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단순 만세시위로 그친 것이 아니고, 초기부터 서북 지방의 여러 중소도시와 농산촌 지역에서 그랬듯이, 서울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방에서 '전민항쟁'처럼 되어간 것이다. 3.1운동 종식 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독립운동 진영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폭력노선과 그 방략에 의탁하는 정도가 눈에 띌 만큼 커진 것이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37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에서 가장 크게 눈에 띄는 점은 '비폭력 평화 운동'이라는 우리의 편견을 깨뜨린다는 점이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에서 '평화 시위 -> 강제 해산 -> 폭력 대응'의 양상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는 점에서 3.1 항쟁을 '비폭력 저항 투쟁'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3.1항쟁을 '평화를 지향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평화 平和'라는 단어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서 가능하다.


 오늘날 평화연구는 '평화'가 강대국의 국제법적인 조약, 안보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세계시민주의에 의한 식민지/약소민족의 자결권과 해방의 문제를 다루는 역사가 포함되었고 평화를 만들기 위한 문화와 사상, 인권으로서 '평화권'에 대한 것까지 확장되었다. 100년 전인 1919년 3.1운동 시기 한국인들의 '평화'사상을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 개념을 넘어서 인간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없는 '적극적 평화', 인권으로서의 '평화권' 개념을 적용해 살펴볼 수 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57


 요컨대 3.1운동 시기 사상과 실천에서 시대와 함께하던 한국 지성들의 '평화'는  베르사유조약 같은 정치적 협상으로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평등과 민주, 민권의 평화라는,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평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민의 세계시민의식을 담은 평화사상이자 적극적 평화, 생명과 평등의 평화를 지향한 평화사상이었다. 식민지민의 독립을 위한 저항운동은 그러한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실천이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81 


  이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 1909)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 1879 ~ 1910)의 <동양 평화론 東洋 平和論>과 맞닿은 지점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 ~ 1936)과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 1944)의 사상이 민족(民族)이라는 용광로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21년 초에 신채호는 잡지 <천고 天鼓>에 실은 글에서 "우리는 평화행복을 기구하는 바이지만, 강적 제거와 동양의 평안 도모는 '유혈' 두 글자를 떠나서는 이뤄낼 수가 없다... 적과 혈전을 벌일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어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여, 혈전을 통해서만 일제 타도와 동양평화의 길트기가 가능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p42)... 한용운은 인간에 대한 종교적 성찰에 바탕을 두고 인간 생명의 존립 조건으로서 '평화'를 표상했다. 즉, 인간다운 행복한 삶은 평화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평화를 지켜야 하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것은 생명 있는 인간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75


 <3.1운동 100년> 기념 총서들을 읽으면서, 결국 논점은 3.1항쟁이 '성공'했는가, 아니면 '실패' 했는가로 귀결됨을 깨닫는다. 과거로부터 축적된 역량이 '고종 사망'이라는 사건을 통해 민족적으로 발현되었고, 이후 새로운 저항의 방향을 찾았다는 것이 '성공'했다는 논거가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실패'의 논거는 결과적으로 저항의 결과 독립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이며, 이는 주도층의 부재와 역량의 미숙을 들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뒤에 각각 사회주의 혁명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다시 계승, 분화되는 것도 이미 1권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3.1운동은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독립선언과 평화적 만세시위만으로 독립이 곧 성취될 것을 기대한 민족 대표의 턱없는 낙관과 막연한 희망이 큰 오산이고 실패라면 실패였을 뿐이다. 조선 민중이 보여준 폭력적 직접행동의 격한 기세에 일제가 사실상 굴복해 통치정책을 바꾼 것이 3.1운동의 직접적 성과였다. 그러나 '문화정치' 역시 기만술책이었다면, 더 큰 성과는 따로 있었다. 독립운동 진영의 인식과 사고와 태세를 크게 바뀌놓으면서 크나큰 자신감을 갖게 하고 정대한 노선으로 나아가게 한 것, 그 이상으로 조선 민중 속의 수많은 아(兒/我)들이 새로운 자각과 결기를 통해 의열투쟁의 주체로, 폭력의 담지자로 기꺼이 나서게끔 한 것, 그것이 3.1운동의 실질적 성과이자 숨겨진 성공이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p51 


 <3.1운동 기념총서>를 통해 이제껏 알지못했던 3.1항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새롭게 알게된 사실들은 내 자신에게 또다른 역사의 층(層)을 만들어 주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주어지는 과제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함께 갈 길이 멀다는 것도 함께 일깨운다. 책을 읽을 수록 부족함을 느끼는 것.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을 우리 모두의 공통된 느낌이 아닐까도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읽은 단재 신채호의 <독사신론>에 관한 글과 3.1 항쟁의 희생에 대한 우리의 기억과 관련된 글을 옮기며 글을 마무리하자... 


