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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10월
평점 :
내 딸이여, 그대 이[齒] 울타리를 빠져나온 그 말은 도대체 뭔가요? 아니, 지금 이 안에, 화롯가에 있는 남편을 두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 말하다니! 당신의 기백은 언제나 믿으려 들지를 않아요. _ 이준석, <오뒷세이아>, 제23권 p349/410
내겐 견뎌내는 기백이 있어요. 파도 속에서, 전쟁 속에서 나는 이미 숱하게 많은 몹쓸 것들을 겪어왔으니, 그 일도 그런 고생들을 따라 일어나야 하지요. 하지만 배[腹]라는 놈은, 수많은 재앙을 인간들에게 선사하는 그 저주받은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도저히 덮어둘 수가 없지요. _ 이준석, <오뒷세이아>제17권 283-287, p266/410
'이[齒]의 울타리를 빠져나온 말'과 '기백'. 최근 출간된 <오뒷세이아> 번역본에서 눈에 띄는 단어들이다. 추천의 말에 새 번역의 예시로 설명된 '이[齒]의 울타리를 빠져나온 말'과 작품 전체에 반복되는 '기백'이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 것은 단순한 번역의 생소함과 반복때문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책을 읽고 난 후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오뒷세우스와 구혼자들의 대결은 가정과 왕권의 회복이라는 단순한 문제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이것은 양립과 타협이 불가능한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가치의 충돌이며, 다른 한쪽이 소멸될 때까지는 끝날 수 없다. 이로써 우리는 오뒷세우스가 구혼자들의 타협안이나 대안을 거절한 채, 몰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 p401/410
역자는 <오뒷세이아>를 통해 가부장제, 국가권력의 귀환, 계몽적 이성이 아닌 양립할 수 없는 가치관들의 충돌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과 같은 곳에서 암브로시아를 마시는 삶 대신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뒷세우스 임을 자각하며 인간으로의 각성을 통해 황금시대가 아닌 청동시대를 선택한 오뒷세우스의 모습에 주목한다.
인간이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영웅은 자신의 행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림으로써 현존을 이어가게 되며, 그의 명성은 가객들의 노래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 잊어버리는 것은 인간의 두 번째 죽음이자 완전한 죽음이며, 이러한 인간 현존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던 이들이 바로 호메로스의 인간들이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p385/410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불멸의 삶을 선택한다. 전쟁을 피해서 신과 함께 불멸의 삶을 살기보다 명예를 선택하며 다른 모습의 영생(永生)을 누리지만, <오뒷세이아>에서 그는 생전의 선택을 후회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영생의 삶을 유혹하는 여신 칼륍소를 뿌리치고 떠난 저승으로의 여행에서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선택이 현명치 못했음을 알 법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을 고치지 않는다. 뒤이어 닥치는 고난. 그는 이를 '기백'으로 헤쳐나간다.
'죽음을 두고 상심하지 마오, 아킬레우스.'
제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제게 즉시 대답하며 말하더군요. '죽음에 대해 날 위로하려 하진 말아요, 눈부신 오뒷세우스여. 쇠잔해진 망자들 모두에게 왕 노릇 하느니 차라리 재산도 별로 없고 가진 것도 많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땅돼기라도 부쳐먹고 살고 싶다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제11권 485-491, p166/410
딱하기도 하지, 내 새끼. 모든 인간 중에 가장 심한 운명에 매인 녀석아. 이건 제우스의 따님 페르세포네께서 너를 속이시는 게 아니란다. 다만, 죽게 마련인 인간이 목숨을 잃게 되면 마땅히 그렇게 되는 법이지. 일단 목숨이 뽀얀 뼈를 떠나게 되면, 힘줄도 살과 뼈를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거세게 타오르는 불의 기운이 이것들을 제압해버리고 만단다. 그러면 영혼은 마치 꿈처럼 이리저리 날아가게 되는 거야. 그건 그렇고, 너는 빛을 향해 최대한 빨리 몸부림치거라. _ 이준석, <오뒷세이아> 제11권 216-223, p171/410
이[齒] 울타리를 빠져나온 말. 그것은 오뒷세우스의 여행 그 자체가 아닐까.
