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추가 포식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점진적인 현상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육식동물이 대대적으로 등장한 것은 실제로 59 4,300만 년 전이었다. 갑자기 포식이 그저 먹이그물 내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를 갖춘 생활양식이 된 것이다. 선캄브리아 시대 포식자들이 수동적이었다면, 캄브리아기 초에 바다를 휩쓸었던 두 번째 파도의 포식자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능동적이었다. 눈을 가진 최초의 동물은 삼엽충 - 최초의 삼엽충이었다.  최초의 진정한 삼엽충은 포식자이기도 했다. 팔로타스피스, 네오코볼디아, 시주디스스 같은 눈을 가진 모든 삼엽충들은 캄브리아기 초, 캄브리아기 폭발이 시작될 무렵의 대표주자이기도 했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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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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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1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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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1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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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13: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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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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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2: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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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3 - 권력과 정치 3.1운동 100주년 총서 3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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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게 군대는 해외 침략의 선봉대이자 식민지 지배의 최후 보루였다. 의병투쟁에 대한 탄압이 전자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면, 3.1운동은 후자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186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에서는 3.1운동 전후 시기 식민통치의 주체와 이들에 대항하는 세력의 주체에 대해 말한다. 일본 육군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을 성공시킨 두 세력인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 출신들이 장악하는데, 그중에서도 조슈번 출신들이 조선, 대만, 사할린 등 여러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이들 식민지를 발판 삼아 대륙으로 뻗어나갈 속내를 갖고 있었기에, 식민지와 본토 일본을 구분하는 정책을 취했고, 불평등한 처우는 식민지 내 상황을 악화시켰다.

법령들은 일본에서 시행되는 법령과 내용상 유사하거나 일본의 제반 제도에 상응하게끔 조정된 것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조선에만 ˝특수하게 존재한다˝고 인정된 상황에 맞추어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동화주의 측면이 우선적이고 차별주의 측면이 부차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체계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조선에는 일본 헌법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국민에게 부여된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나 참정권 등 기본권이 조선인에게는 보장되지 않았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62

이에 반해, 하라 다카시(原 敬, 1856 ~ 1921)로 대표되는 문인(文人) 출신 정치가들은 궁극적인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추구하면서 조선인을 황국신민화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3.1운동의 결과는 조선에 대한 압도적이었던 조슈파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하라 다카시는 구미의 식민지와는 달리 조선을 식민지로 생각하지 않고 일본에 동화시킬 대상으로 간주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조선을 오키나와나 훗카이도처럼 일본의 일부로 삼고자 했다. 이러한 동화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에 일본과 같은 교육과 지방제도를 실시하는 등 일본의 법률과 제도를 식민지에서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46

1919년의 식민지 관제 개정은 제1차 야마모토 내각 시기 식민지 개혁의 연장선에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하라 내각은 추진 중이던 ‘식민지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3.1운동을 계기로 총독부 관제 개정에 착수한 것이 아니었지만 3.1운동이라는 민족적 저항이 없었다면 육군 조슈파의 반발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슈파는 타이완총독을 양보하는 대신 예비역이었던 사이토를 현역으로 복귀시켜 조선총독에 취임시킴으로써 문관총독의 임명을 막아 조선총독부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45

이에 대항하는 조선 민중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지배세력에 대항해 나갔다. 해외에서는 유학생을 중심으로, 국내에서는 종교계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저항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움직임은 지역 공동체로 이어지면서 들불처럼 번져갔다.

독립선언의 계획과 준비는 상대적으로 정형화된 조직을 가진 종교계나 체계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학생층이 주도했다. 당시 국내에서 집단행동을 계획할 수 있는 조직을 보유한 곳은 종교계뿐이었다. 지금까지 발표된 수많은 논문은 천도교계와 개신교계에 의해 독립선언이 준비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밝혔다.(p192)... 3월 중순 이후 3.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주된 참여자는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마을이라는 전통적 공동체에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참여에 대해서는 ‘공동체적 동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193

또한, 친일세력들 역시 3.1운동 직후 그들의 활동을 본격화하며 제국 내에서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데, 대표적인 단체가 국민협회(國民協會)다. 이들의 생각이 참정권 획득을 통해 제국 내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고, 단결된 힘을 통해 새로운 혁명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한 이들의 생각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좌절되면서 시들해지고 만다.

