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 세계사 속의 어린이
피터 N. 스턴스 지음, 김한종 옮김 / 삼천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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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는 아동의 지위에 대한 세 가지 주요 해석을 강조했다. 수렵채집 사회, 농업 사회, 그리고 근대적 아동 지위이다. 이 논의에서 아동의 지위는 무엇보다 경제 시스템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는 학교교육과 소비 지상주의에 휩싸여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소비자로 훈련받은 어린이들은 이런 특별한 시스템을 지탱하는 데 필수적이다. 문화와 가족 구조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이는 하나의 전통적인 농업적 아동 지위가 없고 경제적 변수를 제외한다면 어떤 단일한 근대적 아동 지위도 없기 때문이다.(P336)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中


  피터 N. 스턴스 (Peter N. Stearns, 1936 ~ )는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Childhood in World History >에서 경제시스템이 아동의 사회적 지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을 수행한다. 분쟁지역에서 소년병으로 죽어가거나, 개발도상국에서 성노예로 팔려가는 소녀들, 선진국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죽도록 공부를 강요당하는 학생들. 저자는 경제시스템의 발전 정도에 따라 아이들이 직면한 위험의 양상도 다르지만, 이들이 느끼는 위협의 정도는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현재의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미래 소비자로 길들이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어린이들의 행복은 멀리 있어 보인다. 더 암울한 것은 아동의 지위가 과거보다 향상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아주 최근에 전문가들은 경제적 기준과 정치적 불안정 사이의 거대한 격차가 근대적 아동 지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사망률 감소를 위협하고 있다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아동의 지위는 가치, 풍요나 빈곤, 정치적 혼란이나 상대적 안정에 따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P338)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中


 아동의 지위와 관련하여 식민지 아메리카를 연구하는 한 역사가는 더 근대적인 시대와 비교할 때 그 시절 뉴잉글랜드에서 아동학대가 훨씬 드물었다고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학대는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확실히 학대는 끝나지 않았다.(p346)... 근대적 아동 지위의 단점은 멀리 떨어진 지역들에서 독특하게 일어나는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집에서 가까울수록 긴밀한 형제자매 관계가 줄어드는 것은 확실히 어린이를 외롭게 만들기 더 쉽다... 주의력 결핍은 새로 늘어나는 또 하나의 병폐이다.(p347)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中


 5월 5일 어린이 날은 맞이해서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느끼는 보호받는다는 안도감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의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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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0-05-05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5-05 13:12   좋아요 0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순수이성비판 1 대우고전총서 19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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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11) 아무런 외래적인 것도 함께 섞여 있지 않은 그런 인식은 모두 순수하다고 일컫는다. 그러나 특히, 그 안에 도대체가 어떤 경험이나 감각이 섞이지 않으며, 그러니까 완전히 선험적으로 가능한 그런 인식을 단적으로 순수하다고 부른다. 그런데 이성이란 선험적 인식의 원리들을 제공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순수 이성은 어떤 것으로 단적으로 선험적으로 인식하는 원리들을 함유하는 그런 이성이다... 우리 인식의 확장이 가능한지 어떤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경우에 가능한지는 미정이므로, 우리는 순수 이성을 그리고 순수 이성의 원천과 한계를 순전히 평가하는 학문을 순수 이성의 체계를 위한 예비학으로 볼 수 있으며. 순수 이성의 비판이라 일컬어져야만 할 것이다. (p210) <순수 이성 비판 1> 中


 <순수 이성 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 1>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순수 이성'의 '자기 한계 규정'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 이성'은 순수한 선험적인 인식의 능력만을 의미하고, 여기에는 '초월적 인식들'이 포함된다. 이번 리뷰에서는 먼저 '자기 한계 규정'으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A12) 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 개념들을 다루는 모든 인식을 초월적이라 부른다. 그러한 개념들의 체계는 초월-철학이라 일컬어질 것이다.(p211)... (A14) 순수 이성 비판에는 초월철학을 형성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초월철학의 완벽한 이념이긴 하지만, 아직 이 학문 자체는 아니다.(p212) <순수 이성 비판 1> 中


