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거란이 이미 강성해지고 나서 노룡(盧龍, 치소는 유주)의 여러 주를 노략질하는 것이 모두 두루 퍼졌으니, 유주(幽州, 북경시) 성문 밖에는 야만인의 기병으로 가득 찼다. 매번 탁주(?州, 하북성 탁주시)에서 운반되는 양식이 유주로 들어올 적마다 야만인들은 대부분 염구(閻溝, 북경시 서남쪽 양향진)
에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이들을 노략질하여 빼앗았다.

임자일(4일)에 이종영이 들어와서 알현하자 황제가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비록 글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유생(儒生)들이 경의(經義)를 강론하는 것을 기꺼이 들었더니 사람들의 지혜와 생각을 여는데 유익하였다. 내가 장종이 시 짓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았는데 장수 집안의 아들들은 글 짓는 것을 평소 익히지 않아서 다만 다른 사람에게 몰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너는 본받지 마라."

대리소경(大理少卿) 강징(康澄)이 편지를 올려 말하였다.
"신이 듣기로는 동요(童謠)는 화복(禍福)의 근본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재앙과 상서(祥瑞)로움이 어찌 융성과 쇠퇴의 근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장끼와 꿩이 솥에 올라가고 상곡(桑穀)이 조정에서 자라더라도 은(殷) 종실의 융성함을 중지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신마(神馬)는 길게 울고 옥귀(玉龜)는 길조(吉兆)를 알렸지만 진(晉)의 운명의 길게 끌 수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국가가 두려워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것이 다섯 가지가 있었고 깊이 두려워할 만한 것이 여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음과 양이 고르지 못한 것은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고, 삼진(三辰, 日·月·星辰)이 운행할 길을 잃어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고, 소인이 유언비어를 퍼뜨려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고, 산이 무너지고 냇물이 말라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며, 해충과 도적이 농사를 망친다고 해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지만, 현명한 인재가 숨으면 깊이 두려워할 만하고, 사민(四民, 士·農·工·商)이 직업을 옮겨도 깊이 두려워할 만하고, 위아래가 서로 자랑하여도 깊이 두려워할 만하고, 염치(廉恥)의 도(道)가 소멸되어가도 깊이 두려워할 만하고 명예를 훼손하고 진실을 어지럽혀도 깊이 두려워할 만하며, 곧은 말이 업신여기게 들리면 깊이 두려워할 만합니다.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있어도 논의하지 말고, 깊이 두려워할 만한 것은 폐하께서 수정하여 어긋나지 않게 하십시오."
우조(優詔)로 이를 장려하였다.

황제의 성품은 시기하지 않았고 무리와 더불어 다투지 않았으며, 등극하였을 때의 나이가 이미 예순 살을 넘었는데, 매일 저녁마다 궁궐 안에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원하였다.
"모(某)는 호인(胡人)으로 어지러운 시기를 이용하여 무리에게 추대를 받았습니다. 바라건대 하늘이시여 일찍이 성인을 태어나게 하시어 백성의 주군이 되게 해 주소서."
제위에 있는 기간 동안 곡식이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병혁(兵革, 전쟁의 무기)이 드물게 사용되었으며 비교적 오대(五代) 가운데 대략 조금은 평안하였다.

민주(?主)가 귀신을 좋아하여 무당 성도(盛韜) 등이 모두 총애를 받았다. 설문걸이 민주에게 말씀을 올렸다.
"폐하의 좌우에는 간신이 많은데 이를 귀신에게 질문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 귀신 보기를 잘하니, 의당 그들을 보게 해야 합니다."
민주가 이를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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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일(27일)에 칙서를 내려 오방(五坊)102에서 키운 매를 풀어 놓아주게 하고 안팎에서 다시는 바칠 수 없게 하였다. 풍도가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베푸시는 어짊이 금수(禽獸)에까지 미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짐은 옛날에 일찌감치 무황(武皇, 이극용의 시호)을 좇아 수렵을 하였는데, 당시에 가을 곡식이 바야흐로 무르익어서 짐승들이 편하게 경작지 속으로 들어가자 기병을 파견하여 그것들을 잡았으나 짐승을 잡았을 즈음에는 남은 곡식은 거의 없었소. 이것으로 그것을 생각해 보니, 수렵에는 손실은 있으나 이익이 없었소. 그러므로 시행하지 않았을 뿐이오."

조계량(趙季良)이 말하였다. "동장은 사람됨이 용맹하나 은덕을 베푸는 일이 없으며, 사졸들이 붙지 않으니 성을 지키고 있으면 이기기가 어려우나 들판에서 싸우게 되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소혈(巢穴)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공에게는 유리합니다. 동장이 군사를 부리는 것은 정예의 군사들이 모두 선봉에 세우고 있으니 공은 의당 파리한 군사를 데리고 그들을 유인하고서 굳센 군사를 데리고 그들을 기다린다면 처음에는 비록 조금 꺾이겠지만 이후에는 반드시 크게 승리할 것입니다.