1919년 3.1운동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던 한편, 친일세력들에게도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 방식이 교체되며, 무단통치 시기에 금지되었던 단체 결성과 정치활동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3.1운동이 친일세력들에게 본격적 활동의 기회를 열어주었던 것이다.(p262)... 국민협회는 내지연장주의라는 새로운 지배 전략과 친일세력의 정치적 욕구를 참정권 청원운동에 흡수하여 1920년대 최대의 친일단체로 성장한 정치세력이었다... 그러나 국민협회의 성장을 가능케 했던 요소들은 곧 국민협회가 통치당국과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다. 참정권 확보를 통해 완전한 제국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원론적으로는 내지연장주의에 부합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식민지배세력이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기 때문이었다. 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295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에서는 3.1 독립항쟁이 가져온 일본과 조선의 권력 구조 변화가 상세하게 묘사된다. 약속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다가 민중이 두려워 태화관에 숨어 있던 민족대표라는 이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3.1 독립항쟁이 가져온 변화는 분명 큰 것이었고 명암(明暗)은 분명했다. 이후 해외 지역에서 무장독립투쟁이 본격화된 것과 함께 친일파의 양산도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3.1 독립항쟁의 역사적 의의는 크다 여겨진다.

본래 리뷰는 여기까지이나 요즘 우리 현실과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가 나오는 대목이 있어 옮겨본다. 우리 사회의 나쁜 문제점의 기원을 찾는다면 일단 일제때부터라고 말하고 근거를 찾으면 대충 맞을 듯하다...

일본 형사소송법에서 예심제도를 도입한 목적은 피고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검사가 함부로 기소하는 것을 방지해 피고인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검찰이나 사법경찰관은 현행범 등 극히 제한된 경우가 아니면 독자적인 강제수사를 할 수 없었다. 이같이 인권 보호를 위해 시행된 예심제도가 조선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변용되었다. 조선에서는 예심판사가 아니라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 등 수사기관이 예심판사에 준하는 강제처분권을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예심제도는 원래의 목적인 인권 보호가 아니라 인권 탄압을 위한 제도로 변용되었다._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 3. 권력과 정치>,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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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21-03-06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다보니 복거일, 「비명(碑銘)을 찾아서」가 떠오르네요. 복거일이라는 작자가 영어공용화를 주장하는등 보수꼴통 발언하기로 유명하지만 이 책 만큼은 훌륭합니다. 재미도 있습니다. 이 작품을 구상한 상상력도 뛰어나구요. 영화로도 나왔어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영화는 별로구요. 각색도 많이 됐습니다. 게다가 주연이 발연기 장동건이니 기대하기 어렵죠.

일본에서 유학하고 직장생활도 했던 선배에게 이 책을 권했더니 등장인물들 일본식 이름도 어설프고 뭔가 허술하다더니 다 읽고 나서는 저하고 독서토론하자고 하더라구요. 그게 벌써 십년도 훨씬 전이지만요.

겨울호랑이 2021-03-07 08:09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저도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봤던 기억이 납니다. 도입부에 축구선수 이동국이 일장기를 달고 선수로 뛰고, 한국이 일본에 완전히 종속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던 영화로 기억에 남네요. 그 모든 것이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samadhi(眞我) 2021-03-07 12:42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그 아찔한 가정이 참신했죠. 그럴 법하다 생각했어요. 출간된지 30년 넘은 소설이라 지금은 그렇게 놀랍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조지 오웰, 「1984」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한국인에게 너무나 암울한 상황이.

