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311 B187 미적 대상들을 그러한 것으로 판정하기 위해서는 취미가 필요하나, 미적 기예[예술] 그 자신을 위해서는, 다시 말해 그러한 대상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천재가 필요하다... B188 자연미는 하나의 아름다운 사물이며, 예술미는 사물에 대한 하나의 아름다운 표상이다.(p344) <판단력 비판> 中


V307 B181 천재란 기예에 규칙을 주는 재능(천부의 자질)이다. 이 재능은 기예가의 선천적인 생산적 능력으로서 그 자신 자연에 속하므로, 사람들은 또한 "천재란 선천적인 마음의 소질[才質]로서, 그것을 통해 자연은 기예에게 규칙을 주는 것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p338) <판단력 비판> 中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 > 중 <숭고의 분석학> 편에서 미(美, 아름다움)을 판정하기 위해서는 쾌/불쾌의 취미가 필요하지만,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천재(天才)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천재를 통해 자연이 기예에게 규칙을 주고 이로 인해 아름다움이 일어난다는 칸트의 말에서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 43 ~ AD 17)의 <변신 이야기 Metamorphoses> 중 유명한<퓌그말리온의 기도 Pygmalion's prayer>를 떠올리게 된다.


퓌그말리온은 눈처럼 흰 상아를 놀라운 솜씨로 성공적으로 

조각했는데, 이 세상에 태어난 어떤 여인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었소. 그는 자신의 작품에 그만 반해버리고 말았소. 

그 얼굴은 진짜 소녀의 얼굴이었소. 그대는 그녀가 살아 있다고, 

곧은 행실이 막지 않는다면 움직이고 싶어한다고 믿었으리라. 그만큼 그의 작품에는 기술이 들어 있었소.(p477)  (247 ~ 252) <변신이야기>10권 <퓌그말리온의 기도>中


퓌그말리온이 마치 진짜 사람처럼 만든 소녀의 얼굴은 칸트의 설명대로 자연으로부터 부여 받은 기예의 규칙 덕분에 자연을 잘 모사했을것이고(복제품), 이로 인해 오비디우스의 말처럼 퓌그말리온의 소녀상은 아름다움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퓌그말리온의 소녀상은 아름다운 예술품이지, 사람은 아니었다. 소녀상(像)은 퓌그말리온의 상상력을 구체화한, 인간의 모사품이었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복제(複製)에 대해 말한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 ~ 1940)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barkeit>을 찾아보자.

 

 1900년 전후에 기술적 복제는 그것이 전승된 예술작품 전체를 대상으로 만들고 예술작품의 영향력에 심대한 변화를 끼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의 작업방식에서 독자적인 자리를 점유하게 될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p102)<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中


 벤야민은 1900년대 사진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많은 모사품을 양산한 당대의 현실에 주목하고, 기술적 복제로 인해 사물의 역사적 증언 가치, 사물의 권위, 아우라(Aura)가 빠져나감을 지적한다. 반대로, 아우라는 원본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적인 것이겠다. <퓌그말리온의 기도>에서 소녀상은 사진은 아니지만, 사람을 모사한 복제품이라는 점에서 아우라가 없는 존재다.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 원작(Original)이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 원작의 진품성(眞品性)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이룬다. 진품성의 영역 전체는 기술적 복제의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고, 물론 기술적 복제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복제의 가능성에서도 벗어나 있다.(p104)...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 가치는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복제의 경우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손을 떠나게 되면 사물의 역사적 증언 가치 또한 흔들리게 된다. 이로써 흔들리게 되는 것은 사물의 권위이다.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을 아우라(Aura, 독특한 분위기)라는 개념 속에 요약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p106)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中


 퓌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작품(소녀상)의 아름다움에 빠져 여신 베누스(아프로디테)에게 '내 상아 소녀'를 닮은 여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렇지만, 그의 본심을 알고 있던 여신은 소녀상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이들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림] Pygmalion and Galatea(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ygmalion_and_Galatea_(Normand).jpg)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 곧장 자신의 소녀의 상(像)을 찾아가서

침상 위로 머리를 숙이고 입맞추었소. 소녀가 따뜻하게 느껴졌소.

그는 다시 입을 가져가며 손으로는 가슴을 만져보았소.

그가 만지자 상아는 물러지기 시작하더니 딱딱함을 잃고는

손가락들에 눌렸소.(280 ~ 284)...

사랑하는 남자는 소망하던 것을 다시 또 다시 손으로 만져 보았소.

