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연구한 모든 역사적 궤적은, 불평등구조가 얼마나 기존 정치제체 형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구래의 삼기능사회든 19세기에 개화했던 소유자사회든, 심지어 노예제사회나 식민사회라 하더라도, 일정한 유형의 불평등주의체제를 지속시켜온 것은  바로 정치권력의 조직화 양식이다.(p1067)... 정치체제의 또다른 측면, 즉 정치활동과 선거민주주의의 자금 측면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시급하다.(p1068)... 요약하자면 시민 각자에게 동일한 가치의 연간 바우처를 주자는 것으로,.. 민주적 평등 바우처의 핵심 목표는 평등주의적인 참여민주주의를 고무하려는 것이다.(p1070) _토마 피게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전작 <21세기 자본>에서 심화되는 경제의 불평등 문제를 지적한 피게티는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정치를 통한 해결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저작을 통해 비로소 <21세기 자본> - <자본과 이데올로기>로 이어지는 피게티의 정치경제사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독일 이데올로기>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조합이, 경제학계에 어느날 혜성처럼 등장한 그에게 아킬레우스가 그토록 원했던, 그리고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야 누릴 수 있었던 불멸의 명성을 보장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독점자본과 부의 불평등이라는 공통된 시대의 과제를 다룬 두 경제학자들의 서로 다른 처방전을 대조해 보는 것은 분명 독서를 즐겁게 하는 또다른 방법이라 생각한다.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12-11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1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2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2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1권력 :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 왔는가」의 저자 히로세 다카시는 금융의 모건 가문과 석유의 록펠러 가문이 어떻게 미국의 산업과 문화 전반을 잠식하는지를 상세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일찍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묘사한 독점자본이 얼마나 거대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 거대 공룡이 정치를 통해 그 지배를 강화해왔음을 깊이 느끼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제1권력」은 우리에게는 민족의 아픔으로 느껴지는 ‘한국전쟁‘이 누군가에겐 비즈니스 게임의 일부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분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확인할 수도 있다.

요약하자면, 「제1권력」은 자본주의 사회의 주인이 누군가인지를 냉정하게 진술하고 있으며, 경제체제인 자본주의가 파트너인 정치체제로 민주주의를 선택한 것은 자신의 지배를 가장 용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넌지시 제시한다. 누군가는 음모론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우리가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할 수도 있겠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을 때,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한반도 토지의 64%라는  실로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전쟁  전에 미국에서 사채를 판매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쟁  전과 전쟁중,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반도의 독점지배 회사나 마찬가지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재산 관리 회사는 어디였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모건의 내셔널시티은행이었다.  - P288

그렇다면 휴전 날짜는 어떤가? 그들은 전쟁을 통해  한국 민중을 지배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를 굳힌 뒤  "38도선을 확정함으로써 일단  승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는 투기꾼다운 발언이 휴전  직전에 정부 수뇌들의 입에서 일제히 흘러나왔던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 대통령인 이승만에게 100만 달러를주고 이권을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우려한 것은 군수 경기가 침체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 P290

사실상 모건과 록펠러로 인하여 죽어간 수많은 목숨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자선사업은 한낱 위선에 불과하다는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그들이 매스컴과 영화를 동원시킨 것도 바로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물론 단순히 비즈니스의 시각에서 보면, 생명보험업에 진출한 시기와 의료 자선사업을 시작한 시기가 우연히 일치했을 뿐이라고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보기엔 너무나도 무서운 결론이 아닌가?
- P159

 오늘날까지 우리는 민주당 대 공화당이라는도식 속에서 매파 대 비둘기파라는 이미지를 세뇌받아 가당치 않은실수를 범해왔기 때문이다. 한꺼풀 벗겨 보면 민주당과 공화당 뒤에는 그들 모두를 지배하는 모건과 록펠러가 숨어 있고, 각료 자리도 살펴보면 전부 저들의 수족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사례를 한가지 들자면, 존 D. 록펠러의 손자 넬슨 록펠러는 순수 매파 공화당원으로서 이 무렵엔 뉴욕 주지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동생데이비드 록펠러는 민주당의 비둘기파를 열렬히 지지해왔다. 그럼에도 이 형제는 반목하기는커녕 록펠러 가라는 마차의 두 바퀴로서 견고하게 손을 잡아왔다. - P34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12-09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9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0-12-10 2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12-10 20:45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서재 이웃을 먼저 챙겨주시는 서니데이님의 글을 읽으니 한 해가 가는 것을 느끼게 되네요. 서니데이님께서도 건강하게 한 해 마무리 지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해주고 싶은 것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충분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인간의 마음에는 의지력 말고도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반복적인 행동 패턴, 우리의 습관 말이다._웬디 우드, 「해빗」, p42

「해빗」의 저자 웬디 우드는 책에서 인간의 의식적인 의지는 한계가 있으니, 바뀌기 위해선 비의식적인 습관을 활용할 것을 강조한다. 구체적인 계획으로 저자는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고 상환을 재배열하며 적절한 보상을 통해 습관을 유지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끝. 자기계발서의 다수가 그러하듯 나머지 부분은 ‘습관 예찬‘이기에 책의 핵심은 이 정도가 될 듯하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독자 각자의 실천뿐이다. 자기계발서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심한 비판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몇 가지 의문을 지우기는 힘들다.

