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으로 자원이 빈약한 섬에 식량 공급원을 증대해 보려는 이런 무모한 시도는 인류 역사에서 독보적이다. 지구 상에서 최초로, 사람들은 식량 공급원이 있는 곳으로 가는 대신 공급원을 이동했다. 나중에 섬에서는 농경이 시작되었다.

라피타인들의 태초의 항해는 탐험의 여정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의도적인 식민화의 여정이었다. 이전에 무인도였던 땅에 위치한 가장 초기의 유적지들은 임시로 거쳐 가는 야영지라기보다 식민지로 건립된 명백한 영구 정착지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주자들은 그곳에 한 세대 이상을 머물렀고 그다음 다시 새로운 섬을 찾아 바다로 나갔다. 신속한 라피타 식민화가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다.

의례적 교환이라는 이 질서 정연한 제도는 각종 부차적 행위, 특히 도끼와 까뀌 돌 같은 필수품을 물물 교환하는 일상적인 교역 활동의 보호막이다. 쿨라 고리에서 즉흥적인 것은 거의 없는데 교환은 꼼꼼하게 정해 둔 날짜에 따라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은 정기 모임에서 신중하게 모집된다.

신성한 최고 족장 투이 통가*가 세심하게 통제되는 체제를 관장했는데, 이는 통가 제도를 넘어 멀리 서쪽의 피지와 동쪽의 사모아까지,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인위적으로 조성된 연계에 바탕을 둔 통치 체제였다. 친숙한 항로를 따라가는 장거리 여정은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유대를 다지는 전략적 결혼과 결합하여 이 "제국"의 핵심을 이루었다.

완전한 현생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6만 년 전이나 어쩌면 그보다 앞서 동남아시아에 정착했다. 4만 5천 년 전에 이르자 현생 인류는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했다. 그들은 1만 5천 년 전쯤에 북아메리카로 건너갔다. 앞서 본 대로 그즈음에는 소수의 고기잡이들과 항해자들이 뉴기니와 남서태평양 지역, 즉 솔로몬 제도와 비스마르크 제도에 이미 오래전에 정착해 있었다. 기원전 1500년 이후에 그들의 후계자, 농경인이자 뛰어난 항해자인 라피타인이 기준 가시선 항법에 의존해 섬에서 섬으로 항해했고 마침내는 먼바다로 나가 산타크루즈 제도까지 진출한 다음 기원전 800년까지 궁극적으로 통가와 사모아 섬에 도달했다. 거기서 항해자들은 여러 세기 동안 탐험을 중단했다.

캐롤라인 제도의 항로 안내인들은 어떤 천정 별이 각각의 섬들 바로 위로 지나가는지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미지의 바다를 탐험할 때 그들은 뱃머리를 돌려 천정 별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한 채로,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항해했다. 그들은 또한 북극성, 남십자성의 다섯 가지 위치 및 13개의 별자리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항성 나침반을 사용했다. 항성 방위는 32개의 나침반 방위 표시를 규정했다.

이것은 에타크etak, 카누가 정지해 있다는 관념이 허상이라는 것을 잘 아는 항로 안내인들이 이용하는 거리 표시 체계이다. 그들은 마음속 이미지, 즉 그들이 가는 경로에 대하여 기준 섬의 상대적 위치를 가지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평선 위에 놓인 별의 위치가 이동 중인 섬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 준다는 마음속 이미지는 항법 장치로서는 전적으로 말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항해가는 자기 주변에 움직이는 사물의 숫자를 최소화한다. 그는 머릿속으로 카누와 별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반면 섬은 움직이는 것처럼 사고한다. 바다에 대한 그러한 인식 속에서 그는 카누가 목적지 섬으로부터 동일한 방위에 위치하듯이 기준 섬이 카누로부터 동일한 방위에 위치할 때 자신이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거리 항해는 특권적 행위였다. 대부분의 폴리네시아인들은 초호*에서 고기를 잡고 텃밭을 일구며 고향에 머물렀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심지어 더 넓은 섬에서도 사회적 삶의 근간이었다. 농경과 연관된 사회 구조는 상속과 토지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출생 순서가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오세아니아 원해의 식민화를 추진한 원동력은 땅과 상속권에 대한 추구일지도 모른다. 위신과 권력도 해양에서의 전문적 능력, 대양의 비밀을 해독하는 지식으로부터 나왔다. 대양을 건넌 사람들에게 폴리네시아 바다는 장벽이 아니라 섬과 섬을 잇는 바닷길 고속도로의 네트워크였다.

에게 해 농사의 불확실성은 발굽 동물을 비롯한 각종 식량을 저장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했음을 의미했는데 이런 저장 과정에는 틀림없이 이웃한 공동체들, 심지어 섬들 간의 분담이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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