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 리 스몰린이 들려주는 물리학 혁명의 최전선 사이언스 마스터스 13
리 스몰린 지음, 김낙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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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중력은 그 이론적, 실험적 난점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끈이론, 고리, 고리 양자 중력 이론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으나, 아직 어떤 이론도 완벽한 이론적 체계와 실험적 검증이라는 두 가지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지 못한 상태이다. 끈 이론과 고리 양자 중력은 비록 그 착안점은 완전히 다르지만 홀로그래피 원리, 시공간의 거품 등과 같은 흥미로운 공통 예측이 속속 등자하고 있음을 저자는 강ㅈ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힌트를 바탕으로 양쪽의 장점만을 취합한 궁극의 양자 중력 이론을 완성하는 것이 가까운 장래에 가능할 것인가? _ 리 스몰린,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 , p9

리 스몰린(Lee Smolin, 1955 ~ )은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Three roads to quantum gravity >에서 끈이론과 고리 양자 중력 이론 그리고 이들을 통합한 또다른 이론에 대한 이야기를 일반인을 대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한다. 브라이언 그린, 미치오 가쿠, 리사 랜들 등이 주장하는 끈이론과 리 스몰린, 카를로 로벨리 등이 주장하는 고리 양자 중력 이론 등 양자 중력 이론의 계보에 익숙하지 못한 일반인들에게 이들 이론의 차이점과 접점을 알려준다는 것이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이다.

입자에 전급함에 따라 장의 세기가 무한대에 접근한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의 방정식에서 나타나는 많은 무한대 값들을 설명해준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그 두 가지 방식 모두 양자 중력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 가지는 공간이 연속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 경우에는 입자에 임의의 거리까지 가까이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른 방법은 이중성의 가설을 활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가설을 이용해 입자를 끈으로 대체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어던 것이 실제로 점인지 작은 고리인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방법이 유용할 수도 있다. _ 리 스몰린,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 p212

오늘날 고리 양자 중력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이 탄생했다. 간단한 결과 하나는 양자 기하학은 진정으로 불연속적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은 초전도체 안의 자기장과 마찬가지로 불연속적인 역선이라는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중력장을 고리로 설명하자, 임의의 곡면의 넓이는 간단한 단위의 불연속적인 배수로 판명되었다. _ 리 스몰린,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 p242

리 스몰린은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본문에서 끈 이론과 고리 양자 중력 이론이 '동일한 방정식을 해석하는 다른 방법' 뿐임을 말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입자'와 '장'의 관계에서 시공간의 불연속적인 면에 초점을 맟췄을 때 고리 양자 중력이론이 되는 반면, 연속적인 시공간에서 매우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진 전자와 광자의 운동에 초점을 맞추면 끈 이론이 된다. 서로 다른 면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이들은 완전히 다른 이론으로 보여지지만, 사실 이들은 같은 방정식을 공유하는 형제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보완이 가능하여, 이를 통해 보다 완전한 양자 중력 이론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 책에서 말하는 마지막 세 번째 길이자, 저자의 희망이다.

이중성의 가설(hypothesis of duality)은 19세기 중반 이후 물리학을 괴롭혀 온 논제, 즉 우주는 입자와 장이라는 두 가지 다른 것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여겨진다는 이슈를 정면에서 다룬다. 이 이슈에서 이중성의 가설이 필연적으로 사용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19세기에 이미 알려졌듯이, 전하를 띤 입자들이 직접 상호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입자들은 전기장과 자기장을 매개로 상호 작용한다. 이것은 여러 가지 관측 사실로 뒷받침되는데 입자 사이의 정보 전달이 유한한 속도로 이루어지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이 경우는 정보가 장의 파동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_ 리 스몰린,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 p211

그렇지만, 저자의 바람과는 달리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이 출판된지 20년이 지났지만,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 끈 이론과 양자 중력 이론의 주장을 입증하는 것도, 이들을 통합한 진일보한 이론이 나오지 못했다. 그것은 양자의 세계를 인위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양자의 세계를 제대로 표현할 사고와 언어를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런지. 어쩌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초끈 이론과 고리 양자 중력 이론 모두가 틀린 이론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을 읽으며 이러한 이론이 무가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이들 이론이 우리의 수준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최선(最善)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뉴턴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처럼, 무리한 가정이라고 할 지라도 이러한 제약조건 속에서 한 걸음씩 나갈 때, 우리는 제약조건을 넘어선 궁극의 진리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때가 되면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에 의해 새로운 언어와 이론이 현상을 더 잘 설명해 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저자 리 스몰린을 비록한 이론물리학자들이 수십 년간 벽과 부딪히는 듯한 힘든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이런 예상을 마지막으로 글을 갈무리한다...