개인적으로「해빗」의 저자 주장에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습관화 과정이다. 저자는 인위적인 인간 의지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이를 대신한 습관화에서는 ‘보상‘이라는또다른 인위적인 개입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습관화의 주체를 폐쇄적인 ‘뇌‘로 한정시켜 바라보는 저자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저자는 인간 행동의 주체로서 ‘뇌‘를 설정하지만, 행동의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뇌‘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마치 뇌를 기독교의 ‘신‘과 같은 절대적인 위치에 놓고 폐쇄계로서 시스템을 가정했기에 결국 ‘동기 부여를 통한 습관형성‘이라는 스키너의 주장에서 크게 나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전화번호를 누를 때 자주 사용하는 번호는 ‘손가락이 기억‘하는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반응은 의식적인 인간 기관인 뇌가 아닌 몸에서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서구적인 사고와 뇌과학에 기반한 습관화 연구가 선뜻 동의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습관화와 관련해서는 「해빗」보다 노자의 「도덕경」이 더 바람직한 길을 제시해 준다 생각된다.

인위적으로 행하려 하지 않고, 내버려 둔 상태(let it be)에서 별다른 감정의 기복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면 그것이 습관화가 아닐런지... 「해빗」을 통해 「도덕경」의 무위를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12-09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9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농경이 일으킨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농경을 통해  (수렵·채집에 비해 훨씬 많은 노력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훨씬 많은 식량을, 즉 농부를 비롯해 그의 가까운 가족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을 충분히 생산해 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잉여분의 식량이 이후 일어나는 그 모든 사회적·정치적 변화의 토대였다. 그 덕에 일부는 농사를 짓지 않고도 생계를 부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여기서 핵심 질문은 농부가 가지고 있던 그 잉여분을 어떤 방식으로 누가 가져갔는가 하는 점이다._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 p128

굳이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가 진보해오지 않았음을, 그리고 리프킨의 「엔트로피」가 주장하는 바처럼 우리의 기술은 발전되었다기보다 ‘차선‘을 이용하기 위해 변용되었음을 인정한다면, ‘신석기 혁명‘을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수렵 경제에 비해 필요노동량은 증대된 상황에서 불평등한 분배구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생겨난 형이상학적 설명이 종교,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생겨난 이래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우리 인류는 우리가 길들인 가축과 곡물들의 존속을 위해 이들에게 이용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쉽게 떨치지 못하게 만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12-09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9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는 유럽 중심의 세계사관을 거부하는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유럽은 중국, 이슬람과 더불어 하나의 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가정 위에 서술된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는 기존의 주류 세계사 책과는 분명 구분된다. 그렇지만, 보다 미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계도 분명해진다. 서구 중심의 세계사가 아닌 폭넓은 세계관을 담았다고 하는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지만, 지역사와 관련한 각국의 첨예하게 대립하는 역사문제까지 충분히 담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진다. 본문에서 중국과 이슬람 문명은 유럽 중심주의의 자리를 나누어 가졌음을 우리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뿐 아니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을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는 유럽 중심의 사관에서 벗어나 다극화된 세계관을 보여줬다는 점에서는 한층 진일보했지만, 인류 보편의 역사로서 세계사관이 담긴 책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반도는 이 시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오랫동안 한나라를 비롯한 중국 북부 여타 국가들의 변경 지대에 해당했다.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은 시기별로 강도가 달라지다가, 한이 설치한 군현 내부에서 서서히 한반도의 지방 통치자들의 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국인들에게 의지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해 나갔고,  대체로 혈연관계를 기반으로 통치했으며, (이 당시에  한반도의 사회들은 전반적으로 혈연을 기반으로  했다.)  통치 씨족의 권력은 먼저 형제간에 이양된 뒤 계승자가 더는 남아 있지 않을 때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 삼국 중에서도 고구려가 가장 막강했는데, 단지 중국의 영향력이 가장 가까이 미쳤기 때문이 아니라 북부의 만주 지방으로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 P5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