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옷을 벗고 씨 뿌리고, 옷을 벗고 소들을 몰고

 옷을 벗고 수확하시라. 데메테르 여신의 일을 모두 

 제때에 보살펴 모든 것이 제때에 자라기를 바란다면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나중에 궁핍해져서 남의 집을 돌며

 구걸해도 아무것도 얻지못할 것이오.(390 - 395) <일과 날>(p120) 中


  헤시오도스(Hesiodos, BC 740 ~ BC 670)의 시(詩) <일과 날 Opera et Dies>에 이미  '노동(勞動, labour)'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을 보면, 노동(형태와 무관하게)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임을 다시금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을 기준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 Theories of Labour Value)은 여러 학자들 -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 ~ 1406) , 윌리엄 페티(Sir William Petty, 1623 ~ 1687)등 - 에게 지지를 받았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1818 ~ 1883)가 <자본론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conomie> 사상에서 노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떤 물건의 가치량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 즉 그것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드는 노동시간이다. 동일한 노동량이 들어 있는 상품들, 동일한 노동시간에 생산할 수 있는 상품들은 동일한 가치량을 가진다. 가치로서는 모든 상품은 일정한 크기의 응고된 노동시간에 불과하다.(p49) <자본론1> 中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가치 측정기준으로 노동시간을 제시하고, 같은 책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해서도 분석을 수행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으로서 '노동력'은 노동을 통해서만 발휘되며, 그것의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활 유지라고 전제한다. 이에 따른 지출의 증가는 소득의 증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전제이지만, 아웃소싱(outsourcing)이 일반화되어 기업의 위험을 외부화하는 오늘날의 노동 현실은 이와 거리가 있다. 어쩌면 우리의 노동에 대한 인식은 과거만 못할지도 모른다.


 노동력의 가치는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드는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은 오직 살아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은 이 개인의 생존을 전제로 한다. 이 개인이 살아있다면, 노동력의 생산이란 이 개인 자신의 재생산, 그의 생활 유지다. 살아 있는 개인은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결국 이 생활수단의 생산에 드는 노동시간이 된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다. 노동력의 발휘인 노동에는 인간의 근육, 신경, 뇌 등의 일정한 양이 지출되는데, 그것은 다시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출의 증가는 소득의 증가를 조건으로 한다.(p225) <자본론1> 中


 마르크스 이후 산업화, 정보화 시대로 넘어가면서 노동의 가치는 점점 떨어져왔으며, 이제는 '노동의 종말'을 말할 때에 이르렀다. 인간의 노동이 없는 세상.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 ~ )은 <노동의 종말 The End of Work>에서 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한, 맥스 테그마크 (Max Tegmark, 1967 ~ )은  <맥스 테그마크의 라이프 3.0 Life 3.0: Being Human in the Age of Artificial Intelligence>를 통해 인공지능(AI)에 의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모두 설계되는 세상을 전망한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생산하는 세상. 이러한 미래에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결국 노동은 기계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노동은 단지 효용을 생산하는 데 관한 것이다. 반면, 사람들은 내재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공유된 사회 공동체 의식을 재활성화 하기 위해 해방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다가오는 세기에 인류를 위한 위대한 도약을 꿈꾸고 있는 시민 사회에서 사회적 자산을 만들어 내기 위한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다.(p45) <노동의 종말> 中


 맥스 테그마크는 이러한 미래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호모 센티언스(Homo Sentiens)가 된다고 말한다. 문명의 주인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고 우주의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인 호모 센티언스는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 ~ )의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또다른 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점점 더 나은 도구를 만들어 고대의 신들과 경쟁했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도구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능력에서도 고대의 신들을 능가하는 초인간을 창조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신성(神性)은 사이버 공간만큼이나 일상적인 것이 되어 그 경이롭고 경이로운 발명품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p76)... 건강, 행복, 힘을 추구하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될 때까지 자신들의 모습을 한 번에 하나씩 점진적으로 바꿔나갈 것이다.(p77) <호모 데우스> 中


 <구약성경>과 <실락원 Paradise Lost>에서 '노동'은 아담에 대한 신의 저주로 주어진 짐이다. 이러한 짐을 인류가 벗고 다른 종족(호모 센티우스, 호모 데우스)가 된다는 것이 '복락원(Paradise Regained)'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든 우리에게 노동의 대가는 최소한 '내일 걱정은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여유'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기본 전제가 충졸될 수 있다면, 미래에 대한 근심도 조금은 덜어질 듯 하다. 기본소득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고민할 하나의 대안이라 생각된다. 5월 1일을 맞아 노동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나에 대한 저주는 옆으로 빗나가 땅에 떨어졌소.

 일을 해서 양식을 얻는 것, 무슨 해가 

 되리오? 더욱 나쁜 것은 태만. 나의 노동은

 우리를 부양해주리다. 추위와 더위의 해를

 입지 않도록 하나님은 때에 알맞게 배려하시어

 우리가 원치 않아도 필요한 것을 준비하셨고,

 심판하면서도 가엾이 여기시어 그 손은

 값없는 우리에게 옷을 입혀주셨소이다.(1055 - 1060) <실락원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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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8 2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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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8 2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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