과학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 가장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관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처럼 시험으로는 측정하기 어려운 특성을 요구한다. 아인슈타인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듯이, 뉴턴의 생각은 사실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절대 공간과 시간은 그 당시 물리학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이것을 이해한 것이 아마도 뉴턴의 가장 위대한 업적일 것이다. _ 리 스몰린,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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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0-17 0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직 불완전하지만 초끈이론이 끈이론의 특이성을 설명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읽을때는 아하! 하다가 설명하려고 하면 모르겠는 미시세계;;!
잘 읽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10-17 09:53   좋아요 3 | URL
네, 같은 고리 양자 중력 이론가인 카를로 로벨리는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면>에서 끈이론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로벨리와 스몰린의 학문적 견해 차이의 일부는 끈이론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있는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과연 얼마만큼 끈이론의 가정과 이론전개를 긍정하는가는 그들의 논문을 통해 봐야겠습니다만, 그러지 못해서 추측으로 넘겨 봅니다. 그레이스님 좋은 하루 되세요! ^^:)
 

클린턴 지지자들은 여전히 1990년대와 월스트리트, 그리고 기술업계의 호황을 자축하고 있었지만 1970년대 이후 임금은 생산성을 따라잡지 못했다. 해밀턴프로젝트와 관련된 엘리트 지도층 인사들 입장에서 보면 비난의 대상은 분명했다. 미국의 교육기관들은 젊은 세대에게 세상을 앞장서 헤쳐나가자면 꼭 필요한 교육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을 세계화의 물결 속으로 이끈 건 다름 아닌 클린턴 행정부였다. 1995년 11월, 미국은 중국에게 새롭게 창설된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에 가입할 것을 권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자 미국은 인권 문제와 법치, 그리고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중국 공산당과의 대립을 포기한다. 그 대신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이른바 글로벌리스트들은 상업적 통합이라는 강력하고도 비정한 힘이 언젠가 때가 되면 중국을 세계 질서의 "이해당사자"로 만들게 될 거라고 장담했다.

중국의 국가외환관리국(國家外換管理局)에서는 안전하고 확실한 투자처를 찾고 있었는데, 안전한 자산관리를 위한 이들의 선택은 바로 미국 장기국채와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유가증권이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연준이 단기금리를 인상했지만 장기채권시장에서의 금리가 이를 따라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장기채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보니 채권의 가격은 올라가고 그에 따른 수익은 줄어들었던 것이다.

미국의 많은 교역 대상국은 달러화에 대한 자국 환율을 고정함으로써 달러화의 약세를 막았고 그 바람에 미국의 경쟁력은 바라던 만큼 회복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조치는 동시에 달러화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도 막아 제대로 된 금리 인상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현상이 공황상태를 불러온 은행 파산, 그리고 전 세계의 신용경색과 함께 어떻게 금융위기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는지 설명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부동산은 단순히 재산을 구성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융자를 위한 가장 중요한 형태의 담보물이라는 사실이다. 경기순환을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하는 동시에 주택 가격 동향을 금융위기와 결부한 건 다름 아닌 모기지 관련 채무였다

고정금리의 장기 모기지를 통해 집을 마련한 사람들에게 브레턴우즈 시대 이후 있었던 인플레이션은 뜻밖의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금리는 고정되어 있는 반면 이들이 지고 있던 채무의 실제 가치는 점점 더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자금을 빌려준 은행들의 경우는 반대로 재앙에 가까운 상황들이 이어졌다

미국의 모기지 관련 대출자들은 기존의 대출금을 일찍 상환하고 낮은 금리로 갈아탈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렇게 되면 대출자들은 전체 상환 비용을 줄여나갈 수 있는 데다가 또 대출자나 채무자 중에는 채권자들에 비해 더 높은 소비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통해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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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대출기관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모기지 관련 계약은 대단히 편향된 제도일 수 있었다.

