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단순 만세시위로 그친 것이 아니고, 초기부터 서북 지방의 여러 중소도시와 농산촌 지역에서 그랬듯이, 서울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방에서 '전민항쟁'처럼 되어간 것이다. 3.1운동 종식 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독립운동 진영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폭력노선과 그 방략에 의탁하는 정도가 눈에 띌 만큼 커진 것이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37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에서 가장 크게 눈에 띄는 점은 '비폭력 평화 운동'이라는 우리의 편견을 깨뜨린다는 점이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에서 '평화 시위 -> 강제 해산 -> 폭력 대응'의 양상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는 점에서 3.1 항쟁을 '비폭력 저항 투쟁'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3.1항쟁을 '평화를 지향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평화 平和'라는 단어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서 가능하다.


 오늘날 평화연구는 '평화'가 강대국의 국제법적인 조약, 안보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세계시민주의에 의한 식민지/약소민족의 자결권과 해방의 문제를 다루는 역사가 포함되었고 평화를 만들기 위한 문화와 사상, 인권으로서 '평화권'에 대한 것까지 확장되었다. 100년 전인 1919년 3.1운동 시기 한국인들의 '평화'사상을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 개념을 넘어서 인간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없는 '적극적 평화', 인권으로서의 '평화권' 개념을 적용해 살펴볼 수 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57


 요컨대 3.1운동 시기 사상과 실천에서 시대와 함께하던 한국 지성들의 '평화'는  베르사유조약 같은 정치적 협상으로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평등과 민주, 민권의 평화라는,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평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민의 세계시민의식을 담은 평화사상이자 적극적 평화, 생명과 평등의 평화를 지향한 평화사상이었다. 식민지민의 독립을 위한 저항운동은 그러한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실천이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81 


  이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 1909)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 1879 ~ 1910)의 <동양 평화론 東洋 平和論>과 맞닿은 지점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 ~ 1936)과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 1944)의 사상이 민족(民族)이라는 용광로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21년 초에 신채호는 잡지 <천고 天鼓>에 실은 글에서 "우리는 평화행복을 기구하는 바이지만, 강적 제거와 동양의 평안 도모는 '유혈' 두 글자를 떠나서는 이뤄낼 수가 없다... 적과 혈전을 벌일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어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여, 혈전을 통해서만 일제 타도와 동양평화의 길트기가 가능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p42)... 한용운은 인간에 대한 종교적 성찰에 바탕을 두고 인간 생명의 존립 조건으로서 '평화'를 표상했다. 즉, 인간다운 행복한 삶은 평화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평화를 지켜야 하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것은 생명 있는 인간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75


 <3.1운동 100년> 기념 총서들을 읽으면서, 결국 논점은 3.1항쟁이 '성공'했는가, 아니면 '실패' 했는가로 귀결됨을 깨닫는다. 과거로부터 축적된 역량이 '고종 사망'이라는 사건을 통해 민족적으로 발현되었고, 이후 새로운 저항의 방향을 찾았다는 것이 '성공'했다는 논거가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실패'의 논거는 결과적으로 저항의 결과 독립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이며, 이는 주도층의 부재와 역량의 미숙을 들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뒤에 각각 사회주의 혁명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다시 계승, 분화되는 것도 이미 1권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3.1운동은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독립선언과 평화적 만세시위만으로 독립이 곧 성취될 것을 기대한 민족 대표의 턱없는 낙관과 막연한 희망이 큰 오산이고 실패라면 실패였을 뿐이다. 조선 민중이 보여준 폭력적 직접행동의 격한 기세에 일제가 사실상 굴복해 통치정책을 바꾼 것이 3.1운동의 직접적 성과였다. 그러나 '문화정치' 역시 기만술책이었다면, 더 큰 성과는 따로 있었다. 독립운동 진영의 인식과 사고와 태세를 크게 바뀌놓으면서 크나큰 자신감을 갖게 하고 정대한 노선으로 나아가게 한 것, 그 이상으로 조선 민중 속의 수많은 아(兒/我)들이 새로운 자각과 결기를 통해 의열투쟁의 주체로, 폭력의 담지자로 기꺼이 나서게끔 한 것, 그것이 3.1운동의 실질적 성과이자 숨겨진 성공이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p51 


 <3.1운동 기념총서>를 통해 이제껏 알지못했던 3.1항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새롭게 알게된 사실들은 내 자신에게 또다른 역사의 층(層)을 만들어 주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주어지는 과제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함께 갈 길이 멀다는 것도 함께 일깨운다. 책을 읽을 수록 부족함을 느끼는 것.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을 우리 모두의 공통된 느낌이 아닐까도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읽은 단재 신채호의 <독사신론>에 관한 글과 3.1 항쟁의 희생에 대한 우리의 기억과 관련된 글을 옮기며 글을 마무리하자... 


 일제의 국권 침탈로 무너진 국가와 황제를 대신한 것은 민족이었다. 국가가 무너짐으로써 민족이 서게 되고, 민족의 중심에는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함께한 단군이 있었다. 단군은 민족이었고, 민족정체성의 상징이었다. 민족은 애국계몽가들의 단군 담론을 거쳐 단일민족이라는 민족공동체 의식으로 확장되었고, 신채호의 <독사신론>은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정립시킨 변곡점이었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285 


 제암리 학살사건과 유관순의 죽음이 민족의 희생으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과거사를 성찰하는데 기념에 앞선 절차라 할 수 있는 기억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건과 진상의 규명보다 민족적 죽음과 희생으로부터 반일정서를 확인하고자 했던 문화가 오래도록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개인의 죽음과 희생에 대한 기억이 사실상 소거되고 희생자들이 수치로만 기억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또한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민족 전체가 식민지배의 폭압을 견뎌낸 생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_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5 사상과 문화>, p355 


독립운동 진영의 인식과 사고와 태세를 크게 바뀌놓으면서 크나큰 자신감을 갖게 하고 정대한 노선으로 나아가게 한 것, 그 이상으로 조선 민중 속의 수많은 아(兒/我)들이 새로운 자각과 결기를 통해 의열투쟁의 주체로, 폭력의 담지자로 기꺼이 나서게끔 한 것, 그것이 3.1운동의 실질적 성과이자 숨겨진 성공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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