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북아메리카에서 계몽주의는 국민 주권의 확대와 통치권 제한 쪽으로, 개인의 자유와 시민 권리의 보장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자유의 과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중앙 유럽에서 계몽주의는 규제를, "국가의 과학"이나 "질서의 과학"을, 그리고 주권자가 규정하는 공익에 개인이 종속된 상태를 지향했다. 중앙 유럽판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과 신민들의 온갖 임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복종과 충성과 근면을 통해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통치자가 채택한 모든 방법과 수단을 증진하는 것."

오랫동안 교양 있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의 특기로 여겨졌던 프랑스어가 이제 일상적인 독일어에 자리를 내주었고, 사람들은 커피점, 도서관, 집회소 등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가족끼리 주말에 공원으로 소풍을 즐기러 나가거나 케이크를 사 먹으려고 외출했다.

왕실도 명망 있는 중산층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항상 군복을 입었던 요제프 2세와 달리 프란츠 2세는 평범한 외투 차림으로 쇼핑을 즐겼고, 황후인 카롤리네 아우구스테는 충실한 주부의 이미지를 연출했다.

메테르니히의 진정한 목적은 특히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와 관련하여 주군인 프란츠 2세의 영향력과 신생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가 정통성을 강조한 것은 그동안 자신이 오스트리아에 유리하도록 조성해온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자 내세운 구실일 뿐이었다.

메테르니히의 업적은 유럽의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폴레옹이 내팽개친 유럽의 지도는 메테르니히 덕분에 복원되었고, 신생 오스트리아 제국은 메테르니히의 활약으로 차지한 주도적 위치를 바탕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탈러 은화를 아프리카까지 퍼트릴 수 있었다. 1814년과 1815년 사이에 빈에서 메테르니히가 구획 과정에 참여한 뒤에 보전하려고 애쓴 국경선은 유럽 국가 체제의 광범위한 윤곽선을 이루면서 1914년까지 유지되었다. 중심부가 안정되자 유럽 열강 간의 충돌은 "주변부화되었고", 유럽의 강대국들은 동쪽의 오스만 제국으로, 그리고 남쪽의 식민지를 둘러싼 경쟁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결과가 바로 1867년의 대타협이었다. 데아크 페렌츠가 마련한 그 타협안을 통해서 헝가리는 독립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합스부르크 제국에 포함되었다. 즉, 4월법과 국사 조칙이 조화를 이룬 셈이었다. 1867년의 대타협에 따라서 헝가리 왕국은 정부와 의회(고위 인사들의 상원과 선출직 의원들의 하원으로 나뉘었다)를 가지게 되었지만, 황제가 헝가리 국왕으로서 정부를 임명했다.

군주들은 최초의 근대적 유명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구경거리였다. 그들의 이미지는 사진과 대량 생산된 판화를 통해서 "과장된" 속성을 띤 상품으로 변모했다. 그들의 죽음 역시 일상과는 동떨어진 일, 생활 속에 의미와 강렬함을 주는 사건이 되었다. 1867년 막시밀리안의 죽음은 유럽 전역에서 잇달아 발생할 주권자 암살 사건의 예고편이었다.

이전의 군주들과 왕족들은 본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신이 결정한 통치권의 신화적 자기 과대평가와 증거를 강조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열심히 설정했다. 그러나 왕가들은 대중의 상상력을 함양할 힘을 잃어버렸고, 개선문과 장례용 영구대의 시절은 지나버렸다. 유럽의 대다수 지역에서 이제 왕가들을 표현하는 방식의 틀은 언론에 의해서 정해졌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 그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가장 강력하고 반향이 큰 이미지는 죽음이라는 구경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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