그것은 사람의 몸이었소, 그의 손가락 아래 혈관들이 고동쳤소.(p479) (288 ~ 289) <변신이야기>10권 <퓌그말리온의 기도> 中


 사랑하는 남자의 기도로 생명력을 얻게 된 소녀상. 신의 능력으로 소녀는 아름다운 조각상에서 아우라 넘치는 존재로 태어나게 되고, 퓌그말리온에게 아름다운 존재에서 숭고한 존재로 거듭난다. 칸트는 개념없이 필연적인 흡족의 대상으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다른 것과 비교하면 다른 모든 것이 작아지는 것이 숭고함이라고 <판단력 비판>에서 설명한다. 다만, 숭고함은 밖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 있기에, 소녀상이 여인 갈라테아(Galatea)로 변화한 것은 아름다움에 숭고함이 더해진 것이라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아우라는 2+1으로 주어진다. 적어도 퓌그말리온 개인에게는.


V256 B95 진정한 숭고함은 오직 판단하는 자의 마음에서 찾아야지, 그것에 대한 판정이 마음의 그러한 정조를 야기하는 자연객관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마음은 그러한 것들을 고찰함에 있어 그것들의 형식은 고려함이 없이 상상력에 대하여, 그리고 전적으로 일정한 목적 없이 상상력과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상상력을 순전히 확장하는 이성에 대하여 자신을 내맡겨서, 그럼에도 상상력의 전체 힘이 이성의 이념들에 걸맞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면, 자기 자신의 판정에서 마음은 고양됨을 느낀다.(p264) <판단력 비판> 中


 소녀상은 이제 아름답고 숭고한 그리고 유일한 존재인 '갈라테아'가 되어 아우라도 갖추게 되었다. 칸트의 말에 따르면 숭고함은 이성(理性)과 연결된다. 이제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아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별 문제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사회적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퓌그말리온에게 갈라테아는 이성적 존재가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퓌그말리온이 느낀 숭고함을 가지지 못한다면(즉, 숭고함의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갈라테아는 같은 이성적 존재로 공인(公認)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퓌그말리온의 주관적인 숭고함이 객관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퓌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에 빠진 소위 '히키코모리 + 오타쿠'에 불과하게 된다. 


 이제 불쌍하게 오해받게 된 퓌그말리온을 구해보자. 칸트는 이러한 사태를 예견했는지 <순수 이성 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 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다.


A197 B242 우리는 우리 자신도 의식할 수 있는 표상들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 이 의식은 원하는 만큼 확장될 수도 있고, 정밀하고 정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은 오로지 언제나 표상으로, 다시 말해 이 시간관계 또는 저 시간관계상에 있는 우리 마음의 내적 규정들로 머문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이 표상들에다 하나의 객관을 세우기에 이르는가? 바꿔 말해, 변양들인 표상들의 주관적 실재성을 넘어 표상들에다 내가 모르는 어떤 종류의 객관성을 부가하기에 이르는가? 객관적 의미는 다른 어떤 표상과의 관계에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다시금, 어떻게 이 표상이 또한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마음 상태의 규정인 표상에 고유한 주관적 의미를 넘어 객관적 의미를 얻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 것이니 말이다. '한 대상과의 관계맺음' 이라는 것이 우리 표상들에게 대체 어떤 새로운 성질을 부여하며, 우리 표상들이 이를 통해 갖게 되는 권위는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가 탐구한다면, 우리는 한 대상과의 관계맺음이란 다름아니라 표상들의 결합을 일정한 방식으로 필연적이게 한다는 것, 그리고 표상들을 하나의 규칙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안다. 뒤집어 말해, 우리는 우리의 표상들의 시간관계에서 일정한 순서가 필연적임에 의해서만 우리의 표상들에게 객관적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을 안다.(p431) <순수 이성 비판 > 中


 해당되는 내용은 길었지만, 간략하게 줄이면 다른 사람들도 퓌그말리온 집에 와서(공간적 경험) 동시에 갈라테아를 보고(시간적 경험), 사람임을 인정한다면(범주) 같은 시공간에서의 범주 판단을 통해 미적 판단의 객관적 타당성이 부여될 수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것이다.