 칸트는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a)에서 이성이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넘어서 초감성적인 것으로 넘어서려 한다고 보았다. '한계'가 구분되는 두 공간 사이의 전적인 차이가 있는 선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인식은 위험이 따르게 된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을 통해 이와 같은 이성의 한계를 보다 분명한다. 이와 같은 칸트의 노력은 <순수 이성 비판>을 통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밝히기를 위해 <순수 이성 비판>에서 초월적 요소론과 초월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초월적 요소론은 다시 '초월적 감성학'과 '초월적 논리학'으로 나뉘는데, <순수 이성 비판 1>에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초월적 감성학과 초월적 논리학 중 초월적 분석학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진다. 이번 리뷰에서는 <순수 이성 비판> 중 초월적 변증학 이전까지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초월적 감성학


 (A15) 인간 인식의 두 줄기가 있는데, 그것들은 아마도 하나의 공통의,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뿌리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감성과 지성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를 통해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지고, 반면에 후자를 통해 사고된다. 이제 감성은 그 아래에서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지는 조건들을 이루는 선험적 표상들을 함유하는 한에서, 초월철학에 속한다. (A16) 이 초월적 감성이론은 요소학의 제1부문에 속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인식의 대상들이 주어지는 조건들은 그 대상들이 사고되는 조건들에 선행하는 것이니 말이다.(p213) <순수 이성 비판 1> 中


 칸트는 공간과 시간을 선험적인 직관으로 설명한다. <순수 이성 비판 1>에서 칸트는 공간과 시간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하고 선험적인 직관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또한, 시간과 공간이 현상의 재료가 되는 잡다한 것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고 해석한다. 감각 자료들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일정한 관계에 따라 정리되어 수용되면서 비로소 개념들이 기능할 수 있기에, 이들은 대상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제일의 필수적인 조건이자 직관의 형식이 된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형식에서만 대상은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 형식 안에서 사물이 존재(인식)한다.


  (A20)(B34) 우리가 대상에 의해 촉발되는 한에서, 대상이 표상능력에 미치는 결과가 감각이다. 감각에 의해 대상과 관계 맺는 그런 직관은 경험적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경험적 직관의 무규정적 대상을 현상이라 일컫는다. 현상에서 감각에 대응하는 것을 나는 그것의 질료라고 부르며, 그러한 현상의 잡다[한 것]가 일정한 과계에서 질서지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나는 현상의 형식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형식) 안에서 감각에 속하는 것을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는 그런 모든 표상을 (초월적 의미에서) 순수하다고 부른다... (A21)(B35) 모든 선험적 감성 원리들에 대한 학문을 나는 초월적 감성학이라 부른다.(p241) <순수 이성 비판 1>  中


 (A33)(B49) 시간과 공간은 무엇보다도 순수 수학이 공간 및 그것의 관계들의 인식과 관련해 빛나는 예를 보여 주듯이, 그로부터 여러 종합적 인식들을 선험적으로 길어낼 수 있는 두 인식 원천이다. 그것들은 곧 둘다 모든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이고, 그로써 선험적 종합 명제들을 가능하게 한다. (A39) (B56) 그러나 이 선험적 인식 원천들은 바로 그(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한계, 곧 그것들은 현상으로서 고찰되는 한에서의 대상들과만 관계하며, 사물들 그 자체를 서술하는 것은 아니라는 한계를 정한다.(p259) <순수 이성 비판 1> 中


 (A49)(B66)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은, 모든(외적 내적) 경험의 필연적 조건들로서 공간과 시간은 순전히 우리의 모든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이고, 따라서 이것들과의 관계에서 모든 대상들은 순전한 현상들이며 이런 식으로 독자적으로 주어지는 사물들이 아니라는 점, 또한 그 때문에 사물들에 대해 그것의 형식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선험적으로 얘기할 수 있지만, 이 현상드의 기초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물들 그 자체에 관해서는 결코 최소한의 것도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p267) <순수 이성 비판 1> 中


 2. 초월적 논리학


 '초월적 논리학'은 인식들의 근원과 점위와 객관적 타당성을 규정하는 학문이다. 그중에서도 '초월적 분석학'은 순수 지성 인식의 요소들과, 그것 없이는 어떤 대상도 사고될 수 없는 원리들을 서술하는 초월 논리학의 부문에 해당한다.


