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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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티치아노는 말년에 "종교의 구원자"라는 주제로 회화 2점을 그렸다. 두 작품은 각각 펠리페 2세와 막시밀리안 2세에게 보내졌다(p102)... 거의 똑같은 이 2점의 그림에서 티치아노는 중앙 유럽계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톨릭 신앙에 취한 서로 다른 접근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자는 평화와 타협이라는 선물을 들고 오는 반면, 후자는 이제 막 레판토에서 승리를 거둔 호전적인 스페인의 칼을 가지고 온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103/329

마틴 래디 (Martyn Rady)의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The Habsburgs: To Rule the World>에는 두 나라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등장한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국. 그렇지만, 이베리아 반도라는 비교적 단일한 지역을 지배하는 스페인과 중부 유럽에 흩어져 있는 여러 영지를 관리해야 하는 오스트리아의 지정학적 위치는 합스부르크의 서로 다른 두 선택을 만들어냈다. 관념과 무력의 제국. 이들은 같은 가문에서 나온 서로 다른 이란성 쌍둥이들이었다.

(유럽전역에 배치된 영지들에서) 19세기와 20세기까지 지속된 합스부르크 가문 치세의 특징이 엿보인다. 제국의 각 부분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정부, 법률, 귀족, 명문가, 의회 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각 부분은 통치자 개인에 의해서만 한데 모인, 거의 독립적인 나라들이었다. 각 부분의 거리를 감안하면 이러한 부조화 현상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었지만, 서로 큰 차이점이 있는 여러 민족들이 부재하는 주권자에 의한 지배를 감수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적 정책의 소산이기도 했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24/329

카를 5세(Carolus V, 1500~1558)과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 1527~1598) 시기를 거치며 스페인은 '가톨릭의 수호자'로 30년 전쟁에 참전하는 한편, 이슬람 세력에 맞서 사제왕 요한(Presbyter Johannes)의 나라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거대한 식민제국을 만들면서 대항해시대의 첫 문을 열어젖히며 빠른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렇지만, 가톨릭을 제외한 타종교에 대한 과도한 배타성은 제국을 그보다 더 빠르게 몰락의 길로 끌어내렸다.

개신교 선전자들(과 유대인들)이 볼 때, 펠리페 2세의 치세는 군주정이 얼마나 쉽게 폭정과 종교적 박해를 자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였다. 사실, 1649년에 잉글랜드의 찰스 1세가 재판을 받을 당시에 쓰인 몇 가지 수사적 표현은 원래 펠리페 2세를 겨냥한 비난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저술가들과 극작가들이 볼 때, 스페인은 펠리페의 판도 확장과 가톨릭교를 향한 그의 단호한 헌신에 힘입어 신앙을 수호할 사명을 지닌 제국, 고대 로마 제국의 운명만큼 혹은 그보다 더 위대한 운명을 타고난 제국이었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95/329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은 바로 중부 유럽에 위치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제국이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역시 가톨릭 국가이며 30년 전쟁에 참여할 정도로 중요하지만, 그들은 종교를 칼이 아닌 관념과 결합시켰다. 스페인은 '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전사로 행동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제국의 이념을 통일시키는 정책을 통해 다양한 영지를 하나의 제국으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과념과 이미지 그리고 텍스트의 문화 제국. 그것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이었다.

AEIOU라는 두 문자어와 성 게오르크 예배당 서쪽 벽의 문장, 그리고 급성장세의 연대기 문학은 모두 동일한 주제를 가리켰다. 오스트리아는 그저 하나의 지역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통치자들은 위대해질, 그리고 사람들을 다스릴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바로 그런 땅이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땅이 아니라 제국, 사명, 상속, 운명 같은 여러 주제들이 한데 모인 후천적 구성물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지리적 요인과는 별개로 성립된 통치 가문을 향한 인련의 믿음이 특징인 곳이었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57/329

막시밀리안의 통치 방식은 인품과 친림親臨에 의존했고, 그 두 가지가 부족할 때에는 이미지로 만족해야 했다. 자신의 얼굴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로 통하도록 하려는 막시밀리안의 확고한 의지는 현존하는 수천 점의 초상화를 통해서 드러난다(p60)... 막시밀리안은 3편의 자서전적 우화를, 개별 지식 분과의 정수를 뽑아내서 여러 권의 백과사전을 만들기 위한 대규모 편찬 사업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백과사전의 각 부에는 요리, 승마술, 매 훈련법, 원예학, 포술砲術, 펜싱, 도덕률, 성채와 도시, 마술, 연애 기술 등과 관계있는 모든 지식이 요약될 예정이었다... 방대한 편찬 사업의 주제는 막시밀리안 자신이었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 p62/329