 경험이란 '지각에 의하여 객관을 규정하는 인식'이기 때문에, 경험 즉 경험판단은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는 판단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경험의 가능성의 근거를 묻는 것은 경험판단의 '겍관적 타당성'의 근거를 묻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경험의 가능성의 형식적 제약으로서의 공간, 시간, 범주에 의해서 비로소 경험(경험판단)이 가능하게 되는 것을 증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p17) <칸트 사전, '객관적 타당성'> 中


 요약하자면, <변신 이야기>에서 퓌그말리온의 기도로 생명력을 얻게 된 갈라테아. 아름다운 소녀상에서 (퓌그말리온에게) 숭고한 존재로 거듭나면서, 다른 조각품에는 없는 아우라를 획득하게 되었다. 갈라테아가 획득한 아우라는 이 경우 숭고함과 연결된 이성(reason)으로 볼 수 있겠다. 다만, 숭고함이라는 미적 감정이 주관적 판단에 한정된다는 비판에 대해 우리는 같은 시공간에서의 체험을 통해 객관성이 확보될 수 있음을 보았다. 일단 여기에서 멈추도록 하자. 여기에 더해 이성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본유관념(本有觀念)인가 하는 물음까지 나아가면,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와 존 로크(John Locke, 1632 ~ 1704)까지 나와야 하니, 이분들은 다음 기회에 모시는 것으로 하고, 이 정신 없는 페이퍼를 인단 정리하도록 하자...


PS. 퓌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Aphrodite)에게 사랑받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아프로디테의 고향이 키프로스(Cyprus이고, 퓌그말리온이 키프로스의 왕이었던 것과 연결되 보인다. 특히, 그의 손자 아도니스(Adonis는 아프로디테의 연인이었는데, 그가 코린트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키프로스와 코린트의 갈등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


 키뉘라스는 약간의 백성들을 데리고 퀴프로스(Kypros)에 도착하여 파포스(Paphos) 시를 세우고 그곳에서 퀴프로스 왕 퓌그말리온의 딸 메타르메와 결혼하여 옥쉬포로스와 아도니스를 낳고 이들 외에도 세 딸 오르세디케와 라오고레와 브라이시아를 낳았다. 그의 딸들은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사서 이방의 남자들과 동침하다가 아이귑토스에서 죽었다.(p270)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제3권 14.3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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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7 09: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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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7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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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3대 비판서인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 각각 진•선•미를 다룬 3부작이라면, 그의 사상적 라이벌 데이비드 흄 역시 「오성에 관하여」, 「도덕에 관하여」, 「정념에 관하여」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부족하게나마 칸트를 읽었으니 이들 사상을 비교해 보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어가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ps. 당연하겠지만, 국회의원 이나 미스코리아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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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7-05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전 아예 살 생각도 쿨럭... ㅋㅋ

겨울호랑이 2020-07-05 13:28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아직 읽은 것도 아니고 이제 첫 걸음인걸요. 칸트 비판서를 읽긴 했지만, 이해했다고 하기엔 너무도 부족한 현실입니다. 이렇게 해 놓으면 창피해서라도 읽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올렸습니다.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syo 2020-07-05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돈 받고 하세요..... 알라딘에다가 고료 내놓으라고 하시란 말씀이에요....ㅋㅋㅋㅋㅋ

겨울호랑이 2020-07-05 13:44   좋아요 0 | URL
반사. ㅋ 제 부족한 글을 사줄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보다는 syo님의 재치있는 글이야말로 묶어서 책을 내시는 것이 이웃분들의 바람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2020-07-05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05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0-07-05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히 겨울호랑이님의 지성을 존경합니다^^
한가지 아쉬운것은 제가 이 책들을 읽어낼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0-07-05 16:35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뒤늦게 겨우 밀린 숙제를 했을 뿐인걸요... 저도 겨우 읽긴 했지만, 제대로 소화하려면 몇 십번을 더 읽어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는 제가 말씀을 드리기에는 조심스럽지만, 조금 재미없음을 감수하신다면 투자한 시간이 절대 아깝지 않은 독서 시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솔직하게는 생각보다 재미없습니다....)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판단력비판 대우고전총서 24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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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V V168 선험적인 구성적 인식원리들을 함유하고 있는 한에서, 자기 고유의 구역을, 그것도 인식능력에서 갖는 것은 본래 지성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명명된 순수 이성 비판에 의해 여타의 모든 경쟁자들에 대항해서 확실한, 그러나 유일한 소유지를 확보해야 할 것이었다.  그와 똑같이 오로지 욕구능력과 관련해서만 선험적인 구성적 원리들을 함유하는 이성은 실천 이성 비판에서 그 소유지를 지정받았다. 그런데 우리 인식능력의 순서에서 지성과 이성 사이의 중간항을 이루는 판단력도 독자적으로 선험적 원리들을 가지는가, 이 원리들은 구성적인가 아니면 한낱 규제적인 것인가, 그리고 판단력이 인식능력과 욕구능력 사이의 중간항으로서의 쾌/불쾌의 감정에게 선험적으로 규칙을 주는가, BVI 이것이 지금의 이 판단력 비판이 다루는 문제이다.(p146) <판단력 비판> 中 