겨울호랑이 2021-03-07 12:53   좋아요 1 | URL
^^:) 개인적으로는 그 영화를 보던 때에는 참 암울하게 느껴졌습니다만, 지금은 그 때만큼 암울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려움도 지금 분명 있고 넘어야할 산도 높습니다만 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동안 긴 시간이 지났음을 실감합니다.
 

대략 1780 년 이후부터 역사학에서 ‘위기 Krise‘는 새로운 시대 경험에 대한 표현이자 시대 변혁의 요소와 지표가 되었으며, 사용 빈도를 감안한다면, 그 정도가 실제로는 훨씬 더 강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위기‘라는 말은 그것에 따라붙는 감정들만큼이나 다층적이고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있다. 연대기적인 의미로 파악할 때, ‘위기‘는  지속을 가리키며, 이것은 단기적 후은 장기적인, 그리고더 나은 상태로 또는 더 나쁜 상태로의 과도기를, 또는 전혀 다른 어떤 상태로의 전환기를 가리킨다. 위기 Krisis‘라는 말은 경제학에서처럼 자신의 귀환을 알릴 수도 있고, 심리학이나 신학에서처럼 실존적 해석의 모범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 탐구와 해석은 제시된 모든 사례에 참여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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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9 - 해방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9
카를 마르틴 그라스 &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음, 오토 브루너 & 베르너 콘체 & 라인하르트 / 푸른역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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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대 말에 와서야 이 표어는 지금까지의, 그리고 미래의 역사에서 선도 개념으로 정착된다.(p45)... 정치적인 개념을 넘어서 "또 다른 확장", 즉 "해방이라는 근본사상을 단순히 국민적인 삶만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삶 전반과 연관 지을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철학적이고 세계사적인 개념"으로의 확장 또한 존재한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9 : 해방>, p47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 개념사 사전의 9번째 주제는 '해방 Emanzipation'이다. 19세기 후반에 계몽주의와 맞물려 오늘날의 의미 체계가 완성된 이 독일어 안에는 두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성인으로 인정' 또는 '노예 해방'과 같은 법률적 행위로서의 해방과 관계 변화로서의 해방이 그것이다.

합법적인 법률 행위의 영역과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는 목표를 가진 역사 과정의 영역을 이 개념 내에서 하나로 결합한다는 것은 바로 '해방' 개념의 유연성과 파괴력을 나타낸다.(p74)... 정치적인 언어 사용에서 이 표현은 합법적인 법률 행위를 의미했고, 동시에 변혁 개념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래서 해방 개념은 양자의 항목이 지닌 난점들을 대립적으로 상호 지시하는 방식을 통해 연관시켰다... 이 표현이 변혁 개념으로 사용되는 곳에서는 해방되는 당사자에 반해 항상 엘리트적 주도권을 함축하고 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9 : 해방>, p75

해방이 양 자의 평등한 관계로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해방'은 상호 존중과 동등함을 결과로 가져온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해방은 기존 계약의 변형이 된다. 전자의 경우 '갑(甲)-을(乙)'관계의 청산이 이루어진다면, 후자는 '갑-을' 관계의 변경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며, 이 경우에 특히 '해방의 당사자'보다 '해방 시혜자'가 우위에 서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1945년 해방을 바라봤을 때, 우리의 '해방은 되었으나 아직 해방되지 않은' 현재 상황이 바로 보인다. 일제와 우리가 동등한 계약의 주체로서 과거사를 종료짓지 못했고, 대신 다른 이들에 의해 계약이 종료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의미에서 지금도 해방을 갈망하는 것은 아닐런지... 다른 민족의 언어인 독일어가 우리의 현실과 역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대강의 의미를 미루어 짐작해 본다. 시간과 지역을 넘어 역사는 순환하는 것이기에...

