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죽음이 곧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죽음이 인간 개체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한다. 죽어서도 내 마음속에 뚜렷이 살아 있는 아버지 모습이 그것을 증거한다.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는 내 의식에 자주 출몰하고 있는데 마치 당신이 내 마음속으로 이사해와 거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 아버지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아닌가. 나의 얼굴 모습도 점점 아버지와 닮은 꼴이 되어간다. 아버지의 목숨은 단절된 것이 아니다. 자식인 나에게 이어진 것이다. 종말은 단절이 아니라 그 속에 시작이 있다는 것, 따라서 나의 존재는 단독의 개체가 아니라 혈족이라는 집단적 생명의 한 연결 고리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무한대의 시간 속에서 다만 오늘의 태양만이 중요할 뿐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오늘의 밝은 태양보다 망각된 과거가 더 중요하다.

나는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 나이였다. 아무 뜻도 없이 그냥 재미로 벌레를 죽이는 어린애가 어찌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겠는가.

그렇게 해방 삼년은 흉년, 역병, 흉년의 악순환이었다. 왜정 말기를 혹독한 고통 속에 보내고 해방을 맞았으나, 그 역시 진구렁 속의 삶이었다. 그러므로 섬사람들에게 해방은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 아니었다. 왜정 때의 그 악명 높던 곡식 공출이 여전히 존속되어 부족한 식량을 수탈해가는데 어찌 해방이며, 이민족들이 나라를 두동강 내고 점령하고 있는데 어찌 해방이라고 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그 이듬해인 1947년 3월 1일, 읍내에 이만 군중이 모여든 대시위는 이렇게 극한상황에 몰린 민생의 피맺힌 절규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슬픔과 억울함을 토로하는 그 집회에 무차별 총격으로 응답했으니, 여섯명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학살이 집중적으로 자행되었던 그해 겨울과 초봄, 한라산 눈 속에서 동백꽃이 무수히 떨어졌다. 그래서 하늘도 산도 서럽다고 구름 속에 얼굴을 가리고 있었을까. 항시 낮게 드리워 있던 음울한 구름 밑에서 바람까마귀떼의 광란의 춤과 함께 수만의 인명을 도륙 내는 대학살의 카니발이 연출되었다. 수만의 인간과 함께 수만의 가축들도 비명에 쓰러져갔다. 살아남은 자들은 덜 서러워야 운다고, 덜 무서워야 운다고 했다. 사태 후에도 여전히 무서워 수십년 동안 맘 놓고 울어본 적이 없다는 그들, 사태의 참상을 말하려면 말이 너무 모자라 다 못한다고 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언어절(言語絶)의 참사

허리까지 잠기는 풀밭을 이리저리 거니노라면 내 영혼에 예리하게 침투하는 야초의 독한 향내…… 거기에서 나는 내 존재에 대한 강렬한 의식과 함께 내 죽음 자체에도 관대해진다. 내 아버지, 내 조상들이 묻힌 곳, 그 초원은 모든 섬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죽어서 다시 돌아가는 어미의 자궁인 것이다. 그러나 피맺힌 한으로 해서 조금도 관대해질 수 없는 무자·기축년의 그 주검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들도 거기로 돌아가 푸른 초원을 이루고 있지만 그들의 삭일 수 없는 여한은 어찌할 것인가.

물론 그 가혹한 시절은 어린 내 가슴에도 좀처럼 지울 수 없는 죽음의 어두운 이미지와 우울증을 심어놓은 게 사실이다. 그 우울증의 결과로 나는 오랫동안 말을 더듬었는데 그 흔적은 아직도 내 혀에 남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란 자신의 성장에 해로운 것은 본능적으로 피해가게 마련이다. 슬픔, 외로움이야말로 성장에 유해한 물질이 아닌가. 몸 가벼운 만큼이나 마음 또한 가벼워 울다가도 금방 웃을 줄 아는 것이 아이들이니, 어떠한 슬픔에도 기쁨의 양지를 향하여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이다.

죽음의 시간은 지나갔지만 굶주림은 여전하여, 늘 기죽어 허리를 못 편 채 먹이를 찾아 불볕더위 속을 불개미처럼 뿔뿔 기어다니는 신세인데, 무슨 놀이가 따로 있고 무슨 오락이 따로 있겠는가. 그리하여 낮 동안 텅 비어 적막했던 우리 동네는, 어른들이 일터에서 돌아오는 저녁 시간이면 아연 활기를 띠어 이 집 저 집에서 욕질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매 맞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오곤 했다. 가난한 그들에게 그것은 자식 교육이자 유일무이한 오락이었다.

붉은 머리띠의 상징은 이제 사라져버렸는가.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푸른 군복에 붉은 머리띠라니, 푸른 국방색과 붉은색은 서로 상극이 아니었던가. 고문자들은 벌거벗은 내 몸에 푸른 군복을 입혀놓고 매타작하면서, 군을 욕보였다고 나더러 빨갱이라고 했지만, 그들이 나에게서 발견한 붉은색이란 짓이겨진 중지 끝에 끈끈하게 엉긴 붉은 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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