '찾기'는 항상 시간에 관계하며, 진실은 항상 시간의 진실이다... 이 점에서 중요한 구별은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의 구별이다. 되찾은 시간의 진실 못지 않게 잃어버린 시간의 진실도 있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는 각기 저마다의 고유한 진실을 가지고 있는, 시간의 네 구조를 구별하는 것이 적절하다.(p42)... 헛되이 보내 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p47)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우리가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그뿐 아니라 되찾는 시간과 되찾은 시간 등의 시간선들이 있다. 각각의 종류의 기호들은 확실히 [각각에 있어서] 특권적인 어떤 시간선에 상응한다. 사고계의 기호들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함축한다. 또 사랑의 기호는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감싸고 있다. 감각적 기호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되찾게 해주며, 그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마지막으로 에술의 기호는 우리에게 되찾은 시간을 준다. 이 되찾은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들을 포함하는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이다.(p51)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시간이란 이미 펼쳐져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즉 시간이 그에 맞추어 전개될 서로 구별되는 차원들은 아직 없으며 또 시간이 그 안에서 서로 다른 리듬들에 맞추어 분포될 서로 분리된 계열들조차 아직은 없다... 예술이 우리에게 되찾도록 해주는 것은 본질 속에 휘감겨 있는 시간들, 즉 본질로 감싸여진 세계 속에서 태어나는 시간들이다. 이 시간들은 영원과 동일하다... 우리에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예술 작품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최고의 기호돌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근원적인 복합, 진정한 영원,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 속에 있다.(p79)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잠든 사람은 자기 주위에 시간의 실타래를, 세월과 우주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생각해 내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위치한 지구의 지점과,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시간을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서는 뒤섞일 수 있으며, 끊어질 수도 있다.(p19)... 이제 나는 확실히 잠에서 깨어났다. 내 몸은 마지막으로 한 바퀴 빙 돌더니, 확실성이라는 착한 천사가 내 주위 모든 것을 고정해 나를 내 방 이불 아래 갖다 눕혔고, 어둠 속에서 내 옷장, 책상, 벽난로, 길가 쪽 창문, 두 문을 대충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p2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들뢰즈의 주장을 요약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헛되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찾는 배움의 과정으로, 주인공이 맞게 되는 수많은 기호 중 예술이라는 궁극의 기호를 통해 진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들뢰즈에게 (절대적) 시간은 진실이 표현되는 다른 차원이며, 진실 찾기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들뢰즈의 추론은, 단지 '되찾은 시간'을 비의지적인 기억 memoire involontaire의 경험과 혼동하는 해석,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비의지적인 기억의 단편적이고 우발적인 경험에는 결여되어 있는 풍성함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에 부여하는 기나긴 각성의 체득을 무시하는 해석들을 무너트릴 뿐이다... 예술 작품의 초시간적 extra-temporel인 차원을 발견하는 것은 기호의 체득에 비해 아주 독특한 경험이 된다.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비의지적인 기억이나 기호의 체득과 동일시 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층위의 경험과 화자가 거의 삼천 페이지에 이르는 작품의 끝에서야 뒤늦게 베일을 벗기는 전대미문의 경험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바로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 말할 수 있게 된다.(p273) <시간과 이야기2> 中


 이에 반해,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 ~ 2005)는 <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e'cit>에서 들뢰즈와 의견을 달리한다. 배움의 끝에 '헛되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들뢰즈의 의견과는 달리, 리쾨르는 '되찾은 시간' 속에서 주인공과 화자라는 두 개의 목소리가 통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되찾은 시간에서 이루어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의 목소리와 화자의 목소리라는, 적어도 두 개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주인공은 세속적이고, 애정적이고, 감각적이고, 미적인 모험들을 그것이 닥쳐오는 대로 하나씩 이야기한다. 여기서 언술 행위는,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할 때조차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형태를 택하고 있다. 그 결과 결말을 향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투사하는 "과거 속에서의 미래"라는 형태가 생겨났다. 이 점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화자의 목소리와 구별하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화자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에 의해 이야기되는 경험에 되찾은 시간과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의미를 두게 한다는 것이다.(p279) <시간과 이야기2> 中