저축은행 사태 이후 모기지 차입자들에게 직접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들로부터 위험을 바깥으로 분산하고 모기지 상품을 다양한 단계의 이익과 위험을 제공할 수 있는 증권으로 바꿔 투자자들을 끌어모으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리고 이 방식은 실제로도 효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저축과 대출의 사업 모델과 비교하면 이런 증권화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렇게 위험이 분산되었다는 이유로 제일 처음 진행되는 대출 업무를 주의 깊게 심사해야 한다는 것을 자칫 망각하게 한 것은 아닐까? 자금조달 부문과 상품의 발행을 분리함으로써 이 새로운 제도는 대출 과정을 주의 깊게 감시해야 할 이유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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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는 위대한 스타일리스트로서 디오니소스적인 영감의 분출하는 힘을 극한의 언어로 표현해냈다. 반면에 하이데거의 글에서는 아폴론적인 냉정함이 전면에 드러나 있고 디오니소스적인 파토스는 단단한 문장 아래서 소리 없이 끓어오른다. 니체의 문체가 '아폴론을 품은 디오니소스'라고 한다면, 하이데거의 문체는 '디오니소스를 품은 아폴론'이라고 할 수 있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4


 고명섭은 <하이데거 극장>에서 하이데거를 통해 수많은 사상가들을 소환한다. 가깝게는 니체, 딜타이, 야스퍼스, 아렌트, 칸트, 헤겔로부터 멀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은 '하이데거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는 하이데거 사상의 넓이와 깊이를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하이데거 극장>에서는 하이데거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의 주저들을 설명한다. 저자는 1편에서는 <존재와 시간>, 2편에서는 <니체 1> <니체2>를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보다 깊이 들여다 본다. 낯설게 느껴지는 하이데거의 용어들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존재'와 '현-존재', '존재자' 그리고 '현존'만 간단하게 살펴보자.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근본 구조를 분석하는 하이데거의 여정은 '세계'와 '세인'을 거쳐 이제 '내 존재'에 이른다. 여기서 먼저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로 존재하는 현존재가 세계를 열어 밝히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현존재는 어떻게 세계를 열어 밝히는가? 하이데거는 '현존재'라는 말 자체를 해부함으로써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다. 현존재(Dasein)는 세계-내-존재 곧 인간을 지징하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현-존재'(Da-Sein)라고 분철해 쓰기도 하는데, 그때 이 말은 '존재의 현'(Das Da des Seins)을 뜻한다. 현존재란 단지 인간을 뜻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현'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현'이라고 번역된 다(Da)는 독일어로 '거기' 나 '여기', 곧 어떤 장소나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존재의 자리가 현-존재인 셈이다.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가 현-존재의 현이다. 그래서 현-존재(現-存在)다. 현-존재는 순우리말로 하면 '거기-있음'이 된다. '거기-있음'이란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로 있음'을 뜻한다. 더 과감하게 말하면, 현-존재란 인간의 마음을 가리킨다.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66


 죽음과도 같은 극단적인 불안의 상황으로부터 '존재'를 인식하는 '현-존재'. 현-존재가 던지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동시에 자기자신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가 현-존재의 내부에 있으며 또다른 존재자들의 내부에 있기에, 존재는 현-존재의 내부와 외부의 다른 존재자들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는 '절대적인 의미'가 있지만, 존재는 개별 존재자들에게는 '상대적인 의미'로 존재하는, 뉴턴의 절대공간과 아인슈타인의 상대공간이 함께 공존하는, 입자와 파동으로 공존하는 '빛'과 같은 것이 존재의 의미가 될까.


 하이데거가 현-존재가 존재자가 되는 계기를 '죽음'에서 찾는다면, 아렌트는 이를 '생명'에서 찾는다. 마치, 하이데거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entropy)를 자연법칙으로 선택했다면, 아렌트는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Elan Vital)'을 실존의 계기로 삼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른 하이데거의 용어에서처럼 죽음 또한 그 이면에 상반된 이미지를 갖는다면 '죽음-생명, 그렇지만 죽음'을 선택한 하이데거는 '디오니소스-아폴론'적인 요소를 과연 '아폴론'의 측면에서 통합한 철학자라는 생각을 해본다.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로서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로서 주목하면, '현-존재'는 세계가 열리고 밝혀지는 장이 된다.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말하면, 우리의 마음을 떠나 존재가 따로 있지 않고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조응하여 세계로서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으로서 현-존재는 세계가 드러나는 장, 세계가 열려 밝혀지는 장이다. 현존재는 애초부터 세계를 개시하고 열어 밝혀지는 장이 된다. 우리의 마음을 떠나 존재가 따로 있지 않고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조응하여 세계로서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으로서 현-존재는 세계가 드러나는 장, 세계가 열려 밝혀지는 장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67


 하이데거 철학에서 확정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진리가 비은폐성이며, 비은폐성의 본질은 비밀이라는, 현존은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현존에는 기재(旣在)와 미래(未來)가 포함되어 있다는 본문의 내용은 그의 사상 안에서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의 단편을 떠올리게 된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와도 같이 현-존재는 각각의 상황에서 존재의 의미를 확률적으로 선택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까.