제국을 결합시키는 힘이 중앙집권적 권력이 아닌 중앙집권적 이념이었기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스페인보다 더 오랜 시간을 유지될 수 있었다. 계몽시대 초기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로 대표되는 계몽군주들의 힘으로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는 빈 체제를 설립하면서 반(反)혁명의 중심이 될 수 있었고, 관료제를 기반으로 도구적 이성의 계몽시대를 열었지만, 뒤이어 밀어닥친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시대 이념 속에 결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뒤로 사라지고 만다.

프란츠 요제프의 절대주의는 민족주의의 싹을 틔우는 배양기였다. 1848년 이전까지 민족 정체성이란 귀족과 농민, 도시민과 성직자 같은 신분을 초월해서 종교나 지역이나 혈연 등과 경쟁하는 사회적 접착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민족 정체성은 지배적인 힘으로 탈바꿈했고, 중앙집권화와 획일성을 추구하는 억압 체제에 의해서 그 잠재력이 강화되었다(p242)... 민족 정체성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결정의 문제였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243/329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 동원령을 알리는 벽보가 15개 언어로 작성되어 곳곳에 나붙었다. 문제는 15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전선으로 수송하는 병참학적 방법과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방법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장교들은 민족정체성을 초월하는 "제국을 향한 애국심"에 불타오를 수 있었지만, 사병들은 그렇지 않았다. 해법으로 떠오른 것은 민족 감정에의 호소였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272/329

저자 마틴 레디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를 통해서 바로크, 문화, 보편적인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습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본문에서 독자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의 두 흐름을 느낄 수 있다. 하나는 '관념의 제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무력의 제국' 스페인 합스부르크보다 더 오래 생존하면서, '칼 보다 강한 펜'을 실증하는 19세기까지 흐름이며, 다른 하나는 '세기말 빈' 이후 제국의 보편성을 대체하는 '민족의식' 이라는 시대정신이 만드는 제국의 해체 과정이다.

이러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특성과 흐름을 알고나면, 바다에서는 대영제국에게 제해권을 빼앗기고, 대륙에서는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사이에서 무기력한 제국의 모습을 보여준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해 조금은 다른 관점이 생기지 않을까...

합스부르크 제국의 개념에는 보편성이 담겨 있었다. 즉,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결코 단일한 민족 집단을 바탕으로 본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었다. 로마노프 가문의 전제적 제국은 러시아적 정체성을 띠었고, 19세기 말엽의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점점 터키화되었지만, 중앙 유럽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민족 정체성을 초월해 있었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28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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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커이는 부다페스트를 "발칸 반도의 시카고"로 만들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곳이 굶주린 도시로 전락한 원인인 비정상적인 경제 상태를 간과한 채 부다페스트를 몰나르 페렌츠가 1901년에 발표한 소설 제목처럼 여가의 도시로 묘사하기도 했다. 보다 뼈아픈 점은, 헝가리를 다룬 6권에서 그가 헝가리 북부에 거주하며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펄로츠인들과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 지역에 거주하는 수백만 명의 루마니아인들에게 동일한 분량의 지면을 할애하면서 소수 민족을 의도적으로 경시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헝가리의 유대인들에 관한 항목에는 독일어 원본에는 없는 반유대주의적인 내용이 수록되었다.

「신자유언론」은 1908년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언젠가 황제 이후를 전망하게 된다면 그 시점은 우리의 생각이 어수선하고 불안해졌을 때일 것이다. 황제가 이 나라를 화합과 평화와 화해로 이끌 수 있도록 부디 이 군주국이 황제의 노련한 손길에 힘입어 천명을 누렸으면 한다." 8년 뒤, 황제는 그런 목표를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미완으로 끝난 프란츠 요제프 치세의 의미는, 그의 개인적 좌우명인 "하나된 힘으로Viribus unitis"보다 그의 유언인 "왜 지금이어야 하지?"에 더 정확하게 포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이 전해준 정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종학"이라는 새로운 여과기를 거쳐야 했다. 과학자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세계인을 9개의 백인종과 9개의 흑인종으로 나눈 사람은 아우구스틴 바이스바흐였다. 그의 분류법에 따르면 남부 아프리카의 산족, 즉 부시맨이 모든 인종 중에서 서열이 가장 낮았다(그는 부시맨이 유인원과 가깝다고 보았다. 그리고 유대인은 백인종 중에서 서열이 가장 낮았다.