발화(發話) 되기 전 머리 속에 자리한 수많은 생각들과 가슴에 머무는 무수한 감정들. 이들은 형상화되기 전 형체 없는 영혼과도 같은 수많은 가능태(可能態)다. 그것이 이 울타리를 빠져나오며 언어로 형상화 되는 순간. 언어는 사회적 책임을 부여받고 발화자는 이를 행해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말한 사람으로서 명예가 달린 문제이며, 명예는 필멸의 인간이 불멸의 존재로 잊혀지지 않을 까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뒷세우스의 귀환은 상상력의 실현, 추상의 세계에서 현실화를 이루는 과정 그 자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때문에 구혼자들은 멸망당해야 한다.
호메로스의 민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신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 민회에서 구혼자들은 이 소통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이로써 이들은 이타카라는 하나의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구혼자들의 전횡 아래에서 이타카인들은 마치 퀴클롭스들과 같이 상호 연대 없이 개체화되고 고립되어 간다. _ 이준석, <오뒷세이아>, p395/410
혼돈과 잔치. 매일 매일이 다르지 않는 황금시대의 삶은 '추상의 구체화'라는 사회적 관계의 소통을 근원적으로 부정한다. 필멸의 인간이라는 한계를 망각하고, 필멸의 존재가 영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부정하는 그들의 삶은 단죄받아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처단이 바로 문명(文明)으로의 확실한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일리아스>에서의 수많은 신들은 사라졌다. 대신, <오뒷세이야>에는 귀환을 방해하는 포세이돈과 귀환을 돕는 아테네. 방관하는 제우스와 경계를 오가는 헤르메스만이 등장할 뿐이다. 트로이아의 멸망은 신들의 시대의 종말이며, 이러한 멸망을 통해 얻어진 최후의 승자는 아테네가 상징하는 가치관이다. 아테네를 실현하기 위한 추상으로부터 구체, 현실로의 여행.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 끝은 해피엔딩은 아닌 듯하다. 마치 <은하철도 999>에서 기계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한 철이의 마지막 모습이 묘한 여운을 남기듯.
여보, 우리가 모든 투쟁의 끝에 다다른 건 결코 아니에요.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혹독한 노역이 있을 것이고, 나는 또 그 모든 것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내가 전우들과 나 자산의 귀향을 찾아내러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던 바로 그날,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이 내게 예언한 대로지요. _ 이준석, <오뒷세이아>, p355/410
<오뒷세이아>는 무한의 평안함 대신 유한의 고통에 대해 말한다. 이번 독서에서 이 주제는 '추상의 구체화'로 내게 다가왔다. 다음에 이 작품에 깔린 수많은 결들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아마도 그건 그때 가봐야 알 듯 싶다...
희랍인들은 인간 위로 신이 있고 아래로 짐승이 있어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금기로 여겼다. 키르케의 섬에서는 이 모두가 어지러이 섞인다... (<오뒷세이아>에는) 대신 자신이 불가피하게 맞게 될 소멸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훗날 그는 구혼자들에게 보복하고 마침내 페넬로페를 만나게 된다. 20년간 기다려왔던 가장 벅찬 순간이다. 그러나 아내는 그들이 잃어버린 젊음을 말하고, 남편은 테이레시아스가 알려준 바 그대로 그에게 남은 노역과 죽음을 말한다. 어떤 해석가 말대로, 가장 격렬한 싸움을 통해 얻은 승리 뒤에 곧바로 찾아오는 변화와 죽음에 대한 이 깊은 시선, 예외 없이 한계가 드리워진 모든 인간 운명에 대한 이 도저한 시선은 진정 호메로스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타케)은 지금 오뒷세우스와는 정반대의 욕망을 가진, 신들처럼 살고 싶은 자들에게 장악되어 가고 있다. 그는 반드시 지금 돌아가야만 한다. 이제 그는 철 따라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아버지의 과수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가 떠나는 칼륍소의 정원은 봄에 피는 제비꽃과 가을에 피는 셀러리가 동시에 만발한 무시간의 영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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