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국사 1469-1716
존 H. 엘리엇 지음, 김원중 옮김 / 까치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16세기 스페인의 성취는 본질적으로 카스티야의 성취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17세기 스페인의 재난 역시 카스티야의 재난이었다. 오르테카 이 가세트는 합스부르크가 스페인에 대한 비명(碑銘)으로 사용할 수 있을 다음과 같은 글을 씀으로써 이 역설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했다.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만들었고,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파괴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438


 존 H. 엘리엇(John Huxtable Elliott, 1930 ~ 2022)의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Imperial Spain>는 15세기 중반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졌던 세 왕국 -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 의 전성기를 배경으로 한다. 포르투갈은 16세기에 일시적으로 스페인(에스파냐)에 병합되고 다시 분리되지만. 위에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 1883~1955)가 언급했듯 스페인 제국 역사의 중심은 카스티야였으며, 시작 또한 여왕 이사벨 1세(Isabel I de Castilla y Aragon, 1451~1504)였다. 제국 스페인의 역사는 이사벨의 선택의 결과였다.


 이사벨이 왕위계승자로서 인정을 받자 그녀의 혼인은 국제적 관심사가 되었다. 그녀의 배우자감으로 세 명의 유력 후보자가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샤를 7세의 아들 발루아의 샤를과 결혼하여 전통적인 프랑스-카스티야 동맹을 강화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의 오빠가 원했던 것처럼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결혼하여 카스티야의 미래를 서쪽 이웃과 연결시킬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녀는 아라곤의 후안 2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페르난도와 결혼함으로써 후안 2세가 강력하게 책동했던 카스티야-아라곤 간의 통합을 성사시킬 수도 있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19


  상업 중심, 지중해 연안의 아라곤과 목축 중심, 대서양 연안의 카스티야는 분명 상이한 조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토양의 카스티야의 전사들을 뒷받침하는 아라곤의 관료제가 없었다면 제국은 유지될 수 없을 터였고 그런 면에서 이들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제국을 창조한 역동성은 거의 전적으로 카스티야에 의해서 제공되었다. 카스티야의 활력과 자신감은 카스티야인들에게 새로운 스페인 제국에서 자연스럽게 지배권을 쥐게 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뒤에는 행정 경험이 풍부하고 외교술과 통치술이 숙달되었던 아라곤 연합왕국이 있었다. 이 점에서 두 연합왕국간의 통합은 상호 보완적인 파트너간의 통합이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43


 그렇지만, 오늘날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CF 간의 유명한 엘 클라시코(El Clasico)에서 보듯  과거로부터 치열한 라이벌이었던 두 지역을 하나로 묶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가능했지만, 문화적, 경제적으로는 매우 힘든 일이었고 그 결과 제국은 초기부터 매우 연약한 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제국의 구조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은 결국 철저한 신앙의 힘에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 순수 가톨릭 중심주의는 이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활력을 주던 무슬림과 유대인을 축출하는 정책으로 이어지면서 폐쇄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종교재판소의 설치가 무엇보다도 스페인 왕들의 지배영역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고안된 종교적 조치이기는 했지만 그것의 중요성이 결코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신생 스페인의 경우처럼 정치적 통일이 절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나라에서 신앙의 통일은 카스티야인, 아라곤인, 카탈루냐인을 성(聖) 교회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는 단일한 목적 속에 하나로 결속하게 하는 대체물로서 작용했다.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117 


 여기에 더해 결혼을 통해 제국을 정치적으로 유지시키려는 노력은 페르난드의 지나친 반(反)프랑스 움직임과 만나 스페인을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원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카스티야와 신대륙은 신성로마제국의 보급창고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나, 스페인은 카를 5세의 정복전쟁을 위해 다른 의미에서 식민지가 된 것이었다.