 (A56)(B81) 공간도 공간의 어떠한 선험적인 기하학적 규정도 초월적 표상이 아니고, 이런 표상들은 전혀 경험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인식과, 그러면서도 이 표상들은 경험의 대상들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 초월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A57)(B82) 순수한 직관도 아니고 경험적 직관도 아닌, 순수 사고의 작용들, 그러니까 경험적이지도 감성적이지도 않는 근원을 갖는 개념들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우리는 미리 그에 의해 우리가 대상들을 온전히 선험적으로 사고하는 순수 지성 인식과 순수 이성 인식의 한 학문 이념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들의 근원과 범위와 객관적 타당성을 규정하는 그러한 학문은 초월 논리학이라고 일컬어져야 할 것이다.(p278)<순수 이성 비판 1> 中


  (A65)(B89) 초월적 분석학은 우리의 선험적인 전체 인식을 순수 지성 인식의 요소들로 분해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1. 개념들은 순수한, 경험적이 아닌 개념들이다. 2. 개념들은 직관 및 감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와 지성에 속한다. 3. 그것들은 요소 개념들로서 파생된 혹은 그것들로 합성된 개념들과는 구별된다. 4. 개념들의 표는 완벽하고, 그것들은 순수 지성의 전 영역을 완전히 아우른다.... 순수 지성은 단지 모든 경험적인 것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모든 감성과도 완전히 구별된다. 그러므로 순수 지성은 그 자체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그 자체로 충분한 통일체이지, 외부로부터 무엇인가가 추가됨으로써 증대될 수 있는 그런 통일체가 아니다.(p285) <순수 이성 비판 1> 中


 칸트는 모든 인식이 재료(내용, Materie)와 이 재료를 정리 정돈하는 형식(Form)을 요소로 해서 이루어지며, 이 형식은 이미 지성에 예비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때문에, 인간 인식의 밑바탕에는 '지성개념들(notiones)'이 있으며, 순수 지성개념들의 형이상학적 연역은 이들로부터 '범주들'을 발견하는 일이 된다.


 (A50)(B74) 우리 인식은 마음의 두 원천으로부터 유래한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원천은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능력(곧, 인상들의 수용성)이고, 두 번째 원천은 이 표상들을 통해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즉 개념들의 자발성)이다. 전자에 의해 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후자에 의해 이 대상이 (마음의 순전한 규정인) 저 표상과 관련하여 사고된다. 그러므로 직관과 개념들은 우리의 모든 인식의 요소들을 이룬다. 그렇기에 그것들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 직관이 없이는 어떠한 개념들도, 또한 개념들이 없이는 어떠한 직관도 인식을 제공할 수가 없다.(p273) <순수 이성 비판 1> 中


 (A79)(B105) 한 판단에서 서로 다른 표상들에게 통일성을 부여하는 동일한 기능이, 곧 또한 한 직관에서의 여러 표상들의 순전한 종합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표현해서, 이것이 순수 지성개념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초월적 내용을 부여받은 표상들은 순수 지성개념들이라고 일컬어지며, 객관들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는다.(p297) <순수 이성 비판 1> 中


 (A94)(B128) 범주들이란 대상 일반에 대한 개념들로서, 이에 의해 대상 일반에 대한 직관이 판단을 위한 논리적 기능들의 하나와 관련하여 규정되는 것으로 여겨진다.(p316) <순수 이성 비판 1> 中


 (A94)(B126) 선험적 개념인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은, 그것에 의해서만 경험이 (사고의 형식 면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에 의거한다. 그러니까 이 때 범주들은 반드시 그리고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과 관계 맺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이것들을 매개로 해서만 도대체가 경험의 대상이라는 것이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p314)... (A94) 그러므로 모든 선험적 개념들의 초월적 연역은 우리의 전 탐구가 이끎을 받아야 할 원칙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곧 선험적인 개념들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조건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근거를 제공하는 개념들은 필수적이다.(p315) <순수 이성 비판 1> 中


 지성은 종합적 통일을 매개로 표상들에게 초월적 내용을 부여하는 작용을 통해 판단의 논리적 형식을 성립시키는데, <순수 이성 비판> 내에서 칸트는 이를 '범주표'를 통해 정리한다. '범주표'상의 12개의 순수 지성개념들은 인식에서 범주로서 기능하며, 이를 통해 한 대상이 인식되고, 개념적으로 파악된다.


