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로서의 인류학자 - 레비스트로스, 에번스프리처드, 말리노프스키, 베네딕트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7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김병화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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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는 '저자'와 '작가'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저자는 기능을 수행하고 작가는 활동을 한다. 저자는 사제 역할을 하고 작가는 서기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자동사이다. "그는 세계의 왜를 어떻게 쓰는가 안에 철저히 흡수하는 사람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타동사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쓴다. "그가 어떤 목표를 설정할 때 언어는 그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에게 언어는 실천을 떠받칠 뿐 실천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의사소통 수단의 본질, '사유' 수단의 본질로 복원된다."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30

클리퍼드 기어츠 (Clifford Geertz, 1926~2006)의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Works and Lives: The Anthropologist as Author>에서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 1915~1980)의 표현을 빌려 '문학으로서의 인류학, 사제로서의 인류학자'를 말한다. 저자와 작가. 이들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다시 말하지만 내가 방금 사용한 어휘에도 불구하고, 핵심은 '그곳'에서 겪은 것을 '이곳'에서 말하는 것으로 옮겨오는 경로의 문제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인 문제다. 아 문제는 '목격하는 나' 접근법을 취해 문화를 해석하는 모두에게 발생한다... 사회적 기호나 분석의 힘이 아닌 감수성을 민족지의 중심부에 두는 것은, 스스로에게 텍스트 구축에 대한 독특한 성격의 문제를 내는 것이다. 즉 문제는 당신 개인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설명에 신뢰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101

그것은 주체와 타자의 문제이며, 언어의 문제다. 인류학자들은 학문의 성격상 연구자와 다른 이들과 소통하며 관찰한다. 소통을 통해 그들과 가까워진다면 객관성이 흐릿해질 것이며, 그들과 떨어져 관찰만 진행한다면 진정한 의미를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인류학자들은 '과연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인가?' 에 대한 문제와 부딪히게 된다. 이와 함께 연구자들은 언어의 문제와도 직면한다.

인류학은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만남을 포함한다... 많은 경우 거리두기는 타자를 원시적이고 기괴하며 이국적인 존재로만 주목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친숙한 '우리'와 이국적인 '그들'의 간극은 타자를 의미 있게 이해하는 데 굉장한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면 타자의 세계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민족지적 거리 유지는 ... 죽음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의 편협화 parochialization 혹은 민속화 folklorization라는 결과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만약 인류학자와 타자의 거리를 줄일 수 있다면, 우리와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면, 진정으로 인간적인 인류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26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객관적 사실, 대상과 관련을 맺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인류학자의 사고를 향하고 있는가. 언어가 대상을 지향하여 귀납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했을 때 인류학은 사회과학으로서 기능하는 반면, 언어는 인류학자의 '답정너' 식 결론의 도구로 작동할 것이며, 이때의 인류학은 문학이 될 것이다. <저자로서의 인류학자>에서 저자 클리퍼드 기어츠는 여러 인류학자들 - 레비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 말리노프스키(Bronisław Kasper Malinowski, 1884~1942),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 등 - 의 저작 안에서 이러한 문학적인 면을 지적한다.

일기를 쓰는 사람의 과제는, 리비도적인 그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또한 "작가에서 개인으로 전환시키는 일종의 회전고리를 통해 매혹하고...... '나는 내가 쓰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자발적'인 글쓰기 형태를 선택함으로써 나 자신이 삼류 배우 중에서도 제일 어설픈 배우임을 알게 되었으니.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114

문학으로서의 인류학과 과학으로서의 인류학. 감성과 이성, 어느 편이 더 인간을 이해하는 인류학(anthropology)의 목적을 충족시키는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저자로서의 인류학자와 작가로서의 인류학자에 대한 비교는 이와는 다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 것이 인류학자의 의견인가 아니면 다른 이들의 삶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은 비교적 쉽게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저자로서의 인류학자>는 이러한 면을 잘 깊어준 책이라 생각된다...

이국적인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한 것처럼 만남의 즉각성에서 물러나 사고의 균형을 찾음으로써, 혹은 E-P가 한 것처럼 그들을 아프리카 항아리에 그려진 형상으로 변형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런 즉각성 속에서 자신을 잃고, 어쩌면 영혼까지 잃어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99

너무나 방대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실체인 서구적 상상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쉽게 말할 수 있는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그것은 이런저런 부류의 타자들과 실제로 접촉을 하면서 타자의 타자성이 표상하는 바를 원래와는 좀 다르게 구축하는 경향이 있다.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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