다음 날에 안중회가 스스로 이를 말하자 황상이 말하였다. "짐이 옛날에 소교(小校)이었을 적에 집안이 가난하여 이 아이가 말똥을 주워 온 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보탰고, 오늘에 이르러 천자가 되었는데 일찍이 그를 비호할 수 없단 말이오? 경은 그를 어떻게 조치하여서 경에게 편안하려는 것이오?"

안중회가 말하였다. "폐하의 부자(父子) 사이에 신이 어찌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오직 폐하만이 이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사제(私第)에서 한가롭게 살게 하면 역시 되었지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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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죽음이 곧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죽음이 인간 개체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한다. 죽어서도 내 마음속에 뚜렷이 살아 있는 아버지 모습이 그것을 증거한다.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는 내 의식에 자주 출몰하고 있는데 마치 당신이 내 마음속으로 이사해와 거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 아버지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아닌가. 나의 얼굴 모습도 점점 아버지와 닮은 꼴이 되어간다. 아버지의 목숨은 단절된 것이 아니다. 자식인 나에게 이어진 것이다. 종말은 단절이 아니라 그 속에 시작이 있다는 것, 따라서 나의 존재는 단독의 개체가 아니라 혈족이라는 집단적 생명의 한 연결 고리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무한대의 시간 속에서 다만 오늘의 태양만이 중요할 뿐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오늘의 밝은 태양보다 망각된 과거가 더 중요하다.

나는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 나이였다. 아무 뜻도 없이 그냥 재미로 벌레를 죽이는 어린애가 어찌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겠는가.

그렇게 해방 삼년은 흉년, 역병, 흉년의 악순환이었다. 왜정 말기를 혹독한 고통 속에 보내고 해방을 맞았으나, 그 역시 진구렁 속의 삶이었다. 그러므로 섬사람들에게 해방은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 아니었다. 왜정 때의 그 악명 높던 곡식 공출이 여전히 존속되어 부족한 식량을 수탈해가는데 어찌 해방이며, 이민족들이 나라를 두동강 내고 점령하고 있는데 어찌 해방이라고 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그 이듬해인 1947년 3월 1일, 읍내에 이만 군중이 모여든 대시위는 이렇게 극한상황에 몰린 민생의 피맺힌 절규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슬픔과 억울함을 토로하는 그 집회에 무차별 총격으로 응답했으니, 여섯명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학살이 집중적으로 자행되었던 그해 겨울과 초봄, 한라산 눈 속에서 동백꽃이 무수히 떨어졌다. 그래서 하늘도 산도 서럽다고 구름 속에 얼굴을 가리고 있었을까. 항시 낮게 드리워 있던 음울한 구름 밑에서 바람까마귀떼의 광란의 춤과 함께 수만의 인명을 도륙 내는 대학살의 카니발이 연출되었다. 수만의 인간과 함께 수만의 가축들도 비명에 쓰러져갔다. 살아남은 자들은 덜 서러워야 운다고, 덜 무서워야 운다고 했다. 사태 후에도 여전히 무서워 수십년 동안 맘 놓고 울어본 적이 없다는 그들, 사태의 참상을 말하려면 말이 너무 모자라 다 못한다고 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언어절(言語絶)의 참사

허리까지 잠기는 풀밭을 이리저리 거니노라면 내 영혼에 예리하게 침투하는 야초의 독한 향내…… 거기에서 나는 내 존재에 대한 강렬한 의식과 함께 내 죽음 자체에도 관대해진다. 내 아버지, 내 조상들이 묻힌 곳, 그 초원은 모든 섬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죽어서 다시 돌아가는 어미의 자궁인 것이다. 그러나 피맺힌 한으로 해서 조금도 관대해질 수 없는 무자·기축년의 그 주검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들도 거기로 돌아가 푸른 초원을 이루고 있지만 그들의 삭일 수 없는 여한은 어찌할 것인가.

물론 그 가혹한 시절은 어린 내 가슴에도 좀처럼 지울 수 없는 죽음의 어두운 이미지와 우울증을 심어놓은 게 사실이다. 그 우울증의 결과로 나는 오랫동안 말을 더듬었는데 그 흔적은 아직도 내 혀에 남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란 자신의 성장에 해로운 것은 본능적으로 피해가게 마련이다. 슬픔, 외로움이야말로 성장에 유해한 물질이 아닌가. 몸 가벼운 만큼이나 마음 또한 가벼워 울다가도 금방 웃을 줄 아는 것이 아이들이니, 어떠한 슬픔에도 기쁨의 양지를 향하여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이다.

죽음의 시간은 지나갔지만 굶주림은 여전하여, 늘 기죽어 허리를 못 편 채 먹이를 찾아 불볕더위 속을 불개미처럼 뿔뿔 기어다니는 신세인데, 무슨 놀이가 따로 있고 무슨 오락이 따로 있겠는가. 그리하여 낮 동안 텅 비어 적막했던 우리 동네는, 어른들이 일터에서 돌아오는 저녁 시간이면 아연 활기를 띠어 이 집 저 집에서 욕질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매 맞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오곤 했다. 가난한 그들에게 그것은 자식 교육이자 유일무이한 오락이었다.

