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커이는 부다페스트를 "발칸 반도의 시카고"로 만들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곳이 굶주린 도시로 전락한 원인인 비정상적인 경제 상태를 간과한 채 부다페스트를 몰나르 페렌츠가 1901년에 발표한 소설 제목처럼 여가의 도시로 묘사하기도 했다. 보다 뼈아픈 점은, 헝가리를 다룬 6권에서 그가 헝가리 북부에 거주하며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펄로츠인들과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 지역에 거주하는 수백만 명의 루마니아인들에게 동일한 분량의 지면을 할애하면서 소수 민족을 의도적으로 경시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헝가리의 유대인들에 관한 항목에는 독일어 원본에는 없는 반유대주의적인 내용이 수록되었다.

「신자유언론」은 1908년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언젠가 황제 이후를 전망하게 된다면 그 시점은 우리의 생각이 어수선하고 불안해졌을 때일 것이다. 황제가 이 나라를 화합과 평화와 화해로 이끌 수 있도록 부디 이 군주국이 황제의 노련한 손길에 힘입어 천명을 누렸으면 한다." 8년 뒤, 황제는 그런 목표를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미완으로 끝난 프란츠 요제프 치세의 의미는, 그의 개인적 좌우명인 "하나된 힘으로Viribus unitis"보다 그의 유언인 "왜 지금이어야 하지?"에 더 정확하게 포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이 전해준 정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종학"이라는 새로운 여과기를 거쳐야 했다. 과학자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세계인을 9개의 백인종과 9개의 흑인종으로 나눈 사람은 아우구스틴 바이스바흐였다. 그의 분류법에 따르면 남부 아프리카의 산족, 즉 부시맨이 모든 인종 중에서 서열이 가장 낮았다(그는 부시맨이 유인원과 가깝다고 보았다. 그리고 유대인은 백인종 중에서 서열이 가장 낮았다.

빈 인류학회는 바이스바흐의 접근법을 지지했다. 빈 인류학회의 회장은 인종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특질과 풍습에 대한 조사뿐 아니라 "골상학적, 언어학적 연구"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부에 많이 있다고 강조했다. 빈 인류학회는 우월한 인종으로 추정되는 중앙 유럽의 "북방계"에 관한, 그리고 중앙 유럽 지역의 인종적 혈통을 정제하는 데에 진화론적 자연 선택의 원리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연구를 후원했다.

자연사 박물관과 예술사 박물관은 역사주의의 관례에 발맞춰 르네상스 전성기 양식으로 지어졌다. 여기에는 예술과 학문의 융성기인 16세기를 상기시키고 프란츠 요제프의 후원으로 예술과 학문이 부활했음을 찬양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두 박물관이 개관할 무렵, 건축의 흐름은 바로크 부흥 양식 또는 신新바로크 양식 쪽으로 바뀌었다.

바로크 양식은 수도인 빈에 이미 자리 잡은 양식과 어울렸다. 생동감 있고 재기발랄한 바로크 양식은 베를린의 "냉정한 고전주의"와 절제보다 빈과 더 잘 어우러졌다. 끝으로, 바로크 양식은 초민족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바로크 양식은 "민족들을 통합하는" 데에 기여했다. 알베르크 일그에 따르면 바로크 양식은 단일화된 건축 언어를 제시함으로써 "각 민족의 개별성을 해체해 전 세계를 단일한 통치권으로 포용할" 힘이 있었다.

신바로크 양식이 세계 공통어를 추구한 반면, 제국 곳곳의 현지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은 독특함과 차이를 강조하는 민족적 양식을 개발하려고 애썼다.
신바로크 양식은 특유의 과도한 장식과 정교한 외관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현대주의 건축가인 아돌프 로스는 신바로크 양식의 불필요한 첨가 방식을 문신에 비유했다.

19세기 말엽의 빈에서는 예술과 건축 분야 외에 학술 분야에서도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며 융성기를 맞이했다. 빈은 지크문트 프로이트,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20세기 음악 혁명의 주도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 사교 모임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한 오토 바우어와 카를 레너 등을 배출한 도시였다. 그들이 펼친 노력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탐구 대상의 껍질을 벗겨내 그 속의 지적 구성 요소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각 탐구 대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과감한 언사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평화를 강력히 옹호했다. 그는 제국 군대의 사정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고, 제국 군대가 대규모 전쟁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장갑차를 보유한 기계화 부대의 창설, 항공기, 전화 통신, 최신형 전함의 도입 같은 군대의 현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을 독일로부터 떼어놓을 가망이 희박해지자 연합국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국무 장관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유럽의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라고 요구했고, 1918년 6월에 윌슨 대통령은 "슬라브 인종의 모든 분파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연합국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해체하고 독립적인 민족 국가들로 대체하는 방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 운명이 독일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몰락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의 군사적 패배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사적 패배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불가리아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잡다한 장식물을 빼앗겨 영토가 크게 줄어든 터키와 마찬가지로,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반면 합스부르크 제국은 완전히 붕괴했고, 영토는 6개의 국가로 나뉘었다. 그 폐허는 거대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접착제는 이미 약한 것으로 밝혀졌고, 1918년에 이르렀을 때에는 여러 부분을 결속하지 못했다. 정체성과 충성심은 민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왕가가 아니라 민족이라는 그릇에 희망과 애국심을 담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1918년에 무너졌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영토와 정치를 뛰어넘는 사안과 연관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개념은 복잡했다. 그 개념의 핵심에는 카롤루스 대제와 슈타우펜 가문 황제들이 복원한 로마와 로마 제국의 유산이 놓여 있었다(초창기의 합스부르크 가문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카롤루스 대제와 슈타우펜 가문 황제들의 상속자라고 자부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합스부르크 제국 개념의 한 가지 측면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사례였고, 가장 높은 자리인 황제직을 차지하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야심은 그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