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게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는 매력적인 지역이다. 투르크는 페르시아 문제를 두고 고심한다. 결국 이 시기 내내 지중해의 역사는 자율적이지 않다. 지증해의 운명은 인근 지역 또는 먼 지역의 운명과 연결된다. 이 연결 고리는 매우 중요해 보인다. 고난의 1558-1559년에 이르러, 위기감이 고조되고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서 지중해는 이제 자신의 전쟁을 치르며 홀로 분투하게 될 것이다.  - P17

섬(코르시카)는 자원에 비해서 너무 많은 인구를 부양하고 있었고, 전쟁은 불행을가중시킬 수밖에 없었다(p51)... 코르시카의 잘못이라고는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것뿐이다. 이 섬이 합스부르크 왕가 대발루아 왕가의 전쟁에서 중요했던 이유는 섬 자체보다는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파르마, 심지어 시에나 이상으로,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은 신성 로마제국 황제와 그 동맹세력 사이의 연결을 방해했다. - P52

캅카스 산맥의 맞은편 전역, 캅카스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지역이 카스피해로 열린 통로와 함께 오스만의 지배 아래에 복속된 것이다. 이것은 작은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독특한 활력의 신호이고, 사실 유일한 신호도 아니다. 그러나 지중해의 역사가에게 중요한 것은 지중해에서 먼 카스피 해 방향으로 투르크의 힘을 고정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심력에 의한 방향 전환이 적어도 1590년까지 지중해 무대에서투르크의 부재를 설명해준다.  - P359

에스파냐의 정책은 1578~1583년의 시기에 대서양과 서유럽으로 옮겨갔다. 그와 동시에 펠리페 2세의 치세 전반부를 결산한 1575년의 파산 직후, 귀금속의 유입으로에스파냐가 쓸 수 있는 전쟁 자금이 갑자기 늘어났다. 이 "전환기" 이후 1579년부터1592년까지 "은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것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펠리페2세의 정책이 다른 곳에서처럼 네덜란드에서도 지나치게 격해지고 대담해졌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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