 (A68)(B93) 지성은 한낱 소득적으로만, 즉 비감성적인 인식 능력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감성을 떠나서는 어떠한 직관에도 관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성은 직관의 능력이 아니다. 그러나 직관을 제외하고 나면, 개념들에 의한 것 외에는 다른 인식 방식이 없다... 감성적 직관들이 인상들의 수용성에 근거하듯, 개념들은 그러니까 사고의 자발성에 근거한다. 이제 지성은 이 개념들을 그것들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 외에는 달리 사용할 수가 없다... 판단은 한 대상에 대한 간접적인 인식, 그런까 대상의 표상에 대한 표상이다. 모든 판단에는 많은 표상들에 타당한 한 개념이 들어 있고, 이 많은 표상들 가운데에는, 궁극적으로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 한 주어진 표상도 포함되어 있다.(p288) <순수 이성 비판 1> 中


  표상들은 직관에서 주어질 수 있지만, 인식은 현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상이 개념에서 통일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잡다한 표상과 객관과의 관계를 맺는 종합함을 칸트는 '통각(Apperzeption)'으로 설명한다.


 (A106) 모든 필연성에는 항상 초월적인 조건이 기초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직관들의 잡다의 종합에서, 그러니까 객관들 일반의 개념들의 종합에서도, 따라서 경험의 모든 대상들의 종합에서도 의식의 통일이라는 초월적 근거를 반드시 만나게 된다...  (A107) 이 근원적인 초월적 조건이 바로 다름아닌 초월적 통각이다.(.p325) <순수 이성 비판 1> 中 


 (A119) 상상력의 종합과 관계 맺고 있는 통각의 통일[기능]이 지성이고, 그러니까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과 관계하는 통각의 통일[기능]은 순수 지성이다. 그러므로 모든 가능한 현상들과 관련해서 상상력의 순수 종합의 필연적 통일을 함유하는 선험적 순수 인식들은 지성 중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범주들, 곧 순수 지성개념들이다.... 순수 지성은 범주들을 매개로 하는 모든 경험들의 형식적 종합적 원리이고, 그래서 현상들은 지성과 필연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p335) <순수 이성 비판 1> 中


 그렇지만, 이러한 인식 작용은 형식적 조건을 필요로 한다. 즉, 감성의 선험적인 형식적 조건들(시간, 공간)을 함유해야 하며, 이 조건 하에서만 어떤 대상에라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조건을 함유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우리의 인식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조건 하에서 감각에 의해 표상되는 것만이 순수 지성 개념에서 사고된 후에 가능하게 된다.


 (B146) 대상을 사고하는 것과 대상은 인식하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다. 인식을 위해서는 요컨대 두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도대체가 그것을 통해 대상이 사고되는 개념(곧, 범주)이고, 둘째는 그것을 통해 대상이 주어지는 직관이다.(p356)... (B147) 공간, 시간상의 사물들은 오직 지각(곧, 감각을 동반하는 표상)인 한에서만,그러니까 경험적 표상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선험적인 직관들이 그리고 이것들을 매개로 한 지성개념들이 경험적 직관들에 적용될 수 있는 한에서만, 인식을 만들어낸다. 범주들은 단지 경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위해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만 쓰인다. 이 경험적 인식을 경험이라 일컫는다. 따라서 범주들은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건 사물들을 인식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다른 용도도 갖지 않는다.(p357) <순수 이성 비판 1> 中