 '있음'과 '없음'이 하나의 현존 속에서 존재한다면, 그 현존의 형식은 'y=(-x)^n'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n이 짝수이면 x는 언제나 양수의 형태로, n이 홀수이면 x는 음의 형태로도 표현되는 방정식처럼, 하나의 존재 안에 두 개의 상반된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런지... 어렴풋한 이미지를 느끼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 안에서 버트런드 러셀의 기술이론(descriptive theory)를 떠올리게 된다. 주어에 대한 술어의 표현을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의 기본 구도로 이해한 러셀의 도식에서 존재를 술부에서 찾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기존의 철학과는 조금 다른 곳에 위치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래 독일철학의 독특성이라 봐야할까. 마치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에서 독일 출신 자동차 디자이너 피러 슈라이어를 영입한 이후 한국차에 독일DNA에 이식된 것처럼, 독일 철학에 동양사상의 DNA를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본래적인 시간을 알려면 '현존'(An-wesen)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때 현존은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앞에서 본 대로 현존이라는 말에는 현재라는 의미의 시간과 함께 현존이라는 의미의 존재도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이란 '존재가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뜻한다. '존재가 다가와 머무르고 있음'이 바로 현존이다. 그런데 현존에는 눈앞에 실제로 있다는 의미의 '현재'(Gegenwart)만이 아니라 '부재'(Abwesenheit)도 포함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때 부재가 가리키는 것이 '더는 현존하지 않음'(Nicht-mehr-Anwesenheit, 더는 현재가 아님)과 '아직 현존하지 않음'(Noch-nich-Anwesenheit, 아직 현재가 아님), 다른 말로 하면 기재(Gewesenheit)와 미래(Zukunft)다. 우리에게 다가와 머무르는 현존에는 현재만이 아니라 지나간 것의 기재(지나옴)와 다가올 것의 미래(다가옴)도 포함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 현존이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707


 들어가는 페이퍼를 작성하다보니, 떠오르는 생각들이 두서없이 나열되는 무의미한 글이 되버렸다. 이는 자신이 하이데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하이데거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기회는 없었기에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하이데거를 주인공으로 서양철학사의 주요 인물들을  <하이데거 극장>에서 만나고 보니, 쉽게 손에서 떨쳐버리기도 어렵다. 그렇게 한 번 읽었으나, 리뷰로 다 정리하기에는 많이 부족함이 들기에 본문을 다시 리뷰로 정리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워본다.


 진리란 하이데거의 용어로 하면 '비은폐성'이다.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다. 그런데 진리의 본질은 비밀이다. 비밀은 감추어져 있되 그냥 감추어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음이다. 우리가 비밀을 비밀로 알려면, 그 비밀이 비밀로서 알려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감추어진 것을 향해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본질은 바로 이렇게 감추어진 채 드러난 비밀이다. 친밀성이라는 것은 바로 진리의 본질이며 비밀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78


 <하이데거 극장>에서는 하이데거의 이중적이며 모호한 면이 드러난다. 나치당원이었지만,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2014년 그의  노트에 드러난 반유대주의 성향. 그는 어쩌면 자신의 인생 속에 진리, 현존 등의 이중적인 면을 투영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의 어려운 사상을 이해하는 열쇠를 그의 삶속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글을 갈무리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하이데거는 나치의 인종적/생물학적 반유대주의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나치의 반유대주의의 조처를 혁명 과정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부수적 사태로 이해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하이데거에게 인종적 반유대주의는 아니더라도 특정한 형태의 반유대주의적태도가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45


 "x가 c라면 x는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이다'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존재가 없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서 "그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사라진다. 기술이론에 따르면 '존재'는 기술 어구를 통해서만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웨이벌리>의 그 저자는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지만, "스콧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틀린 어법, 아니 틀린 구분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시작된, '실존 existence'를 둘러싸고 2000년 동안 지속된 지리멸렬한 수수께끼가 풀린다. _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 p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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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10-16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과연 하이데거 같은 나치 히틀러의 악행에 동조한 자의 철학을 공부해야 하나 회의감이 느껴집니다..