빈 인류학회는 바이스바흐의 접근법을 지지했다. 빈 인류학회의 회장은 인종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특질과 풍습에 대한 조사뿐 아니라 "골상학적, 언어학적 연구"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부에 많이 있다고 강조했다. 빈 인류학회는 우월한 인종으로 추정되는 중앙 유럽의 "북방계"에 관한, 그리고 중앙 유럽 지역의 인종적 혈통을 정제하는 데에 진화론적 자연 선택의 원리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연구를 후원했다.

자연사 박물관과 예술사 박물관은 역사주의의 관례에 발맞춰 르네상스 전성기 양식으로 지어졌다. 여기에는 예술과 학문의 융성기인 16세기를 상기시키고 프란츠 요제프의 후원으로 예술과 학문이 부활했음을 찬양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두 박물관이 개관할 무렵, 건축의 흐름은 바로크 부흥 양식 또는 신新바로크 양식 쪽으로 바뀌었다.

바로크 양식은 수도인 빈에 이미 자리 잡은 양식과 어울렸다. 생동감 있고 재기발랄한 바로크 양식은 베를린의 "냉정한 고전주의"와 절제보다 빈과 더 잘 어우러졌다. 끝으로, 바로크 양식은 초민족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바로크 양식은 "민족들을 통합하는" 데에 기여했다. 알베르크 일그에 따르면 바로크 양식은 단일화된 건축 언어를 제시함으로써 "각 민족의 개별성을 해체해 전 세계를 단일한 통치권으로 포용할" 힘이 있었다.

신바로크 양식이 세계 공통어를 추구한 반면, 제국 곳곳의 현지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은 독특함과 차이를 강조하는 민족적 양식을 개발하려고 애썼다.
신바로크 양식은 특유의 과도한 장식과 정교한 외관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현대주의 건축가인 아돌프 로스는 신바로크 양식의 불필요한 첨가 방식을 문신에 비유했다.

19세기 말엽의 빈에서는 예술과 건축 분야 외에 학술 분야에서도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며 융성기를 맞이했다. 빈은 지크문트 프로이트,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20세기 음악 혁명의 주도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 사교 모임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한 오토 바우어와 카를 레너 등을 배출한 도시였다. 그들이 펼친 노력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탐구 대상의 껍질을 벗겨내 그 속의 지적 구성 요소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각 탐구 대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과감한 언사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평화를 강력히 옹호했다. 그는 제국 군대의 사정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고, 제국 군대가 대규모 전쟁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장갑차를 보유한 기계화 부대의 창설, 항공기, 전화 통신, 최신형 전함의 도입 같은 군대의 현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을 독일로부터 떼어놓을 가망이 희박해지자 연합국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국무 장관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유럽의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라고 요구했고, 1918년 6월에 윌슨 대통령은 "슬라브 인종의 모든 분파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연합국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해체하고 독립적인 민족 국가들로 대체하는 방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 운명이 독일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몰락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의 군사적 패배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사적 패배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불가리아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잡다한 장식물을 빼앗겨 영토가 크게 줄어든 터키와 마찬가지로,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반면 합스부르크 제국은 완전히 붕괴했고, 영토는 6개의 국가로 나뉘었다. 그 폐허는 거대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접착제는 이미 약한 것으로 밝혀졌고, 1918년에 이르렀을 때에는 여러 부분을 결속하지 못했다. 정체성과 충성심은 민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왕가가 아니라 민족이라는 그릇에 희망과 애국심을 담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1918년에 무너졌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영토와 정치를 뛰어넘는 사안과 연관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개념은 복잡했다. 그 개념의 핵심에는 카롤루스 대제와 슈타우펜 가문 황제들이 복원한 로마와 로마 제국의 유산이 놓여 있었다(초창기의 합스부르크 가문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카롤루스 대제와 슈타우펜 가문 황제들의 상속자라고 자부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합스부르크 제국 개념의 한 가지 측면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사례였고, 가장 높은 자리인 황제직을 차지하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야심은 그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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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은 패턴화된 움직임을 통해 완성되며, 패턴을 만드는 직접적인 지시는 신경계로부터 나온다. 달리 말해 유전자가 직접 행동을 일으킨다기보다는, 그러한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신경계를 만들고 자극에 대한 반응성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다.