 카를 5세가 엄청난 돈이 드는 외교정책을 추진하고 그 비용을 대기 위해서 부채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카스티야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국가의 수입원들은 황제의 비용을 대기 위해서 수년 후의 것까지 저당잡혔고, 그중 많은 부분은 국외에서 이루어졌다. 부채에의 의존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데에 한 몫을 했다. 무엇보다도 국왕의 재정정책에서 장기적 전망의 부재는 재원의 헛된 낭비를 의미했고, 그 재원을 끌어내기 위해서 사용된 방법들이 카스티야의 경제 성장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고안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228


 카를 5세( Karl V, 1500~1558)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 1527~1598) 시기 스페인은 오스트리아와 분리된 별도의 제국이 되어 포르투갈을 병합하는 등 전성기를 맞지만, 여전히 독립을 둘러싼 네덜란드와의 전쟁, 대서양에서의 사략(私掠)행위를 둘러싼 잉글랜드와의 대립은 결국 스페인을 외부에서 무너뜨렸고, 스페인 제국 내에서 식민지 경제가 독자적으로 운용되면서 일어나는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아메리카가 새로운 제국정책을 뒷받침하는 재원을 제공하는 동안 그 제국 정책은 11580년 포르투갈의 합병이라고 하는 펠리페의 대성공으로부터 지리적 방향성을 획득했다. 포르투갈의 스페인 제국에의 통합은 펠리페에게 새로운 대서양 해안과 그것을 보호하는 데에 도움을 줄 함대를 제공했고, 아프리카로부터 브리질 그리고 캘리컷으로부터 몰루카 제도에 이르는 제2의 제국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치세 후반기의 제국주의를 가능케 한 것은 새로운 귀금속 유입과 함께 이 포르투갈 영토의 합병이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303


  이처럼 <스페인 제국사 1469-1716>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정치적 결합으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척박한 토양과 상대적으로 열등한 산업, 통합되지 않은 지역간의 갈등 등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선택으로 태어난 국가가 대항해시대라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극적으로 일어났으나, 결국 태생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 역사 형성에서 중요한 이 시기 역사는 오늘날의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이해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일독(一讀)을 권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1576-79년 동안 아메리카가 유럽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었다. 광산 채굴에 소요되는 비용이 높아졌기 때문에 은이 줄어들었고 이민자들을 위한 기회도 줄어들었다.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아메리카로 들어오는 물건도 점점 적어졌다. 그러나 스페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은 아메리카 식민지에 스페인 경제와 유사한 형태의 경제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수출해온 주요 품목들이 아메리카 정주자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332

안달루시아는 귀족이 지배하는 대규모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 되어갔고, 이 거대한 새로운 부에 의해서 부유해진 카스티야의 귀족들은 아직 부르주아지가 취약하고 그것도 북쪽 몇몇 도시들에 산재해 있었던 상황에서 거의 무제한의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 반면에 발렌시아에서는 국왕이 식민화와 재정주 과정을 보다 면밀하게 감독할 수 있었다. - P25

중세 아라곤 연합왕국에는 부유하고 역동적인 도시 과두귀족들이 있었고, 때문에 해외의 상어적 이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곳에는 또한 왕과 신민 간의 관계에서 계약적 개념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은 여러 제도들 속에 효과적으로 실현되고 있었으며 제국을 운영하는 데에 좋은 경험이 되었다. - P30

동시대의 카스티야는 외부적이기보다는 내부적 지향성을 띠고 있었고 교역보다는 전쟁에 경도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카스티야는 목축적이고 유목적인 사회였고, 그런 습관과 태도는 끊임없는 전쟁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레콩키스타는 여러 가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이기도 했지만 약탈을 위한 군사 원정이기도 했고, 또한 사람들의 이주이기도 했다. 레콩키스타의 이 세 가지 측면 모두가 카스티야인들의 생활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 P30

전통적으로 카스티야의 메세타(meseta)는 풍년이 들면 곡물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량을 생산했다. 그러나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비스카야 등 일부 지역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고 대개 카스티야로부터 배편으로 식량을 공급받아야 했으며, 아라곤 연합왕국도 안달루시아나 시칠리아로부터 곡물을 수입했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 카스티야 역시 외국 곡물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 P128

카를 5세의 유럽 영토들 가운데 치세 초반에 제국을 운영하는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한 곳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였다. 그러나 이들 두 영토의 재원이 차례로 고갈되자 카를은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 다른 영토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 수 없었다. 1540년에 그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제 나의 스페인 왕국들에 의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 - P221

카탈루냐의 점진적 회복은 프랑스와의 끊임없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근대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경제 변화의 전조였다. 이제 반도에서의 경제적 무게 중심이 중심부로부터 주변부로 이동해가고 있었다. 주변부는 과세부담이 중심부보다 덜했고, 경제적 피로도 덜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는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만들었다. 이제 17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스페인이 카스티야를 개조시킬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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