붉은 머리띠의 상징은 이제 사라져버렸는가.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푸른 군복에 붉은 머리띠라니, 푸른 국방색과 붉은색은 서로 상극이 아니었던가. 고문자들은 벌거벗은 내 몸에 푸른 군복을 입혀놓고 매타작하면서, 군을 욕보였다고 나더러 빨갱이라고 했지만, 그들이 나에게서 발견한 붉은색이란 짓이겨진 중지 끝에 끈끈하게 엉긴 붉은 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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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세기에서) 핵심적 사건은 프랑스 혁명이 근대세계체제 전체에 제공한 문화적 결실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를 세계체제의 지문화의 출현이라고 생각했다. 지문화란 세계체제 전체에서 널리 수용되고 그 뒤 사회적 행위에제약을 가한 일련의 사상, 가치, 규범을 일컫는다. 나는 프랑스 혁명이 정치적 변화의 정상 상태라는 개념과 주권이 군주(통치자)가 아니라 인민에게 있다는 사상을 정당화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한 쌍의 신념이 빚어낸 결과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첫 번째 결과는 이런 새롭게 보급된 개념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세 가지 근대적 이데올로기 - 보수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 의 출현이었다. 제4권 전체의 논지는 중도적 자유주의가 다른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길들이고, 19세기의 승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뒤 이는 무엇보다 당대 가장 강력한 두 국가 - 영국, 프랑스 - 에서 자유주의 국가들의 탄생에 특권을  부여하는 형태를 취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중요한종류의 반체제 운동의 출현을 자극하고 그 충격을 제한하는 형태를 띠었다. 내가 시민권 개념이 승인한 진보와 그 혜택의 범위에 관한 환상을 다루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역사적 사회과학의 형성을 독려하고 구속하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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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진양(晉陽, 산서성 태원시)에서 관상을 보는 사람인 주현표(周玄豹)가 일찍이 황제가 귀하기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되겠다고 예언하였는데, 황제가 즉위하자 불러서 대궐에 오게 하려고 하였더니, 조봉(趙鳳)이 말하였다.
"주현표는 폐하께서 마땅히 천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고, 지금 이미 입증되었으니 다시 물어볼 것은 없습니다. 만약 그를 경사(京師, 하남부)에 두게 되면 성급하고 가벼우며 미치고 험상궂은 사람들이 반드시 그의 대문에 폭주하여 다투어서 길흉을 물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술사(術士)의 망언(妄言)이 사람과 집안을 멸망에 이르게 한 일이 많았던 것은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마침내 광록경(光祿卿)으로 임명하였으나 치사(致仕)하자 황금과 비단을 후하게 내릴 뿐이었다.

안중회가 말하였다.
"신이 가시덤불을 헤치고 폐하를 섬긴 지가 수십 년이고 폐하께서 용비(龍飛)하게 되어 기밀(機密)을 승핍(承乏)하였더니, 몇 년 동안 천하는 다행히도 무사하였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버려서 외진(外鎭)으로 보내니 신이 바라건대 그 죄를 들려주십시오."

황제는 사자를 파견하여 왕안구에게 재촉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니, 왕안구가 사자와 더불어 기병을 이어서 성을 순찰하면서 그곳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성이 높고 험준함이 이와 같아서 설령 주인(主人)으로 하여금 밖에 있는 군사들에게 성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게 하였다 하여도 역시 운제(雲梯)나 충거(衝車)로는 미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정예의 군사를 많이 죽이면서 적에게는 손실을 주는 것이 없으니 이와 같은데 어찌합니까! 세 개 주의 조세를 가지고 먹게 하면서 백성을 아끼고 군사를 양성하고서 그를 기다리면 저들은 반드시 안에서 무너질 것입니다."
황제가 이를 좇았다.

조봉이 말하였다.
"제왕의 마음에 큰 믿음이 있으면 진실로 그것을 금석(金石)에 새길 필요는 없습니다."

옛날에는 인군(人君)이 즉위하고 태자를 세우면서 적서(嫡庶)의 구분을 명확히 한 것은 화란(禍亂)의 근원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후사를 점치고 저부(儲副)를 세우는 일은 신이 아직 감히 가볍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황상이 또 풍도에게 물었다. "올해는 비록 풍년이 들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넉넉하겠소?"
풍도가 말하였다. "농가에서는 그 해에 흉년이 들면 유랑하다가 굶어서 죽게 되고, 그 해에 풍년이 들면 곡물의 가격이 낮아지는데서 상처를 받으니, 풍년이든 흉년이든 모두 병들게 되는 것은 오직 농가만이 그러합니다.

서지고는 서지순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황금술잔에 따른 술을 그에게 내리며 말하였다.
"바라건대, 아우는 천세를 누리게."
서지순은 독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그의 그릇을 끌어당겨서 그것을 똑같이 나누어가지고 꿇어앉아서 서지고에게 바치며 말하였다.
"형님과 더불어 각기 500살을 누리기 원합니다."
서지고가 얼굴색이 변하여 좌우를 돌아보며 받으려고 하지 않자 서지순이 술을 들고 물러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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