유전자가 어떻게 행동을 조절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과정은 유전자가 작용하는 신경회로를 찾아내고, 그 회로에서 유전자의 역할을 규명하는 것이다. 문제는 크고 복잡한 포유류의 뇌뿐만 아니라, 10만여 개의 뉴런으로 구성된 초파리의 뇌에서도 이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신경회로를 이루고, 각각의 신경회로들이 어떻게 특정 행동을 조절하며, 어떤 유전자들이 이 과정에 관여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는 점이다.

행동을 조절하는 신경회로의 물리적 실체는 바로 커넥텀connectome이라고 불리는 뉴런들의 물리적 연결 네트워크다. 브레너의 연구팀은 존 화이트John White를 중심으로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벌레의 연속 단면 이미지를 분석해 모든 뉴런을 찾아내고, 이들이 이루고 있는 시냅스를 규명하여 전체 커넥텀을 그려내고자 했다.

시간에 대한 고려는 드레이크 방정식의 마지막 계수인 L 값을 다루면서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될 것이다. 먼 훗날 화성과 유로파, 타이탄과 엔셀라두스에서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탄생한다면 태양계의 일생 전체를 관통하는 태양계 내의 fi 값이 재조정될 것이다. 애초에 이들 행성과 위성에 생명체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fi 값은 1이 될 것이다. 훗날 (생명체가 탄생했다는 가정하에서) 이들 모두에서 지적생명체가 출현한다면 fi 값은 역시 1이 된다. 이들 천체 모두에서 탄생한 생명체가 그냥 단순한 형태의 박테리아나 미생물 수준에서 진화를 멈춘다면 fi 값은 0.2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들 사이에 여러 가지 조합이 생길 수 있으므로 fi 값은 0.2에서 1 사이 어느 곳을 차지할 것이다.

드레이크 방정식의 다섯 번째 계수 fi는 실제로 생명이 탄생한 행성(또는 위성) 중에서 생명체들이 진화해 지적생명체가 출현한 행성의 비율에 관한 계수다. 여기에서 시작점은 생명이 이미 탄생한 상황인 행성이나 위성이다. 그런 천체 중 얼마나 많은 곳에서 지적생명체가 태동했는지를 따져 보자는 것이다.
현재 시점까지 우주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된 곳은 지구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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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북아메리카에서 계몽주의는 국민 주권의 확대와 통치권 제한 쪽으로, 개인의 자유와 시민 권리의 보장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자유의 과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중앙 유럽에서 계몽주의는 규제를, "국가의 과학"이나 "질서의 과학"을, 그리고 주권자가 규정하는 공익에 개인이 종속된 상태를 지향했다. 중앙 유럽판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과 신민들의 온갖 임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복종과 충성과 근면을 통해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통치자가 채택한 모든 방법과 수단을 증진하는 것."

오랫동안 교양 있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의 특기로 여겨졌던 프랑스어가 이제 일상적인 독일어에 자리를 내주었고, 사람들은 커피점, 도서관, 집회소 등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가족끼리 주말에 공원으로 소풍을 즐기러 나가거나 케이크를 사 먹으려고 외출했다.

왕실도 명망 있는 중산층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항상 군복을 입었던 요제프 2세와 달리 프란츠 2세는 평범한 외투 차림으로 쇼핑을 즐겼고, 황후인 카롤리네 아우구스테는 충실한 주부의 이미지를 연출했다.

메테르니히의 진정한 목적은 특히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와 관련하여 주군인 프란츠 2세의 영향력과 신생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가 정통성을 강조한 것은 그동안 자신이 오스트리아에 유리하도록 조성해온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자 내세운 구실일 뿐이었다.

메테르니히의 업적은 유럽의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폴레옹이 내팽개친 유럽의 지도는 메테르니히 덕분에 복원되었고, 신생 오스트리아 제국은 메테르니히의 활약으로 차지한 주도적 위치를 바탕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탈러 은화를 아프리카까지 퍼트릴 수 있었다. 1814년과 1815년 사이에 빈에서 메테르니히가 구획 과정에 참여한 뒤에 보전하려고 애쓴 국경선은 유럽 국가 체제의 광범위한 윤곽선을 이루면서 1914년까지 유지되었다. 중심부가 안정되자 유럽 열강 간의 충돌은 "주변부화되었고", 유럽의 강대국들은 동쪽의 오스만 제국으로, 그리고 남쪽의 식민지를 둘러싼 경쟁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결과가 바로 1867년의 대타협이었다. 데아크 페렌츠가 마련한 그 타협안을 통해서 헝가리는 독립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합스부르크 제국에 포함되었다. 즉, 4월법과 국사 조칙이 조화를 이룬 셈이었다. 1867년의 대타협에 따라서 헝가리 왕국은 정부와 의회(고위 인사들의 상원과 선출직 의원들의 하원으로 나뉘었다)를 가지게 되었지만, 황제가 헝가리 국왕으로서 정부를 임명했다.