V177 상위 인식능력들의 가족 안에는 지성과 이성 사이에 중간 성원이 하나 더 있다. 이것이 판단력인데, 이것에 대해 사람들은, 그것이 비록 고유한 법칙수립[입법]을 함유하고 있지는 않다고 해도, 법칙들을 찾는 자기 자신의 원리를 선험적으로 자기 안에 함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유비에 의하여 추측할 이유를 갖는다.(p160) <판단력 비판> 中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자연'에 적용되는 선험적 원리인 '합법칙성'과 인식능력인 '지성'을 '자유'에 적용되는 선험적 원리인 '궁극목적'과 인식능력인 '이성'을 매개하는 '판단력'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기예'에 적용되는 '합목적성'과 이를 인식하는 '판단력'은 다리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BXXV  지성과 이성 사이에 판단력이 포함되어 있듯이, 인식능력과 욕구능력 사이에 쾌의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잠정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판단력도 독자적으로 선험적인 원리를 함유한다는 것, 그리고 욕구능력에는 필연적으로 쾌 또는 불쾌가 결합되어 있으므로, 판단력이 논리적 사용에서 지성으로부터 이성으로 넘어감을 가능하게 하듯이, 순수 인식능력, 다시 말해 자연개념의 관할구역으로부터 자유개념의 관할구역으로의 넘어감을 야기할 것이라는 것이다.(p162) <판단력 비판> 中 


 칸트는 판단력을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 아래에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능력(BXXV=V179)로 규정하고, 판단력이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 아래 수렴시키거나(규정적 판단력), 주어진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반성적 판단력)고 본다. 이 중에서 특히 반성적 판단력은 미감적 사용에서 쾌/불쾌의 감정 영역에서 합목적성이라는 법칙수립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합목적성을 매개로 판단력에 의해 지성과 이성은 연결된다.  


BXLIII V189 하나의 표상에서 전혀 인식의 요소가 될 수 없는 주관적인 면은 그 표상과 결합되어 있는 쾌 또는 불쾌이다. 왜냐하면, 설령 이 쾌 또는 불쾌가 어느 인식의 결과일 수 있을지라도, 이를 통해서 나는 표상의 대상에서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p176)... BXLIV V190 쾌는 다름 아니라 객관이 반성적 판단력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반성적 판단력 안에 있는 한에서의 인식능력들에 대한 적합성을, 그러므로 한낱 객관의 주관적 형식적 합목적성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p177) <판단력 비판> 中 


BLV V196 지성은 그가 자연에 대해 선험적으로 법칙들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 자연은 우리에게 단지 현상으로서만 인식된다고 증명하고, 그러니까 동시에 자연의 초감성적인 기체[基體]를 고지한다. 그러나 이 기체는 전적으로 무규정인 채로 남겨둔다. 판단력은 자연의 가능한 특수한 법칙들에 따라 자연을 판정하는 그의 선험적 원리에 의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밖에 있는) 자연의 초감성적 기체가 지성적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성은 똑같은 기체를 그의 선험적 실천 법칙에 의해 규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판단력은 자연개념의 관할구역에서 자유개념의 관할구역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p186) <판단력 비판> 中 


BXXX 자연의 합목적성의 원리는 하나의 초월적 원리이다. 왜냐하면 객관들에 대한 개념은, 그것들이 이 원리 아래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한에서, 단지 가능한 경험인식 일반의 대상들에 대한 순수한 개념일 따름으로, 아무런 경험적인 것도 함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V182 그에 반해, 자유 의지의 규정이라는 이념에서 생각될 수밖에 없는 실천적 합목적성의 원리는 형이상학적 원리이겠다. 왜냐하면, 의지라는 욕구능력의 개념은 그래도 경험적으로 주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원리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 원리들이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의 주어인 경험적 개념에 술어를 결합하기 위해 더 이상의 경험은 필요하지 않으며, 그 결합은 온전히 선험적으로 통찰될 수 있기 때문이다.(p166) <판단력 비판> 中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자연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하는 원리인 미감적 판단력을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미감적 판단력 비판을 수행한다. 상상력의 자유로운 합법칙성과 관련하여 대상을 판정하는 능력인 취미는 아름다움을 - 미(美) - 판단하는 능력이다.


