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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 집단적 운명과 전체적 움직임 - 상 ㅣ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
페르낭 브로델 지음, 남종국.윤은주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평점 :
제2부에서는 장기 지속의 역사를 넘어 좀더 개별화된 리듬의 역사, 즉 집단의 역사, 집단적 운명의 역사, 전체적 움직임의 역사를 파악할 생각이다. 이것은 사회사이다. 사회사에서는 인간이 사물을 이용해서 만들었던 것들로부터 출발한다. 이 책에서는 사회구조, 따라서 느리게 변해가는 구조에 관심을 가지려고 한다. 또한 구조의 움직임에도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것은 전문용어로 구조(structure)와 콩종튀르(conjoncture)라고 부르는 것, 즉 움직임이 없는 것과 움직이는 것, 느리게 움직이는 것과 빨리 움직이는 것이 서로 섞여 있는 것을 말한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1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 집단적 운명과 전체적 움직임 La Mediterranee a l'epoque de Philippe II vol.2>를 통해 우리는 에스파냐 제국이라는 구조 안에서의 콩종튀르를 통해 제국이 직면한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다. 1588년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의 패전 이후에도 상당기간 유지되었던 에스파냐의 패권. 브로델은 무적함대의 소멸이 직접적인 에스파냐 제국의 몰락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에스파냐 제국은 구조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고 변화하는 콩종튀르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몰락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한 것이었다. 에스파냐의 문제. 이는 거대한 제국이 갖는 공간(空間)이었다.
에스파냐 거대 제국은 당시로서는 유례없이 거대한 해상과 육상 수송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제국에서는 끊임없는 군대의 이동 외에도 수많은 명령과 소식들이 날마다 전달되어야 했다. 펠리페 2세의 정책은 이러한 연결망, 군대의 이동과 귀금속의 수송, 환어음의 원활한 유통을 필요로 했다. 이것이 바로 펠리페 2세의 제국 경영의 상당 부분을 설명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이며, 또한 프랑스가 에스파냐에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준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35
북유럽 저지대와 이베리아 반도, 남부 이탈리아와 신대륙에 걸친 거대 제국을 하나로 연결시키기에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힘들었기에 정치면에서는 적절한 행정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경제면에서는 상품과 이에 대응하는 화폐의 교환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고, 유통속도(Velocity) 또한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상품 순환의 지체는 이 세계의 고질적인 병폐였다. 상품, 화폐, 환어음이 사방으로 움직이고, 서로 스치고 마주치고, 서로를 기다려야 했다. 모든 상거래 중심지는 상품, 화폐, 환어음이 만들어내는 다각적이고 변화무쌍한 콩종튀르를 끊임없이 경험했다. 그러나 느리게 순환하는 상품, 화폐, 환어음은 오랫동안 길 위에 머물러 있었다. 16세기에 개인 은행들에게 닥친 비극이 고객의 돈을 너무 느리게 순환하는 상품 거래에 부주의하게 투자하는 바람에 시작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기나 공황 사태가 발생하면, 며칠 안에 대금 지불이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했다. 거리라는 치명적인 지체 요인에 발목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42
화폐 순환은 인간 삶의 일부 영역만을 관통한다. 중력의 영향으로 강물의 활발한 흐름이 낮은 지대를 향하는 것과는 달리, 화폐의 순환은 경제생활의 높은 단계로 간다. 순환은 끊임없는 불평등을 낳는다. 역동적인 지역 - 도시 - 과 농촌처럼 화폐가 없는 지역 사이에, 근대적인 지역과 전통적인 지역 사이에, 개발 지역과 저개발 지역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했다. 경제 활동 분야들 사이에도 불평등이 존재했다. 왜냐하면 수송, 산업, 무엇보다도 상업과 징세가 화폐 흐름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35
신대륙에서 들어온 막대한 금과 은은 에스파냐 본국에서 빠르게 제국의 내외부로 흘러나갔다. 산업의 중심지였던 북유럽 저지대 국가들로의 유출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의 금, 은 유출은 불가피했다. 신대륙으로부터의 막대한 금과 은이 도착했지만, 제국의 모세혈관까지 혈액을 공급하기 위한 출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대륙에서의 막대한 수입 이상의 지출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1580년 이후 에스파냐만큼 아니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진정한 은화 분배 중심지가 이탈리아의 중요 상업도시들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핵심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는 넘쳐나는 에스파냐 은화의 일부를 레반트 지역으로 유출키시는 역할을 통해서 큰 이익을 얻었다. 그것은 수월하게 이익을 남기는 일이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은화와 환어음뿐만 아니라 금화까지도 네덜란드 구석구석에 공급하면서 이익을 얻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85
북유럽이 필요로 하는 금과 환어음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지나치게 많은 양의 은화가 북유럽으로 유출됨으로써 시장이 혼란에 빠질 수 있었다. 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금화는 인기가 높았고, 부피가 작으므로 쉽게 송금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금화와 은화는 계속해서 교환되었다. 그러나 상인들은 병사들의 급여 일부를 은화로 지불하거나 가능하면 직물로 지급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운 업무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음을 분명하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95
그 결과 제국은 재정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과중한 세금 징수는 제국 내 민심의 이반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제국이 세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1588년 무적함대의 몰락이 가져온 대서양 패권의 소멸때문이었다. 대서양 항해의 안전성이 위협받으면서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기존 레반트 지역의 무역이 재활성화되었고, 에스파냐 제국은 이로부터 지중해 패권 또한 위협받게 되었다.
