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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아이테토스 ㅣ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6
플라톤 지음, 정준영 옮김 / 이제이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45d 그렇지만 말이야, 그것들과 관련해서 다른 것들은 제법 이해하고 있네만, 사소한 어떤 것에 대해서는 난관에 봉착해 있네. 자네를 비롯해 여기 있는 이들과 더불어 검토해 봐야 할 게 바로 그것이네. 그럼 내게 말해 보게. 배운다는 건 배우게 되는 것들에 관해 더 지혜롭게 되는 것 아닌가?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78
이렇게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 ~ BC 399)의 사소한 어떤 것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테아이테토스 Theaetetus>는 시작된다. <테아이테토스>가 던지는 질문은 "앎(지식)이란 무엇인가"이다. 젊은 테아이테토스와 문답을 통해 진행되는 논의에서 처음 '앎=지각'이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외부 자극을 일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로부터 앎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최초의 논의다. 그렇지만, 이러한 명제는 곧바로 반박된다.
152c 뜨거운 것들이나 그런 모든 것들에서 나타남과 지각은 동일하네. 그것들은 각자가 지각하는 그대로 각자에게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일세. 그러므로 지각은 언제나, 있는 것에 대한 것이며, 앎인 한에서 틀리지 않는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92
누군가에게 '큰 것'이 다른 이에게는 '작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을 때, 우리는 '큼'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무엇을 안다'에서 그 무엇이 상대적인 양태로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제기되며, 이 과정에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90/485 ~ BC 415/410)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가 함께 비판된다. 참된 앎이 지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오는가?
157a 그 자체가 그것 자체로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들은 서로 간의 교섭 속에서 생겨나 움직임을 통해 온갖 것들로 된다고 말일세.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작용을 가하는 쪽에 대해서도 작용을 받는 쪽에 대해서도 그것들을 따로따로 취해서 어떤 것으로 있다고 단정적으로 사유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01
182b 그 어떤 지각에 관해서든, 이를테면 봄에 관해서나 들음에 관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대체 봄이나 들음 자체 속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을 보지 않음이라고 하기보다 봄이라고 불러서도 안 되며, 어떤 것을 지각 아님이라고 하기보다 다른 어떤 지각이라고 불러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나와 테아이테토스는 지각은 앎이라고 말했습니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56
이제 참된 앎은 추론에서 온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된다. 그렇지만, 모든 추론이 '앎'인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테아이테토스에 의하면 오로지 참된 판단만이 우리가 대상을 제대로 알게끔 하는 것이며, 거짓된 판단은 '무지(無知)'에 다름아니다. 마치 새장 안에 새를 넣어 우리가 소유하듯이, 우리가 상기를 통해 영혼이 알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참된 판단에 의한 추론이다. 또한, 단순히 '이름'만 가질 수 있는 요소들과는 달리 '이름'과 함께 '서술'될 수 있는 복합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서술'만이 참된 앎을 표시할 수 있는 것이며, 서술 될 수 없는 것은 앎(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인식될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요소에 의해 서술 될 수 있는 특징이 있고,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된 것들은 참된 앎인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면서 <테아이테토스>는 아포리아(Aporia)로 막을 내린다. 이 아포리아는 무엇인가?
186c 몸을 통해 영혼에 이르는 모든 경험들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태어나자마자 자연적으로 지각하게 되어 있지만, 그런 경험들을 있음과 이로움의 측면에서 헤아린 결과는 그런 것이 누구에게 생기게 되더라도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애를 쓰고 교육을 받아야 가까스로 생기게 되지 않겠나? 앎은 경험들 속에 있지 않고, 그런 경험들과 관련된 추론 속에 있는 것일세. 추론 속에서는 있음과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나, 경험 속에는 그게 불가능한 것 같으니까.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65
199e 맞아요, 소크라테스 선생님. 우리가 새들을 '앎'으로만 놓았을 때 아마 그건 제대로 한 게 아닐 겁니다. '모름'들도 영혼 속에서 함께 여기저기 날아다닌다고 놓았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사냥하는 자는 어떤 때는 '앎'을 붙잡고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어떤 때는 모름을 붙잡기도 하는데, 거짓된 판단은 '모름'에 의해 하게 되는 것이고 참된 판단을 '앎'에 의해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어야 했습니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95
202c 복합체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일 뿐만 아니라 서술될 수 있는 것들이면서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들이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설명 없이 참된 판단을 취할 때면, 그의 영혼은 그것에 관해 참된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이나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세. 설명을 주고받을 수 없는 자는 그것과 관련해서 앎이 없는 자이니까. 반면에 설명을 추가로 얻은 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앎에서 완벽하게 되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00
그것은 지각으로부터의 개별적 인식이 추론에 의한 보편적 인식과 합치되는가를 검증했을 때 비로소 참된 앎의 과정이 완결된다는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참된 앎이란, 이데아(idea)와 같은 형상에 대한 인식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리적인 세계(가상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될 것인가? 그렇다면, 참된 앎이 아닌 것이 아니지 않은가?