V211 B16 취미는 대상 또는 표상방식을 일체의 관심 없이 흡족이나 부적의[不適意]함에 의해 판정하는 능력이다. 그러한 흡족의 대상을 아름답다[미적이라]고 일컫는다. B17 미는 개념들 없이 보편적인 흡족의 객관으로서 표상되는 것이다.(p202)... V212 취미판단에는, 일체의 관심에서 떠나 있다는 의식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타당해야 한다는 요구주장이, 객관들 위에 세워진 보편성 없이도, 부수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취미판단에는 주관적 보편성에 대한 요구주장이 결합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p203) <판단력 비판> 中


 그렇지만, 미학은 아름다움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아름다운 대상과 함께 숭고한 것도 적의하며, 하나의 반성판을 전제로 단칭판단에서 표현된다는 점에서 숭고함 역시 미학의 대상이다. 이들은 같은 미학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지만, 차이점도 가진다. 거칠게 표현해서, 아름다움이 지성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면, 숭고함은 이성 개념과 연결된다. 


V244 B74 미적인 것과 숭고한 것은 양자가 그것 자신만으로 적의하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더 나아가 양자는 감관판단이나 논리적 - 규정적 판단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판단을 전제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B75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음 또한 눈에 띈다. 자연의 미적인 것은 대상의 형식에 관련이 있고, 대상의 형식은 한정에서 성립한다. 그에 반해 숭고한 것은, 무한정성이 대상에서 또는 그 대상을 유인동기로 해서 표상되고 또한 무한정성의 전체가 덧붙여 생각되는 한에서는, 무형식의 대상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미적인 것은 무규정적인 지성 개념의 대상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미적인 것은 무규정적인 지성 개념의 현시이지만, 숭고한 것은 무규정적인 이성개념의 현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흡족이 전자에서는 질의 표상과 결합되어 있지만, 후자에서는 양의 표상과 결합되어 있다. 미적인 것은 직접적으로 생명을 촉진하는 감정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매력이나 유희하는 상상력과 합일할 수 있지만, 숭고의 감정은 단지 간접적으로만 생기는 쾌이다.(p249) <판단력 비판> 中


 숭고함은 외부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숭고함이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과 이성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미학적 판단력 아래 지성과 이성을 통합시킬 수 있다는 것이 <판단력 비판>의 큰 줄기다.


V246 B78 우리는 자연의 미적인 것을 위해서는 우리 밖에서 하나의 근거를 찾아야 하지만, 숭고한 것을 위해서는 한낱 우리 안에서, 그리고 자연의 표상에 숭고성을 집어넣는 사유방식[성정] 안에서 하나의 근거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매우 긴요한 예비적 주의로서, 이 주의는 숭고한 것의 이념들을 자연의 합목적성의 이념과 전적으로 분리시키고, 숭고한 것에 대한 이론을 자연의 합목적성에 대한 미감적 판정의 한낱 부록으로 만드는 바이다. 숭고한 것에 의해서는 자연 안의 어떠한 특수한 형식도 표상되지 않고, 단지 상상력의 자연의 표상에 대한 합목적적 사용만이 전개될 뿐이니 말이다.(p251) <판단력 비판> 中


  <판단력 비판>의 세부 내용에서는 앞선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에서 논의된 사항들이 간략하게 재논의되면서 칸트 비판 철학의 전체 구조를 완성시킨다. 이들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리뷰에서 다루기엔 한계가 있기에 세부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추가적으로 정리토록 하자. 넓고 깊은 칸트 철학을 정리하기에 부족함을 많이 느끼지만, 어렴풋하게 윤곽을 잡은 것으로 작은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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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7-05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인생의 하나의 큰 사건이라고 믿는 사람으로서 완독을 무척 축하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20-07-05 16: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의 페이퍼 덕분에 칸트 이후에 읽을 과제를 찾게 되었습니다. ^^:)

2020-07-05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05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이미경의 구멍가게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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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기다보면 오래전 어느 구멍 가게에서 쫀득이와 아폴로를 물고 10원 동전 오락을 했던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친근한 공간을 통해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찾고서, 시공간이 하나됨을 느낀다. 추억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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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7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07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