 (B164) 감성적 직관의 잡다를 연결하는 것은 상상력이고, 이 상상력은 지성적 종합의 통일 작용에서는 지성에 의존하며, 포착의 잡다의 면에서는 감성에 의존한다. 그런데 모든 가능한 지각은 포착의 종합에 의존하지만, 이 포착의 종합 자신, 곧 이 경험적 종합은 선험적인 종합에 그러니까 범주들에 의존하므로, 모든 가능한 지각들은, 그러니까 또한 언제나 경험적 의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것은, 곧 자연의 모든 현상들은 그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면에서 범주들에 종속할 수 밖에 없고, 자연은 그것의 필연적인 법칙성의 근원적 근거인 범주들에 의존한다. 그러나 순전히 범주들로써 현상들에게 선험적으로 법칙들을 지정하는 순수한 지성 능력도 공간/시간상의 현상들의 법칙성인 자연 일반이 의존하고 있는 법칙들 너머까지는 이르지 못한다.(p369)  <순수 이성 비판 1> 中


 칸트는 뒤이어 '순수 지성의 종합원칙'을 통해 경험 인식에서 형식으로 작동하는 객관적 실재성을 갖는 범주를 살핀다. 사물의 본질 규정의 원리들인 양(量)개념, 질(質)개념, 관계(關係) 개념과 실존 규정의 양태(樣態)개념의 객관적 사용 원칙을 통해 칸트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주관적 조건들이 경험된 대상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는 우리의 경험적 사물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실재하는 세계의 사물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A246)(B303) 순수 지성 개념들은 결코 초월적으로 사용될 수 없고, 항상 경험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며, 순수 지성의 원칙들은 단지 가능한 경험의 보편적 조건들과의 관계에서 감관의 대상들과만 관계 맺을 수 있되,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직관할 수 있는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서) 사물들 일반과 결코 관계맺을 수 없다.(p482) <순수 이성 비판 1> 中 


 (A247)(B304) 초월적 분석학은 이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과를 얻는다. 곧, 지성은 선험적으로는 결코 가능한 경험 일반의 형식을 예취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고, 또 현상이 아닌 것은 경험의 대상일 수 없으므로, 지성은 그 안에서만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질 수 있는 감성의 경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말이다. 지성의 원칙들은 한낱 현상들을 해설하는 원리들일 따름이며, 사물들 일반에 대한 선험적인 종합적 인식들을 체계적 교설로 제공한다고 과시하는 존재론이라는 의기양양한 명칭은 순수 지성의 순전한 분석학이라는 겸손한 명칭으로 대치되어야 한다.(p483) <순수 이성 비판 1> 中 


 (A287)(B343) 우리는 우리의 사고의 대상분야를 우리 감성의 조건들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확장할 수도 없고, 현상들 외에 순수 사고의 대상들, 다시 말해 예지체들을 상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제시될 수 있는 어떠한 적극적인 의미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범주들이란 사물들 그 자체를 인식하기에 불충분한 것이고, 감성의 자료(資料)가 없으면 대상 없는, 한낱 지성 통일의 주관적 형식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p517) <순수 이성 비판 1> 中


 <순수 이성 비판 1>에서 칸트는 초월철학 중 일부인 초월적 감성학과 초월적 분석학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선험적 형식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의 감성이 지각한 현상과 개념의 결합이 이루어져 인식이 이루어지지만, 경험을 넘어설 수 없는 순수 지성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인식도 제한됨을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에 이어 <순수 이성 비판 2>에서는 초월적 변증학과 초월적 방법론이 설명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리뷰에서 정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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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3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4 0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대는 옷을 벗고 씨 뿌리고, 옷을 벗고 소들을 몰고

 옷을 벗고 수확하시라. 데메테르 여신의 일을 모두 

 제때에 보살펴 모든 것이 제때에 자라기를 바란다면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나중에 궁핍해져서 남의 집을 돌며

