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지지자들은 여전히 1990년대와 월스트리트, 그리고 기술업계의 호황을 자축하고 있었지만 1970년대 이후 임금은 생산성을 따라잡지 못했다. 해밀턴프로젝트와 관련된 엘리트 지도층 인사들 입장에서 보면 비난의 대상은 분명했다. 미국의 교육기관들은 젊은 세대에게 세상을 앞장서 헤쳐나가자면 꼭 필요한 교육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을 세계화의 물결 속으로 이끈 건 다름 아닌 클린턴 행정부였다. 1995년 11월, 미국은 중국에게 새롭게 창설된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에 가입할 것을 권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자 미국은 인권 문제와 법치, 그리고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중국 공산당과의 대립을 포기한다. 그 대신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이른바 글로벌리스트들은 상업적 통합이라는 강력하고도 비정한 힘이 언젠가 때가 되면 중국을 세계 질서의 "이해당사자"로 만들게 될 거라고 장담했다.
중국의 국가외환관리국(國家外換管理局)에서는 안전하고 확실한 투자처를 찾고 있었는데, 안전한 자산관리를 위한 이들의 선택은 바로 미국 장기국채와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유가증권이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연준이 단기금리를 인상했지만 장기채권시장에서의 금리가 이를 따라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장기채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보니 채권의 가격은 올라가고 그에 따른 수익은 줄어들었던 것이다.
미국의 많은 교역 대상국은 달러화에 대한 자국 환율을 고정함으로써 달러화의 약세를 막았고 그 바람에 미국의 경쟁력은 바라던 만큼 회복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조치는 동시에 달러화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도 막아 제대로 된 금리 인상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현상이 공황상태를 불러온 은행 파산, 그리고 전 세계의 신용경색과 함께 어떻게 금융위기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는지 설명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부동산은 단순히 재산을 구성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융자를 위한 가장 중요한 형태의 담보물이라는 사실이다. 경기순환을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하는 동시에 주택 가격 동향을 금융위기와 결부한 건 다름 아닌 모기지 관련 채무였다
고정금리의 장기 모기지를 통해 집을 마련한 사람들에게 브레턴우즈 시대 이후 있었던 인플레이션은 뜻밖의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금리는 고정되어 있는 반면 이들이 지고 있던 채무의 실제 가치는 점점 더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자금을 빌려준 은행들의 경우는 반대로 재앙에 가까운 상황들이 이어졌다
미국의 모기지 관련 대출자들은 기존의 대출금을 일찍 상환하고 낮은 금리로 갈아탈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렇게 되면 대출자들은 전체 상환 비용을 줄여나갈 수 있는 데다가 또 대출자나 채무자 중에는 채권자들에 비해 더 높은 소비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통해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 13 그렇지만 대출기관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모기지 관련 계약은 대단히 편향된 제도일 수 있었다.
저축은행 사태 이후 모기지 차입자들에게 직접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들로부터 위험을 바깥으로 분산하고 모기지 상품을 다양한 단계의 이익과 위험을 제공할 수 있는 증권으로 바꿔 투자자들을 끌어모으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리고 이 방식은 실제로도 효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저축과 대출의 사업 모델과 비교하면 이런 증권화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렇게 위험이 분산되었다는 이유로 제일 처음 진행되는 대출 업무를 주의 깊게 심사해야 한다는 것을 자칫 망각하게 한 것은 아닐까? 자금조달 부문과 상품의 발행을 분리함으로써 이 새로운 제도는 대출 과정을 주의 깊게 감시해야 할 이유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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