209c 내가 생각하기로, 테아이테토스의 이런 들창코의 상태가, 내가 목격한 다른 들창코의 상태와 차이가 나는 어떤 것을 새겨 주고서 기억상을 남겨 주기 전까지는, 테아이테토스가 내 안에서 판단의 대상으로 되지는 못할 것 같네. 그리고 자네의 모습을 이루는 다른 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7
209d 이보게, 설명을 추가로 포착한다는 게 차이성을 판단하라는 게 아니라 인식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라면, 앎에 관한 설명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런 설명은 그것 참 즐거운 것이기도 할 걸세. 그러니 앎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차이성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이라는 답변이 제시될 것 같네. 우리가 앎을 찾을 때, 차이성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그런 것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을 앎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일세. 그러므로, 테아이테토스, 앎은 지각도, 참된 판단도, 참된 판단에 덧붙여진 설명도 아닐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8
결국, <테아이테토스>에서의 논의는 참된 앎이 지각과 추론과 서술을 통해서 형상과 질료의 차이성을 밝히는 것이라는 결론과 이 결론 안의 순환구도 속에서 논의가 마무리된다. <테아이테토스>에서의 미진한 결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참된 앎'이 가리키는 바에 대한 존재론적 논의는 <파르메니데스>와 연결되며 서양 철학사에 인식론과 존재론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이들 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테아이테토스>를 정리한 이번 리뷰와 함께 이에 대한 답은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이,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답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 1976)의 답으로 정리한 페이퍼로 짝을 맞추려 한다.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에게는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 ~ BC 19)와 같은 스승이 있었다면, 러셀과 하이데거는 인식론과 존재론이라는 지옥을 안내할 스승이 되줄것인가. 개인적으로는 베아트리체와 같은 존재가 더 좋겠지만, 세상일은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니 불만은 없다...
177e 이름을 말하지 말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을 바라보게 해야 하니까요. 그 이름으로 무슨 대상을 가리키든 간에, 나라는 확실히 그 대상을 겨냥해서 입법을 하며, 모든 법을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것들로 제정합니다. 나라가 그 법을 자신에게 가능한 한 이로운 것들이라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한에서 말입니다. 나라가 다른 어떤 것을 주시하고서 입법을 할까요? 우리는 입법을 할 때, 나중의 시간에 법이 이로운 것들로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제정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장차‘라고 하면 제대로 말하는 것이 될 겁니다. - P146
189a 어떤 것을 만지는 자는 하나의 어떤 것을 만지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인 한에서는 있는 것을 만지는 것이지? 하나의 어떤 것을 판단하는 자는 있는 어떤 것을 판단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있지 않은 것을 판단하는 자는 어느 하나도 아닌 것을 판단하는 것이네. 어느 하나도 아닌 것을 판단하는 자는 아예 판단조차 하지 않는 것이네. 그러므로 있지 않은 것은 판단할 수는 없네. 있는 것들과 관련해서든 있지 않은 것 자체를 그것 자체로 해서든 말일세. 따라서 거짓된 판단을 하는 것은, 있지 않은 것들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짓된 판단이란 없네. - P171
205c 일차적인 것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이 합성되는데, 그런 일차적인 것들에 대해선 설명이 없으며, 그 까닭은 일차적인 것들 각각 그 자체가 그것 자체로 비복합적인 것이고, 또 그것과 관련해서 ‘있다‘라는 말이나 ‘이것‘이라는 말을 적용해 말하는 것조차, 그것과 이질적인 다른 것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옳을 수 없으며, 그래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일차적인 것들 각각은 설명이 없는 것으로, 그리고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된다고 한 것 말일세.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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