 초시간적 존재(l'etre extra-temporle)로 주인공을 내려다 보고 있는 화자, 그리고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 이들이 '되찾은 시간'에서 '글을 쓰겠다는 결정'을 통해 영원성이 시간성을 갖게 되는 것으로 리쾨르는 해석한다.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은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히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화자의 절대적 현재로부터 두 단계 멀어지게 되는 유년기의 추억은 바로 비몽사몽의 과거 속에 삽입되는 것이다. 그 추억들은 마들렌 과자의 경험이라는 독특한 삽화를 중심으로 연결된다. 이 삽화는 그 자체가 표면과 이면을 가지고 있다. 즉, 표면적으로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추억들이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하다.(p281)... 우리는 의지적인 기억의 취약함을 선언하고 잃어버린 대상을 다시 발견하는 일을 우연에 맡기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 이 삽화의 표면에서 이면으로 옮겨가게 된다.(p282)... 화자가 유보시키고 있는 표지는 <되찾은 시간>에서 결말을 알고 다시 책을 읽을 때 그 의미와 효력을 갖게 된다.(p283) <시간과 이야기2> 中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p89)...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레오니 아무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아주머니의 방에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p9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되찾은 시간이라는 말은 때로는 초시간적인 것을, 때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행위를 가리킨다. 오로지 글을 쓰겠다는 결정만이 되찾은 시간의 의미가 갖는 이원성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p300)... 글을 쓰겠다는 결정은 이처럼 근원적 전망에서 비롯된 초시간적인 것을, 잃어버린 시간이 되살아나는 시간성으로 옮긴다는 효력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되찾은 시간이 갖는 한 가지 의미 작용에서 다른 의미 작용으로의 이행을 이야기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그것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p301) <시간과 이야기2> 中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단지 의지적인 기억, 지성의 기억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이런 기억이 과거에 대해 주는 지식은 과거의 그 어떤 것도 보존하지 않으므로 나는 콩브레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마음조차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내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p84)... 영원히 죽은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에는 많은 우연이 개입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라는 두 번째 우연은 첫 번째 우연의 은총을 오래 기다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p8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리쾨르의 주장을 요약하면, 화자와 주인공의 서로 다른 층위의 경험은 되찾은 시간 안에서 예술(글을 쓰겠다는 결정)을 통해 만나게 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 후반부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독자들은 작품을 처음부터 새롭게 바라볼 것을 요구받게 된다. 초시간의 시간화. 결국, 들뢰즈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진실찾기'로 '근원적인 절대적 시간'을바라봤다면, 리쾨르는 '화자와 주인공의 시간속에서의 통합'으로 해석하며 '초월적 시간'의 '시간화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들뢰즈의 시간방향이 미래로 지향한다면, 리쾨르의 시간방향은 되찾은 시간의 이행을 의미하기에 과거로 지향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들뢰즈에게 시간은 진실찾기 끝에 도달한 결론인 반면, 리쾨르에게 (되찾은) 시간은 진실찾기의 출발점이 된다. 알파와 오메가. 
















이들의 해석은 이처럼 차이가 있음에도, 새로운 2020년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이들의 해석이 모두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 삶을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의미 찾기 과정으로 본다면, 우리는 많은 시간을 흘러 보냈고, 보내고 있으며, 맞이한다. 그리고, 과거-현재-미래의 삶의 의미는 우리와 주변의 상황들에 의해 기호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의미를 각각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들뢰즈의 관점이라면,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신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삶을 조망하며 삶을 재해석하는 것이 리쾨르의 방식이 아닐까.


 2019년과 그 이전의 시간들을 매 순간 정리할 수 있겠지만, 개인의 삶의 끝에서 바라본 모습과 의미는 또 다를 것이다. 비록 지금은 2019년을 보내면서 아쉬운 점이 많은 한 해로 기억하겠지만, 혹시 누가 알겠는가. 먼 훗날에는 2019년이 내 인생의 분기점으로 기억될런지. 한 해를 보내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바라보는 들뢰즈와 리쾨르의 관점을 통해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며 한 해를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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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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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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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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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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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7: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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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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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이영훈 외 지음 / 미래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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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권위이며, 하나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의 종족이라 함이 옳습니다. 이웃 일본을 세세의 원수로 감각하는 적대 감정입니다. 온갖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것은 이 같은 집단 심성에 의해서입니다. 바로 반일 종족주의 때문입니다.(p21)

이영훈은 「반일종족주의」에서 반일종족주의에 대해 위와 같이 정의하고, 이를 근거로 한국근대사와 현대사를 자신의 관점으로 조망한다. 초반에는 저자의 전공인 한국 근현대사를 실증적으로 분석한다. 그래프와 함께 분석하는 저자의 해석은 일견 반박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면 다른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예를 들면 다음의 문장을 보자.

자본금 규모를 보면 일본인 회사가 압도적으로 컸으며, 대규모 자본이나 근대적 기술이 요구되는 산업에서는 일본인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인이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조선인은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자본과 기술의 축적이 일천했다는 불리함을 안고 있었지만, 이를 빠르게 극복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p60)

저자의 말처럼 본문의 그래프 상에서 보여지는 조선 공장수와 회사수는 분명 매우 빠르게 증가한다.하지만, 이러한 수의 단순 증가가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조선이라는 제국의 한정된 지역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은 통계의 착각으로 볼 수도 있다. 한반도에 한국인의 절대인구가 일본인 수보다 많은 것은 당연하며, 많은 인구에서 더 많은 기업이 생겨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의미있는 분석을 위해서는 당시 일본제국 전체를 대상으로 분석하는 편이 더 맞는 분석이 아닐까. 같은 시기 일본 제국 전체 통계에서도 그런 추세가 나온다면 저자의 분석이 맞겠지만, 조선인의 수가 압도적인 지역에서 단순 양 비교는 무의미하다 여겨진다. 아니면 일본 본토와 조선의 1인당 GDP 수치 변화는 어떨까. 정말 ‘내선일체‘가 1910년대 이루어져 근대화가 되었다면 매우 빠른 속도로 식민지 조선이 일본의 경제수준에 근접한 통계가 있음직하다. 그런 통계를 제시해야 수탈이 없었다는 주장을 펼 수 있지 않을까.