 일제의 국권 침탈로 무너진 국가와 황제를 대신한 것은 민족이었다. 국가가 무너짐으로써 민족이 서게 되고, 민족의 중심에는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함께한 단군이 있었다. 단군은 민족이었고, 민족정체성의 상징이었다. 민족은 애국계몽가들의 단군 담론을 거쳐 단일민족이라는 민족공동체 의식으로 확장되었고, 신채호의 <독사신론>은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정립시킨 변곡점이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285 


 제암리 학살사건과 유관순의 죽음이 민족의 희생으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과거사를 성찰하는데 기념에 앞선 절차라 할 수 있는 기억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건과 진상의 규명보다 민족적 죽음과 희생으로부터 반일정서를 확인하고자 했던 문화가 오래도록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개인의 죽음과 희생에 대한 기억이 사실상 소거되고 희생자들이 수치로만 기억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또한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민족 전체가 식민지배의 폭압을 견뎌낸 생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355 


독립운동 진영의 인식과 사고와 태세를 크게 바뀌놓으면서 크나큰 자신감을 갖게 하고 정대한 노선으로 나아가게 한 것, 그 이상으로 조선 민중 속의 수많은 아(兒/我)들이 새로운 자각과 결기를 통해 의열투쟁의 주체로, 폭력의 담지자로 기꺼이 나서게끔 한 것, 그것이 3.1운동의 실질적 성과이자 숨겨진 성공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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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한국근현대사에 의미심장한 사건이자 계기로서 3·1운동은 줄곧 많은 이에게 주목받았고 수많은 논저가 나왔다. 그러나 3·1운동에 대한 기억과 역사 쓰기가 거족적인 항쟁‘, ‘민족해방운동사의 최고봉‘ 같은 수식어에 묻힌 채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거나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과장되고, 때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 속에 밝혀지지 않은 많은 사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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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집>은 국제연맹 제출을, <혈사>는 중국인들과의 독립운동 제휴를, <사략 상편>은 <사료집>을 계승해 이후의 독립운동사 서술을 각각 목표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사료집>과 <사략 상편>은 안창호와 김병조라는 인물을 통해 일정한 연속성을 강하게 지녔고, '외교독립론'적인 입장에 기반해 독립운동사를 서술했다. 그에 비해 박은식의 <혈사>는 비(非)미국중심주의를 표방하며 '무장투쟁론'적인 입장에서 쓰였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 역사서가 궁극적으로 대항했던 것은 일제가 생산해내고 있는 3.1운동상이었다... <사료집>과 <혈사>, <사략 상편>은 어느 한 저서가 압도적인 객관성을 지니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지닌 동시대성의 저작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53


  metahistory 메타역사. 역사에 관한 역사가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의 주제다. 우리는 <3.1운동 100년사>의 첫 번째 책에서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들을 만나게 된다.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사료(史料)도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는 것을 보면서 사관(史觀)에 따라 다르게 강조점이 찍히고, 왜곡된 역사상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역사에 대한 기억은 3.1항쟁을 마르크스(Marx) 사상 관점에서 해석한 관점 - 경제학자 안병직과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 - 이다. 역사를 계급투쟁의 산물로, 필연적 단계 이행으로 이해한 이들의 관점에서 3.1항쟁은 실패한 투쟁에 불과했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제반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혁명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갖는 이들의 관점은 '정형화된 역사'와 '유물론 사관'이라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일제 시대에 본격적으로 갖추어진 SOC만이 근대화의 증거이고, 발전된 역사의 과정에 있다는 인식으로 흐르고, 결과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이 태어나게 된 것은 당연한 흐름이 아니었을까. 몇 년 전 논란의 베스트셀러 <반일종족주의>의 사상의 뿌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좌파'사상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경제학자 안병직은 남한에서 3.1운동의 원인을 계급론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했다. 안병직은 중국에서 개발된 민족자본론을 이용하여 3.1운동 참여 세력을 예속자본가 중 식민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손병희 등 소극적 친일파, 중소지주 및 상인 등 민족 자본가, 노동자/농민계층 등으로 분류하고 그들을 운동에 참여하게 된 지도 사상을 각각 '독립청원', '독립시위' , '독립쟁취'라고 규정했다. 이 중 '민족 대표'는 그 투항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3.1운동의 시작 단계에 운동을 포기했고, 그 이후는 각 지방의 지식인, 학생, 유력자에 의해 운동이 독자적으로 추진되었다고 서술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159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3.1운동을 '실패한 운동'으로 규정했다. 특히 전위조직의 부재와 토지개혁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점을 3.1운동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강조했다. 3.1운동은 반제투쟁 외에도 토지개혁이라는 반봉건투쟁이 병행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 3.1운동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전위당의 필요와 토지문제의 농민적 해결이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75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속에서 우리는 다른 하나의 왜곡된 기억을 발견하게 된다. 임시정부의 정통성 문제와 건국절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속에서 우리는 3.1혁명을 계승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 우파사상이며,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의 주장임을 확인하게 된다. 초대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이 아닌 '계승'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계승자'를 '건국자'로 만들고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좌파의 논리를 받아들이면서, '종북 좌파'로 매도하는 이들의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이것 또한 왜곡된 기억이 낳은 갈등이 아닐까... 