'해방'은 운동이자 목표의 개념이며, 결국에는 성취의 개념이 되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우선] 그것의 의미가 펼쳐진 두 가지 의미 축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과거와의 단절과 해방이 강조되거나, 아니면 미래 지향성과 목표, 즉 자유에 집중했다... 둘째로 이 개념은 항시 해방을 실행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위상을 지녔다. 말하자면 해방은 승인되거나, 쟁취될 수 있었다. 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9 : 해방>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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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 기본소득에 대한 철학적 옹호
필리프 판 파레이스 지음, 조현진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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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파이레스는 사회보험제도, 조건적인 보장소득안 같은 여타의 사회보장제도와 무조건적 기본소득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히 한다. 즉 기본소득 제도는 수혜자가 수혜 자격을 얻기 위해 과거 소득으로부터 기여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사회보험과 다르며, 자산 심사 여부나 노동 의향 및 작업 교육의 의향이 있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수급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조건적인 보장소득과 다르다. 그러나 판 파이레스는 기본소득이 데모그란트나 시민 소득과 같은 현존하는 최저소득보장안과 무조건적으로 지급된다는 특징을 공유한다고 서둘러 덧붙인다. 그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이 초기에는 낮은 액수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조건부 이전 제도들을 대체하지 않고 그런 제도들과 공존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_ 필리페 판 파이레스,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p427 해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다른 책들처럼 파이레스 또한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기본소득의 장점과 당위성에 대해 말한다. 그렇지만, 다른 기본소득 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파이레스 또한 기본소득의 시행 대신 기존의 보장제도가 폐지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초기에는 부담이 많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 제도와 병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는 결국 밑돌 빼서 윗돌 막기 식에 불과하지 않을까. 기본소득이 본격화할 시점에도 이들 제도가 병존할 수 있을까. 지속되지 못할 제도라면 포플리즘이란 비난을 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1988년 국민연금이 대통령선거와 연계되면서, ‘적게 내고 많이 가져가는‘ 구조로 설계되어 끊임없이 연금 고갈 문제로 시달리고 있는 경험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쩌면 기본소득으로 4대 보험이 철폐된다면 사회구조의 병폐는 없앨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기본소득이 가져올 다른 문제(취약계층의 희귀질병 환자들은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 등) 가 있기에, 기본 소득이 실질적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희귀질병이 아니어도 아제는 국민 4명 중 1명이 걸린다는 암 치료비에서 공단 부담금을 모두 기본 소득에서 부담한다면, 병원갈 일 많은 노년에 노령연금도 건강보험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비용으로 살아가야한다면... 마치 기업연금의 DC(확정기여형) 도입으로 DB(확정급부형)이 사라져가면서 결과적으로 퇴직소득이 줄어든 결과의 재판이 되는 것은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

또한, 코로나 19라는 재난 상황에 전국민에게 1회 10만원 정도의 금액 지급에도 퍼주기 논란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1인 당 수 백만원에 달하는 돈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조달할 것인지... 기본소득.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분명히 매력적으로 들리는 단어지만, 이의 실행을 말하기 전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PAY AS YOU GO.

어느 정도의 기본소득이 국민에게 지급되며, 이를 위해 얼마만큼의 금액이 필요하고, 이의 재원은 어떻게 마련되어야 할 것인지. 이에 대한 고민을 하고 난 후에야 우리는 2016년 스위스에서 부결된 기본소득 국민투표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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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3-05 23: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부결됐지만 첫투표에서 의미있는 숫자의 찬성표를 받았다고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장차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로봇시대 인간의 일>이라든지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복지국가가 내게 좋은19가지>등 그에 관한 긍정 메세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정보공개의 불평등이 개선될 것이라는게 제게는 긍정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생각해보고 논의는 해봐야할 주제라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3-05 23:23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점점 더 분명해지는 시점에서 기본소득이 주는 메세지, 희망이 분명히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이러한 개념이나 사상이 현실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여러 제약들이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 또한 사실이라 생각됩니다. 실행된다면, 기존의 연금제도와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을 합한 것보다 더 큰 규모의 자금과 영향력을 미치게 될 제도인만큼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또한, 재원 뿐 아니라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월급제 공산주의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생각해본다면, 기본소득은 아직 하나의 이론이지 현실로 나오기에는 이른 감이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