 구걸해도 아무것도 얻지못할 것이오.(390 - 395) <일과 날>(p120) 中


  헤시오도스(Hesiodos, BC 740 ~ BC 670)의 시(詩) <일과 날 Opera et Dies>에 이미  '노동(勞動, labour)'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을 보면, 노동(형태와 무관하게)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임을 다시금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을 기준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 Theories of Labour Value)은 여러 학자들 -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 ~ 1406) , 윌리엄 페티(Sir William Petty, 1623 ~ 1687)등 - 에게 지지를 받았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1818 ~ 1883)가 <자본론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conomie> 사상에서 노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떤 물건의 가치량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 즉 그것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드는 노동시간이다. 동일한 노동량이 들어 있는 상품들, 동일한 노동시간에 생산할 수 있는 상품들은 동일한 가치량을 가진다. 가치로서는 모든 상품은 일정한 크기의 응고된 노동시간에 불과하다.(p49) <자본론1> 中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가치 측정기준으로 노동시간을 제시하고, 같은 책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해서도 분석을 수행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으로서 '노동력'은 노동을 통해서만 발휘되며, 그것의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활 유지라고 전제한다. 이에 따른 지출의 증가는 소득의 증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전제이지만, 아웃소싱(outsourcing)이 일반화되어 기업의 위험을 외부화하는 오늘날의 노동 현실은 이와 거리가 있다. 어쩌면 우리의 노동에 대한 인식은 과거만 못할지도 모른다.


 노동력의 가치는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드는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은 오직 살아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은 이 개인의 생존을 전제로 한다. 이 개인이 살아있다면, 노동력의 생산이란 이 개인 자신의 재생산, 그의 생활 유지다. 살아 있는 개인은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결국 이 생활수단의 생산에 드는 노동시간이 된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다. 노동력의 발휘인 노동에는 인간의 근육, 신경, 뇌 등의 일정한 양이 지출되는데, 그것은 다시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출의 증가는 소득의 증가를 조건으로 한다.(p225) <자본론1> 中


 마르크스 이후 산업화, 정보화 시대로 넘어가면서 노동의 가치는 점점 떨어져왔으며, 이제는 '노동의 종말'을 말할 때에 이르렀다. 인간의 노동이 없는 세상.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 ~ )은 <노동의 종말 The End of Work>에서 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한, 맥스 테그마크 (Max Tegmark, 1967 ~ )은  <맥스 테그마크의 라이프 3.0 Life 3.0: Being Human in the Age of Artificial Intelligence>를 통해 인공지능(AI)에 의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모두 설계되는 세상을 전망한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생산하는 세상. 이러한 미래에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결국 노동은 기계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노동은 단지 효용을 생산하는 데 관한 것이다. 반면, 사람들은 내재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공유된 사회 공동체 의식을 재활성화 하기 위해 해방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다가오는 세기에 인류를 위한 위대한 도약을 꿈꾸고 있는 시민 사회에서 사회적 자산을 만들어 내기 위한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다.(p45) <노동의 종말> 中


 맥스 테그마크는 이러한 미래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호모 센티언스(Homo Sentiens)가 된다고 말한다. 문명의 주인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고 우주의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인 호모 센티언스는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 ~ )의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또다른 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점점 더 나은 도구를 만들어 고대의 신들과 경쟁했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도구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능력에서도 고대의 신들을 능가하는 초인간을 창조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신성(神性)은 사이버 공간만큼이나 일상적인 것이 되어 그 경이롭고 경이로운 발명품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p76)... 건강, 행복, 힘을 추구하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될 때까지 자신들의 모습을 한 번에 하나씩 점진적으로 바꿔나갈 것이다.(p77) <호모 데우스> 中


 <구약성경>과 <실락원 Paradise Lost>에서 '노동'은 아담에 대한 신의 저주로 주어진 짐이다. 이러한 짐을 인류가 벗고 다른 종족(호모 센티우스, 호모 데우스)가 된다는 것이 '복락원(Paradise Regained)'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든 우리에게 노동의 대가는 최소한 '내일 걱정은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여유'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기본 전제가 충졸될 수 있다면, 미래에 대한 근심도 조금은 덜어질 듯 하다. 기본소득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고민할 하나의 대안이라 생각된다. 5월 1일을 맞아 노동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나에 대한 저주는 옆으로 빗나가 땅에 떨어졌소.