 '3.1운동에 의해 건립된 임시정부'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임정 법통성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우파의 논리로 작동했다. 좌파가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할 때마다 우파는 임정 법통성을 방어논리로 구사했다... 이후 군사정부에 의해 삭제되었던 임정 법통성은 1987년 개헌을 통해 다시 헌법 전문에 들어갔다. 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정부 수립의 정통성을 임정 법통성에서 찾고자 했던 정치세력은 별다른 갈등 없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헌법 전문에 부활시켰다. 이처럼 임정 법통성이 우파와 반공주의의 합작이라는 점은 해방 정국부터 일관된 것이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108


 이승만 정부는 정부 수립 후 1949년 첫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으로 발휘된 독립의 정신이 임시정부로 계승되어 마침내 '대한민국주국(大韓民國主國)'이 탄생했다고 했다. 정부 수립의 정통성과 임시정부 계승의 정신을 표방한 것은 그 후 역대 정부에서도 공통적으로 이어졌다... 이승만은 집권 후 첫 번째 기념사에서 3.1운동의 정신이 '반공의 3.1정신'으로 부활할 것을 주장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1 메타역사>, p121


 

책을 읽다보면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읽어야 할 책들이 쏟아짐을 느낀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하여 이영훈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 vs 강만길의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을 담아둔다. 이에 더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3월호에 실린 램지어 교수의 주장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vs  고은광순외 <제국의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도 함께 담아둔다... 서로 다른 역사의 기억은  어떻게 우리를 바꾸어 왔는가. 역사의 힘에 대해 생각하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기억이 구체화되어 있는 모든 장소들은 종교적, 정치적, 상징적 성격과 아울러 역사 및 족보 편찬의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그 기억의 주요한 측면들이 '유산(heritage)' 이라는 기호(記號) 아래 재편되어 나타나는 것은, 그런 기억이 펼쳐지는 바로 그 시대에 그것 자체가 스스로 시대를 초월한 하나의 의례처럼 표현되는 것에 관심을 쏟으며, 시간적으로 유한한 자신의 흔적을 초시간성 또는 초자연성의 낙인으로써 확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기억 속에는 아직 민족은 없지만 민족적 신성성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이후에 나타난 민족적 기억의 온갖 형태들에 그러한 성격을 물려줄 것이며, 또 그런 신성성이 그 기억에 영속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2 : 민족>, p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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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3-22 2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와 기억이라면, 쑨꺼 선생의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중 ‘중일전쟁- 감정과 기억의 구도‘, 쑹녠선의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정두희 등이 참여한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김시덕 <일본의 대외 전쟁>도 추천합니다..ㅎㅎ

겨울호랑이 2021-03-23 06:12   좋아요 0 | URL
^^:) 김민우님 감사합니다. 평소 역사와 관련해서 많은 책을 읽으시는 김민우님께서 추천하시는 도서라 믿고 읽을 수 있겠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 근대적 / 근대성, 근대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한스 울리히 굼브레히트 지음, 원석영 옮김 / 푸른역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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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세기들의 진행에서 그때그때 현재와 고대와의 관계가 변한다. 뛰어넘을 수 없는 고대인들의 우수성에 대한 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던 르네상스 시대 초기에는 고대인들에 대한 모방을 추천한 반면, 그 이후에는 "모방 imitatio"이라는 원리를 "경쟁 aemulatio"이라는 원리가 대신했다. 이와 함께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전성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이, 나아가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 근대적/근대성, 근대>, p24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13번째 주제는 근대(Modern)다. 코젤렉에 의하면 '근대'는 '현재 gegenwartig', '새로운 neu', '일시적 vorubergehend'라는 대략 세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다. 얼핏 보면 큰 연관없는 의미지만, 개념사를 따라가다보면 '근대'의 의미영역 확장을 이해할 수 있다. 영광스러운 고대 그리스 문화를 기준으로 르네상스(Renissance)의 '근대'가 과거의 구분되는 시점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현재'가 된다. 또한, 과거는 이미 지난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면서 찰나의 '근대'는 '새로운'이라는 의미를 추가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과거가 오랜 기간의 축적이라는 면에서 '영원한 永遠 ewig'을 가져가면서, 이와 대립되는 '일시적'이 근대 안에 들어오게 된다. 