초기의 이런 실증분석과 함께 책에는 이 책을 반대하는 이들도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논리도 함께 제시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와 저자들의 주장이 섞여 있어 이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조선인의 높은 재해율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조선인을 험한 곳으로 고의로 떠밀었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 입니다. 더 나아가, 그 한 세대 앞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그 조상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할 것 입니다.(p87)

오늘날, 일제에 대한 협력과 북한 정권에 대한 협력 중에서 더 중대한 과오는 어느 쪽일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p224)

그렇지만 정말 저자의 주장대로 과거사에 책임을 묻는다면 반일종족주의에 빠졌다고 비난받을 것이기에(저자는 일본기업이나 일본정부의 배상 책임은 없다고 주장한다) 앞뒤가 맞지 않아 선뜻 이해가지 않지만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책에는 다른 문제도 있는데, 이는 적절한 근거 제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아래와 같이 문장을 얼버무리기도 하여 독자들의 신뢰감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만, 한국 사회가 유난히도 물질주의적인 것은 이미 여러 연구자가 여러 지표로 지적하고 있는 바입니다.(p20)... 더 자세히는 소개하지 않겠습니다만, 이 같은 백두산 인식은 19세기 말까지 면면하게 이어졌습니다.(p142)

이처럼 「반일종족주의」는 실증사학자의 저술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근거 제시가 부족하며, 저자의 개인견해가 많이 들어간 책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책 자체가 커다란 모순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경제사를 가르쳤던 저자의 자기 고백에서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장이다‘라고 외친 어느 크레타인의 일화가 생각난다...

이 나라의 국민이 거짓말을 일삼고, 이 나라의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게 된 것은 이 나라의 거짓말하는 학문에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나라의 역사학이나 사회학은 거짓말의 온상입니다. 이 나라의 대학은 거짓말의 제조공장입니다.(p14)


「반일종족주의」의 역사관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이 뉴라이트 사관에 기반한 학자들의 프로파간다를 잘 보여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며 간략히 도서관에서 빌린 책 리뷰를 마무리한다... 별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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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7 2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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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7 2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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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7 2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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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 08: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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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19-12-28 0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뉴라이트식의 일본제국주의 시대 한반도 경제에 대한 해석과 논리전개가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올해 읽긴 그른 것 같고 내년에나 펼쳐볼 수 있겠군요. 서평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12-28 01:12   좋아요 1 | URL
Comandante님 감사합니다. 일반적의 상식과 다른 논리 전개지만, 통계 데이터를 제시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그들의 논리의 모순된 점을 보여주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좋은 독서 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9-12-28 0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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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8 0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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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28 1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겨호님의 리뷰로 만족하렵니다.

이런 책들이 베셀이 된다는 게 비극
이라고 생각합니다.

1년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경자년에도 열심히 달려 주시기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19-12-28 13:47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굳이 시간을 들여 읽을 내용의 책은 안 된다 생각됩니다. 읽을 책도 많은데 말이지요. 레삭매냐 님께서도 연말 잘 마무리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년에도 잘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9-12-31 07: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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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 0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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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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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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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6 17: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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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6 18: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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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아 문명과 미케아 문명이라는 에게 해 문명의 토양을 이어받아 그리스는 예전과는 다른 독특한 문명을 구축하게 되었지요. 해안가에 폴리스라 불리는 조그만 도시국가들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정치 제도를 발명해 냈습니다... 그리스는 인간중심주의라는 축을 잡고 개성적인 문명을 이루었습니다.(p335) 「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2」에서

그리스의 조각은 민주주의적 공동체를 표현하는 신성한 상징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로마 공화정 시기의 조각은 공화제라는 복잡한 정치체제 안에서 개인이 지녀야할 가치, 즉 시민의 덕성을 보여주었죠. 하지만 제정 시대가 되면 조각상을 비롯한 미술 작품이 개인의 사유물이 됩니다.(p503)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2」에서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행해진 민주주의의 영향으로 그리스 미술에는 이전 시대와는 달리 ‘개성‘이 표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로마 미술은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제국 전역으로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평가받을만하다. 그렇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한 바와 같이 로마의 포용과 융합이 ‘제국‘이라는 구조에 기반한 것임을 고려해본다면, 미노아 문명에 미친 이집트/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로마 문명에 내재한 오리엔탈 요소는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부정할 수 없는 건 로마가 서양문명의 근간을 형성하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에요. 민주주의를 구축했던 그리스의 유산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유산도 계승하여 유럽 전역에 이식했으니까요.(p531)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2」에서

로마도 처음에는 그리스와 같은 폴리스였지만, 헬레니즘제국보다는 그보다 선행하는 페르시아제국의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마침내 제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거대한 관료기구와 세금을 확보할 수 있는 한 각지의 관습을 존중한다는 ‘제국의 원리‘였습니다.(p121) 「제국의 구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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