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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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티치아노는 말년에 "종교의 구원자"라는 주제로 회화 2점을 그렸다. 두 작품은 각각 펠리페 2세와 막시밀리안 2세에게 보내졌다(p102)... 거의 똑같은 이 2점의 그림에서 티치아노는 중앙 유럽계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톨릭 신앙에 취한 서로 다른 접근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자는 평화와 타협이라는 선물을 들고 오는 반면, 후자는 이제 막 레판토에서 승리를 거둔 호전적인 스페인의 칼을 가지고 온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103/329

마틴 래디 (Martyn Rady)의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The Habsburgs: To Rule the World>에는 두 나라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등장한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국. 그렇지만, 이베리아 반도라는 비교적 단일한 지역을 지배하는 스페인과 중부 유럽에 흩어져 있는 여러 영지를 관리해야 하는 오스트리아의 지정학적 위치는 합스부르크의 서로 다른 두 선택을 만들어냈다. 관념과 무력의 제국. 이들은 같은 가문에서 나온 서로 다른 이란성 쌍둥이들이었다.

(유럽전역에 배치된 영지들에서) 19세기와 20세기까지 지속된 합스부르크 가문 치세의 특징이 엿보인다. 제국의 각 부분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정부, 법률, 귀족, 명문가, 의회 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각 부분은 통치자 개인에 의해서만 한데 모인, 거의 독립적인 나라들이었다. 각 부분의 거리를 감안하면 이러한 부조화 현상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었지만, 서로 큰 차이점이 있는 여러 민족들이 부재하는 주권자에 의한 지배를 감수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적 정책의 소산이기도 했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24/329

카를 5세(Carolus V, 1500~1558)과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 1527~1598) 시기를 거치며 스페인은 '가톨릭의 수호자'로 30년 전쟁에 참전하는 한편, 이슬람 세력에 맞서 사제왕 요한(Presbyter Johannes)의 나라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거대한 식민제국을 만들면서 대항해시대의 첫 문을 열어젖히며 빠른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렇지만, 가톨릭을 제외한 타종교에 대한 과도한 배타성은 제국을 그보다 더 빠르게 몰락의 길로 끌어내렸다.

개신교 선전자들(과 유대인들)이 볼 때, 펠리페 2세의 치세는 군주정이 얼마나 쉽게 폭정과 종교적 박해를 자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였다. 사실, 1649년에 잉글랜드의 찰스 1세가 재판을 받을 당시에 쓰인 몇 가지 수사적 표현은 원래 펠리페 2세를 겨냥한 비난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저술가들과 극작가들이 볼 때, 스페인은 펠리페의 판도 확장과 가톨릭교를 향한 그의 단호한 헌신에 힘입어 신앙을 수호할 사명을 지닌 제국, 고대 로마 제국의 운명만큼 혹은 그보다 더 위대한 운명을 타고난 제국이었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95/329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은 바로 중부 유럽에 위치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제국이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역시 가톨릭 국가이며 30년 전쟁에 참여할 정도로 중요하지만, 그들은 종교를 칼이 아닌 관념과 결합시켰다. 스페인은 '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전사로 행동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제국의 이념을 통일시키는 정책을 통해 다양한 영지를 하나의 제국으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과념과 이미지 그리고 텍스트의 문화 제국. 그것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이었다.

AEIOU라는 두 문자어와 성 게오르크 예배당 서쪽 벽의 문장, 그리고 급성장세의 연대기 문학은 모두 동일한 주제를 가리켰다. 오스트리아는 그저 하나의 지역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통치자들은 위대해질, 그리고 사람들을 다스릴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바로 그런 땅이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땅이 아니라 제국, 사명, 상속, 운명 같은 여러 주제들이 한데 모인 후천적 구성물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지리적 요인과는 별개로 성립된 통치 가문을 향한 인련의 믿음이 특징인 곳이었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57/329

막시밀리안의 통치 방식은 인품과 친림親臨에 의존했고, 그 두 가지가 부족할 때에는 이미지로 만족해야 했다. 자신의 얼굴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로 통하도록 하려는 막시밀리안의 확고한 의지는 현존하는 수천 점의 초상화를 통해서 드러난다(p60)... 막시밀리안은 3편의 자서전적 우화를, 개별 지식 분과의 정수를 뽑아내서 여러 권의 백과사전을 만들기 위한 대규모 편찬 사업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백과사전의 각 부에는 요리, 승마술, 매 훈련법, 원예학, 포술砲術, 펜싱, 도덕률, 성채와 도시, 마술, 연애 기술 등과 관계있는 모든 지식이 요약될 예정이었다... 방대한 편찬 사업의 주제는 막시밀리안 자신이었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 p62/329

제국을 결합시키는 힘이 중앙집권적 권력이 아닌 중앙집권적 이념이었기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스페인보다 더 오랜 시간을 유지될 수 있었다. 계몽시대 초기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로 대표되는 계몽군주들의 힘으로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는 빈 체제를 설립하면서 반(反)혁명의 중심이 될 수 있었고, 관료제를 기반으로 도구적 이성의 계몽시대를 열었지만, 뒤이어 밀어닥친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시대 이념 속에 결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뒤로 사라지고 만다.

프란츠 요제프의 절대주의는 민족주의의 싹을 틔우는 배양기였다. 1848년 이전까지 민족 정체성이란 귀족과 농민, 도시민과 성직자 같은 신분을 초월해서 종교나 지역이나 혈연 등과 경쟁하는 사회적 접착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민족 정체성은 지배적인 힘으로 탈바꿈했고, 중앙집권화와 획일성을 추구하는 억압 체제에 의해서 그 잠재력이 강화되었다(p242)... 민족 정체성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결정의 문제였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243/329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 동원령을 알리는 벽보가 15개 언어로 작성되어 곳곳에 나붙었다. 문제는 15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전선으로 수송하는 병참학적 방법과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방법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장교들은 민족정체성을 초월하는 "제국을 향한 애국심"에 불타오를 수 있었지만, 사병들은 그렇지 않았다. 해법으로 떠오른 것은 민족 감정에의 호소였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272/329

저자 마틴 레디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를 통해서 바로크, 문화, 보편적인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습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본문에서 독자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의 두 흐름을 느낄 수 있다. 하나는 '관념의 제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무력의 제국' 스페인 합스부르크보다 더 오래 생존하면서, '칼 보다 강한 펜'을 실증하는 19세기까지 흐름이며, 다른 하나는 '세기말 빈' 이후 제국의 보편성을 대체하는 '민족의식' 이라는 시대정신이 만드는 제국의 해체 과정이다.

이러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특성과 흐름을 알고나면, 바다에서는 대영제국에게 제해권을 빼앗기고, 대륙에서는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사이에서 무기력한 제국의 모습을 보여준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해 조금은 다른 관점이 생기지 않을까...

합스부르크 제국의 개념에는 보편성이 담겨 있었다. 즉,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결코 단일한 민족 집단을 바탕으로 본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었다. 로마노프 가문의 전제적 제국은 러시아적 정체성을 띠었고, 19세기 말엽의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점점 터키화되었지만, 중앙 유럽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민족 정체성을 초월해 있었다. _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p28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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