 일시적인 다양한 이상들에 대한 구상을 담지하고 있는 근대성 modernite 개념에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본질로서 '고대 antiquite'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불멸적인 것만이 대립된다. 근대적인 것 Das Moderne과 영원이라는 두 원리는 "아름다움의 이중적인 본성" 속에서 서로를 보완한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 근대적/근대성, 근대>, p52


 다만, 개인적으로 '현재'와 '일시적'의 차이는 미묘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가 있다. 니체 이전 '과거'가 고대 그리스라는 '절대 과거'라면, 니체 이후의 과거는 개별 현재의 반대로서'상대 과거'가 된다. 절대 과거에서 '영원'은 아주 먼 옛날(long long time ago)가 되겠지만, 상대 과거에서 '영원'은 '지금 이순간'의 미분값의 합(合)이라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른 말로, 니체 이전의 idea가 고대 그리스라면, 니체 이후의 idea는 진보하는 역사의 최상(最上)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의 생각이라 부족함이 있겠지만, 생각없이 사용해왔던 '근대'의 의미를 되새겨봤다는 점을 작은 성과로 하고, 책을 덮는다...


 유럽 문화의 데카당스에 대한 니체 Nietsche의 이론은 근대에 지금까지 인용되었던 텍스트들과는 전혀 다른 위상을 부여한다. 그 텍스트들은 그리스를 척도로 간주하지 않고, 각각의 시대에 바로 이전의 국가 고전주의를 척도로 간주했고, 경멸된 근대를 새로운 인간상을 통해 극복하는 대신, 그렇게 추정된 고전주의 국가 이상의 보전을 선전했다... 니체는 "평균화, 민주주의, '근대적'이념들에로의 전이"는 1871년의 "제국의 정초"와 함께 독일에서도 종결되었다고 보았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 근대적/근대성, 근대>, p64


 모더니즘의 다양한 대변자들에 의해 특징적으로 거론되는 원리들을 나열할 경우, 우리는 통일된 독트린보다는 19세기의 예술적, 철학적, 정치적 이론들을 발견하게 된다... 모더니즘에게 내외적인 분쟁을 가져오는 방향 설정의 차이에 직면해서, 아직 설계되어야 할 현재의 시작에 서있다는 의식만이 공통적인 자기 이해의 토대로 남아있었다. "우리는 두 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다. 우리가 이루는 것은 아직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한, 결코 알아챌 수 없는 미래의 위대함에 대한 준비에 불과하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 근대적/근대성, 근대>,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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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21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최근에 니체에 대해 보면서 아 니체가 진짜 근대를 넘어 현대 철학의 시조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이런 생각을 누군가는 저렇게 확고한 개념으로 정의했군요. ^^

겨울호랑이 2021-03-22 01:14   좋아요 0 | URL
^^:) 저는 니체의 사망연도(1900년)을 생각할 때마다 ‘최후의 근대인‘이라 생각했는데, 바람돌이님께서는 그의 사상을 보시고 ‘최초의 현대인‘이라 생각하셨군요. 바람돌이님의 말씀을 들으니, 코젤렉의 개념사 시리즈가 참 잘 짜여진 시리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 대우고전총서 5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상혁 옮김 / 아카넷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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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에 실린 세 편의 에세이 중 <벤담>, <콜리지>는 두 편의 글이면서 하나의 구조를 만든다. <벤담>을 정(正)으로, <콜리지>를 반(反)으로 위치시킨 변증법(변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에 실린 세 편의 에세이 중 <벤담>, <콜리지>는 두 편의 글이면서 하나의 구조를 만든다. <벤담>을 정(正)으로, <콜리지>를 반(反)으로 위치시킨 변증법(辨證法)의 구조 안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밀의 사상을 합(合)의 자리로 인식하게 된다. 원래 <존 스튜어트 밀 선집>을 정리할 계획이었으나, 그보다 서문 격으로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를 간략하게 언급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일단 먼저 읽은 책을 정리한 한 후가 되겠지만...

밀은 진보주의자로서 벤담이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에 의문을 제시하는 방법을, 보수주의자로서 콜리지가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의 의미와 그것이 원래 실현하고자 했던 이념이 무엇이었는가를 묻고 그 이념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질문하게 했다고 밝히고 있다.(p265)... 밀은 벤담과 같이 진보주의 진영에 속한다고 밝히면서, 밀은 이 두 학파를 설득시키기 위해 벤담이 주장하는 진리가 단지 절반의 진리라는 것을, 그리고 콜리지가 중요한 나머지 절반의 진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_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 해제, p266

밀에 의하면 자연의 틀은 그 전체로 보았을 때 인간이나 다른 유정적 존재들의 선을 주된 목적으로 해서 디자인된 것으로 볼 수 없다._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논고> 해제,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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