 일을 해서 양식을 얻는 것, 무슨 해가 

 되리오? 더욱 나쁜 것은 태만. 나의 노동은

 우리를 부양해주리다. 추위와 더위의 해를

 입지 않도록 하나님은 때에 알맞게 배려하시어

 우리가 원치 않아도 필요한 것을 준비하셨고,

 심판하면서도 가엾이 여기시어 그 손은

 값없는 우리에게 옷을 입혀주셨소이다.(1055 - 1060) <실락원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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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8 2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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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8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 기본소득에 대한 철학적 옹호
필리프 판 파레이스 지음, 조현진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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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하에서 사회 전체는 잉여의 배분을 통제하며, 그래서 만약 사회 전체가 실질적 기본소득을 도입하기로 결정한다면, 그 사회는 그런 보조금을 지속 불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자본을 사용함으로써 그 사회의 결정을 무산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경제적으로 덜 효율적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해도, 다시 말해 자본주의 아래서 달성할 수 있는 최대의 산출량이 사회주의하에서 달성할 수 있는 최대의 산출량보다 더 크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의 산출량을 필요한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분배할 수 있는 더 큰 역량을 사회주의가 갖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보다 더 높은 기본소득의 재원을 여전히 조달할 수도 있다.(p402)

논의의 초점은 이 책의 출발점이었던 전통적 질문 -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 에서, 사회경제 체제를 다르게 할 수 있는 많은 유관한 차원들로 이동했다. 미래를 위한 핵심 쟁점은 오히려 무조건적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하는지의 여부, 도입한다면 언제 그리고 어떻게 도입해야 하는가이고, 재분배 권력을 초국가적인 관계 당국에 맡겨야 하는지, 맡긴다면 언제 그리고 어떻게 맡겨야 하는가이며, 연대성의 느낌을 기르기 위해 사회적 삶의 조직을 강제해야 하는지, 강제한다면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이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미래의 중요한 투쟁이 그것을 둘러싸고 이루어지게 될 쟁점들이다... 이런 불확실한 길을 따르는 성공만이 자본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다.(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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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2020-04-29 14: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확실한 길을 따르는 성공.. 이미 많은 부분이 코로나 시국에서 드러나듯 왜곡돼왔기 때문이겠죠ㅜ 저는 지금의 자유시장경제 하에서도 불로소득 분을 세금으로만 징수해도 충분한 분배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연대성의 느낌을 갖기 위한 과제가 가장 어려워 보입니다! 날이 점점 좋아집니다^^.

겨울호랑이 2020-04-29 14:17   좋아요 2 | URL
오두막님 말씀처럼 시장경제 체제 하에서도 시장 원리가 충분히 작동되고, 분배 기능이 잘 수행된다면 복지재원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시장경제와 별도로 ‘자본‘중심의 자본주의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체제 하에서는 부실한 대기업들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소멸되지 않고 공적자금을 수혈받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시장경제가 작동하기를 희망합니다. 오두막님 화창한 봄날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순수이성 비판 서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
임마누엘 칸트 지음, 김석수 옮김 / 책세상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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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우리의 인식이 감성적 직관과 지성적 범주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의 근원에는 언제나 그 인식이 통일을 이루기 위해 초월적 통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초월적 통각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의 틀과 12개의 범주라는 지성의 틀을 근원적으로 떠받쳐, 인식 일반의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정당화하는 토대가 된다.(p147) - 해제 중 -

이 ‘생각하는 나‘로서의 초월적 통각은 현실의 주어진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과된 이념의 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이성은 지성의 판단 능력과는 달리 추리를 통해 주어진 세계를 넘어 부과된 세계로 우리의 개념과 범주를 월권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초월적 논리는 허구적 논리, 변증적 논리와 다시 한번 결전을 벌여야 한다.(p148) - 해제 중 -

구성적 원리가 주어진 세계 자체를 정리하고 결합하는 원리라면, 규제적 원리는 이념의 세계에 비추어 주어진 현상 세계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만드는 것이다. 이성의 규제적 원리는 발견의 원리이지 구성의 원리가 아니다.(p150) - 해제 중 -

우리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은 순수 지성의 개념인 인과 범주를 현상 세계에만 적용해야 하는데, 그것을 넘어 이념의 세계에도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빠져들게 되는 이러한 오류는 우리 이성 안에 본래부터 내재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p151)...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착각 앞에서 인간은 자신 안의 ‘위대한 허구‘, ‘허구 아닌 허구‘를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버릴 수 없는 이념으로서의 이 허구가 바로 영혼의 불멸과 자유와 신이다.(p152) - 해제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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