부당하게 배분된 이 엄청난 세금은 당시의 이용 가능한 모든 수단들을 통해서 징수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세금 중 일부만이 왕실 금고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카스티야는 확실히 제국에 가장 좋은 납세자였다... 간혹 있었던 확실하지 않았던 잉여는 제국의 전체적인 재정 적자 속에 소멸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잉여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펠리페 2세의 통치를 받는 나머지 유럽 지역에서처럼 카스티야에서도 적자는 관행이 되었다. 따라서 모든 국가의 재정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236
에스파냐의 실패 이유는 무적함대가 패한 이후 대서양에서의 항해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의 패배는 동맹세력의 파산인 동시에 대서양 여러 지역에서의 후추 무역의 쇠퇴를 의미했다. 판매 가격의 상승으로 컨소시엄 소유의 후추는 베네치아 시장에서 레반트로부터 들어온 후추보다 더 비싸졌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274
브로델은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에서 광대한 공간(space)이라는 구조를 갖추었으나, 변화하는 콩종튀르에 대응하는 충분한 속도(speed)를 갖추지 못한 에스파냐 제국의 사회사를 보여준다. 느린 속도는 제국을 동맥경화 상태로 만들어 정보, 행정, 교역면에서 효율적인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비록 치명상은 입지 않았으나, 군사적으로 제국은 한풀 꺾인 상태였고 그 결과 높아진 대서양 항해 위협은 경쟁자인 베네치아, 오스만 투르크에게 몰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미 펠리페 2세이 아버지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부터 내재했으나, 강대한 제국의 위용 아래 숨겨졌던 약점들이 하나 둘 터져나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은 내외부적으로 어떤 도전을 받았는가. 이는 2-2권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제 제국에는 과거의 장식들만이 남아 있었다. 카를 5세의 웅대한 정책은 펠리페 2세 치세 초기, 1559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에 이미 1557년의 재정 파탄으로 갑자기 유죄선고를 받고 청산되어야 했다. 모든 것을 재구성하고 재출범시켜야 했다. 펠리페 2세의 통치 초기에 이루어진 강력한 평화정책은 제국의 약화를 보여주는 신호였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409
인구 증가 없이 그 모든 영광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인구혁명은 가격"혁명"보다 더 중요했으며, 어떻게 이 사건이 아메리카의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전에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인구 증가야말로 인간이 능력 있는 일꾼이었다가 점차 큰 부담으로 바뀌는 16세기의 승리와 재앙을 만들었다. 1600년경 인구 부담이 경제발전을 중단시키고, 범죄 같은 그동안 숨어 있었던 사회적 위기 현상을 조장했다. 이로 인해서 17세기에는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후퇴가 일어나고 곧 씁쓸한 내일을 맞게 될 것이다. - P72
문제는 16세기의 팽창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나타난 후퇴 국면을 만회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는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상업 자본주의의 전성기가 지나가고 난 뒤에 산업 자본주의가 그 뒤를 잇게 되었고, 산업 자본주의는 16세기 "귀금속 화폐"의 2차 등귀가 시작되면서부터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결국 산업이 경제 후퇴를 만회했다는 뜻이다. - P105
가장 많은 양의 은을 유출시킨 원인은 에스파냐 국왕 자신과 전반적인 정책 기조였다. 푸거 가문이 그들의 슈바츠 광산에서 채굴한 은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사용하여 수익을 올린 것과는 달리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은을 국내 투자에 사용하여 다양한 투자 이익을 창출하는 대신에 국외로 유출시키게 되었다. 해외 유출량은 카를 5세 시절에 이미 상당했고, 펠리페 2세 시대에는 방대한 양이 되었다 - P165
국가는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덜 겪었다. 국가 재정은 세 가지 부문, 즉 재정 수입, 지출, 부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세 번째이자 결코 덜 중요하지 않았던 부채는 가격 상승의 여파로 자동적으로 완화되었다. 그러나 지출과 수입은 동일한 리듬으로 증가했다. 모든 국가는 수입을 증대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가격 상승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확실히 국가는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한 지출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16세기에 서서히 확대된 엄청난 수입을 확보하고 있었다. - P233
에스파냐 경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대략 1580~1590년대에 큰 전환기를 맞았는데, 첫 번째로 농업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펠리페 2세가 1580년에 합병할 당시 포르투갈은 안에서부터 썩은 나라였고,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영양 결핍과 질병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16세기 말 유럽 전체의 후퇴에 앞서서 에스파냐를 강타한 전염병은 이를 잘 설명한다. 이러한 위기는 근본적인 균형을 뒤흔들었다. - P312
북유럽이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의 제조업 제품을 체계적으로 모방했고, 이렇게 생산된 저렴한 제품을 통해서 조금씩 이탈리아의 제조업 제품을 시장에서 몰아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유럽의 값싼 노동력 덕분이었다. 또한 대량으로 생산된 저질의 "새로운 모직물"은 가짜 상표를 붙이고 가짜 봉인을 해서 레반트 시장에서 베네치아 모직물인 것처럼 판매되었다. -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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