겨울호랑이 2022-10-16 21:42   좋아요 1 | URL
김민우님 말씀 충분히 이해됩니다. 사상과 행적을 분리할 수 없기에, 인간 하이데거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발자취가 20세기 사상사에 너무도 뚜렷하기에 이를 쉽게 무시하기도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20세기 인류 문명의 명암이 있듯이, 하이데거의 사상 또한 명암이 있음을 인지하고 접근해야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해 봅니다...
 

중국 한漢 왕조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했던 낙랑군을 근대적 시각에 입각해 식민지로 규정하고, 이를 타율성론他律性論의 정립 차원에서 적극 활용하였던 것은 바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었다. 2,000여 년 전 중국왕조의 일시적인 영역 확장이 우리 ‘민족’의 기원을 부정하고 한국사의 시초를 식민지로 만든다는 발상은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유사역사학자들의 행태는 학문과 교육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전체주의로 몰아갈 위험이 크다. 우리 사회의 ‘건전한 지성’을 유지하고 국가권력과 쇼비니스트chauvinist들의 결탁을 통한 역사왜곡 사태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시민들 각자의 보다 성숙한 역사인식과 경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요컨대 탈실증주의는 과학이 지식을 얻는 특권적 방식이 아니며, 그저 서구 문화의 창조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비판이론,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해체주의를 비롯해 수많은 ‘주의’가 이 시기 동안 발생하게 되었다.

종교를 이유로 과학에 반대하는 창조론자들을 강력히 비난한 굴드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이유로 과학에 반대했다. 덧붙이자면 굴드가 비판한 창조론자들은 여전히 과학계에서 진화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이라며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굴드의 공격을 언급하곤 한다.

정치적 의제를 알리는 데 관심이 있는 급진적 좌파들이 학계로 진출하면서 학문의 가치가 의심받기 시작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급진적 좌파들이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지닌 학자들하고만 연대하며 예술과 인문학이 늪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후 급진적 좌파는 사회과학 분야에도 발을 들이기 시작했는데, 특히 과학적 방법론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 분야를 공략했다. 철학, 정치학, 사회학, 심지어 심리학과 인류학까지 전쟁터가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관성을 강조한 결과, 급진적 좌파들에 의해 기이한 주장들이 제안되었다. 그 예로 서구 문명이 아프리카에서 훔쳐온 것이라는 아프리카 중심주의,39 수많은 반증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생태학적으로 조화롭고, 이웃과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는 주장,40 인도-유럽 문명 이전에 여성들이 이끄는 평화로운 페미니스트 신이교neopagan 문명이 존재했다는 주장41을 들 수 있다.

쿤은 패러다임이란 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의 패러다임을 대체한다고 믿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의 이론이 틀렸다고 인정할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쿤이 하버드대학교에서 뉴턴의 운동법칙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놀라운 주장이다.2 사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이론을 발전시킨 것이지 대체한 것이 아니다.

귀납-연역적 추론과 반대로, 가설-연역적 추론은 관찰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 원인에 대한 가설을 세운다. 우리는 가설과 초기 조건을 바탕으로 전제를 세우고 이로부터 특정한 의미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방법으로 연역된 내용에는 새로운 예측도 있을 수 있다. 창의적 과학에서 가설-연역적 추론은 상상력과 비판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탐구의 대화다. 가설을 수립하는 데 상상력이 동원된다 해서 이 과정이 비논리적illogical인 것은 아니다. 대신 ‘논리적 과정이 아닌 방식non-logical’으로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가설이 수립되고 나면 이 가설은 비판의 칼날 아래 놓인다.9

아직 완전히 이해된 것은 아니지만 DNA 내에 단백질 정보를 담지 못한 부분에 그 열쇠가 있는 것 같다. DNA의 거의 90% 가까이는 단백질 만드는 것과 상관없는 염기서열이다. 중심원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부분은 있으나 마나 한 부분이다. 아마도 교차돌연변이에나 쓸모 있는 쓰레기장 같은 거다. 그래서 정크 DNAjunk DNA라 부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부분이 DNA에서 발현의 결정에 관여한다.

생명은 자신을 복제한다.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DNA에 저장해두고 이것을 복제한다. 복제의 전 과정은 물리적이다. DNA로부터 자신을 만드는 과정 또한 물리적이다. 과정에 참여하는 개별 원자와 분자들은 열운동을 할 뿐이다. 모든 과정은 양자역학에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생명이 왜 자신을 복제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생명은 왜 영원히 존재하길 바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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