군주들은 최초의 근대적 유명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구경거리였다. 그들의 이미지는 사진과 대량 생산된 판화를 통해서 "과장된" 속성을 띤 상품으로 변모했다. 그들의 죽음 역시 일상과는 동떨어진 일, 생활 속에 의미와 강렬함을 주는 사건이 되었다. 1867년 막시밀리안의 죽음은 유럽 전역에서 잇달아 발생할 주권자 암살 사건의 예고편이었다.

이전의 군주들과 왕족들은 본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신이 결정한 통치권의 신화적 자기 과대평가와 증거를 강조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열심히 설정했다. 그러나 왕가들은 대중의 상상력을 함양할 힘을 잃어버렸고, 개선문과 장례용 영구대의 시절은 지나버렸다. 유럽의 대다수 지역에서 이제 왕가들을 표현하는 방식의 틀은 언론에 의해서 정해졌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 그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가장 강력하고 반향이 큰 이미지는 죽음이라는 구경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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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산형 동료 시민 정치가 단순히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폭넓은 분야의 시민들을 더 친밀하게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거버넌스의 심화를 이끈다는 점에 대한 강조가 중요하다.

동료 시민 거버넌스는 정책 수립 과정에서 대의민주주의에서 강조하는 관행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다 보여 준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합의 도출에 부여하는 가중치에 있다. 기존의 입법 의사결정은 일반적으로 합의 도출을 염두에 두고 시도된다. 하지만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제를 충족하기 위한 교섭과 절충을 거치면서 편의적 의사결정인 경우가 많다. 이와 달리 심의적 거버넌스는 모두가 수긍하는 ‘예스’에 도달하는 절차를 구축해서 유리한 상황을 모색한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예산, 공교육, 치안 유지는 정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2세기 동안 지속된 대의민주주의 이후 전 세계의 시민들은 자신의 이익과 관심사, 열망이 무시되거나 제한된다는 확신으로 지쳐 가고 있다. 우리 인간 종이 야생으로 돌아가고 있는 행성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번성할 것인가라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도전에 직면한 바로 그 순간에 대의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소외와 신뢰의 상실이 발생했다.

진보의 시대에 평등은 자율성의 파생물로서만 가치가 있다. 자율성에 대한 신념이 전제되지 않고는 평등을 옹호할 수 없다. 스스로 자율적 행위자라고 믿는 만큼 평등을 요구할 것이며 그것이 다반사가 된다는 뜻이다. 모든 개인의 본질이 자율성의 추구라면 평등한 대우에 대한 욕구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자신의 자율성 확보를 보장하기 위해 언제나 조심하고 부단히 경계하는 그림자 같은 동반자로서 말이다.

하지만 공감 충동은 양육의 방식과 일생에 걸친 연속적인 애착 대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공감은 역사와 함께 진화하고 사회의 진화 그리고 (사회과학자들이 거의 탐구하지 않은 사회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문명의 흥망성쇠와도 깊이 얽혀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인프라가 구축되고 전개될 때 공감 역시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확장된다. 각 문명의 인프라는 구성원들이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서사적 세계관과 함께 고유한 경제적 패러다임, 새로운 사회 질서, 새로운 형태의 거버넌스, 생태 발자국 등을 수반한다.

윌슨은 다른 모든 생물 종과 마찬가지로 인간 종의 본질적 욕구는 지배가 아닌 번성이며 생명애는 동료 생물체 및 자연계와 공감하려는 우리의 타고난 성향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며 생명의 진화를 더 나은 장으로 옮겨 놓았다. 단 한 방에 우리 인간 종을 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투쟁에서 자연과 화합하고자 하는 타고난 유전적 성향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우리 인간 종은 그렇게 함으로써 번성한다.

가장 흥미로운 발견은 나이가 어릴수록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 데 반해, 나이가 많을수록 환경을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유전적 구성에 포함된 생명애 지향성을 타고나지만, 전통적인 학습 과정을 통해 환경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학습함으로써 그것이 육성되기보다 오히려 소멸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회복력 시대에 부합하도록 인류의 이야기를 다시 설정하려면 우리의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이의 유전적 구성에 내재된 타고난 생명애 충동이 유치원 교육에서 발현되고 번성하도록 하고 학교교육, 나아가 직업 생활에서도 지속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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