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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 - 개정3판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10년 7월
평점 :
<침묵의 세계>는 혼란스러운 책이다. 책에서 침묵에 관한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적어도 '말'과 '침묵'과의 관계를 다룬 부분에 한해서는 그렇다.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는 <침묵의 세계 Die Welt des Schweigens>에서 침묵의 세계를 긍정하고 있다. 저자에 의해 그려진 침묵의 세계는 지구에 많은 생명(生命)을 탄생시킨 '바다'와 같은 어머니(母)의 이미지와 같이 그려진다. 이러한 이미지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도덕경 道德經>에서 무(無)에서 유(有)가, 그리고 다시 이들로 인해 만물(萬物)이 생겨난다는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침묵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p17)
말과 침묵은 서로 합하여 하나의 일체를 이룬다. 말은 자신이 솟아나온 침묵과의 연관 속에 계속해서 머물러야만 한다. 말이 다시 침묵으로 향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서 볼 때 당연하다... 말이 침묵에서 태어난 뒤에도 말에는 침묵이 깃들어 있다. 말의 세계는 침묵의 세계 위에 세워져 있다.(p36)
[사진] 바다와 생명(출처 : 한겨레 신문)
反也者 道動也 반야자 도동야
弱也者 道用也 약야자 도용야
天下之物生於有生於亡 천하지물생어유생어망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요,
유약한 것이 도의 쓰임이니,
세상의 만물은 유(有)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無)에서 생겨난다.
<도덕경 道德經> 40장 章 임채우 譯
저자에 따르면 '침묵'은 독자적으로도 존재가능하지만, '말'은 '침묵'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침묵' 역시 '말'이 없었다면, 지금과는 그 의미가 달랐을 것이기에 이들은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마치, 혼란의 카오스(chaos) 상태가 말이 없는 침묵의 상태라면, 말(logos)이 생겨난 후 이제 질서 정연한 코스모스(cosmos)상태로 바뀐 것으로 인식하는 저자의 세계관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基督敎)적인 세계관을 발견하게 된다.
일찍이 침묵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지구는 침묵의 소유였다. 지구는 마치 침묵 위에 얹혀 있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지구는 침묵의 가장자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말이 생기자 악마적인 침묵은 붕괴되었다.(p5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 1) <신약성경>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05
침묵은 말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게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침묵이 언어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침묵, 즉 말 없는 침묵의 세계란 다만 창조 이전의 것일 뿐이다.(p28)
말은 질서인 로고스로부터 유래된 까닭에 인간적 바깥에 있는 많은 것들을 인간 세계 속으로 들여놓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말은 인간을 위한 방어물이다. 많은 악마적인 것들이 인간에게 침투하여 인간을 파괴시키려고 기다리지만, 인간은 그러한 악마적인 것에 접하지 않도록 보호되고 있다. 실로 인간이 그 악마적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그 악마적인 것이 말 속으로는 뚫고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p179)
저자는 현대 문명의 문제점을 '침묵'-'말(言語)'의 균형 파괴에서 찾고 있다. 끊임없이 생성되는 말과 점차 소멸되는 침묵 사이의 관계 파괴는 이제 자신의 파괴에까지 이른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그렇다면, 균형회복을 위한 길은 무엇일까?
침묵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산산조각이 난 한 세계의 잔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잔해는 그것이 잔해인 까닭에 사람들을 무섭게 만든다. 침묵은 이제 자명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때때로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도 침묵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박물관에나 있는 것 혹은 유령 같은 인상을 준다.(p212)
이에 대한 답은 저자의 기독교 사상을 근원인 <신약성경>속에서 우리는 침묵과 관련한 여러 구절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기적을 행한 후 청중들에게 함구령(啣口令)을 내리는 예수의 모습이 그려진 <마르코 복음>에서 우리는 침묵과 결합된 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The girl, a child of twelve, arose immediately and walked around. (At that) they were utterly astounded. He gave strict orders that no one should know this and said that she should be given something to eat.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마르 5 : 42 ~ 43) <신약성경>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05
거대한 침묵과 결합되어 있는 말 속에는 거대한 자비가 들어 있다. 단지 다른 한 말에서 나온 것일 뿐인 말을 딱딱하고 공격적이다. 그러한 말은 또한 고독하다. 현대의 우울은 대부분 인간의 말을 침묵과 분리시킴으로써 말을 고독하게 만들었다는데 기인한다. 이러한 침묵의 제거는 인간의 내부에서 하나의 죄책감으로 존재하고, 그 죄책감이 우울로 나타난다.(p37)
저자는 '말'과 '침묵'과의 관계가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음을 통해서 우리의 우울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바라본다. 저자는 끊임없는 개발을 통해 자신을 계발(啓發)하고, 자연을 개발(開發)하는 현대 문명에 대해 경고하며 독자로 하여금 이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이제, 그 혼란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저자는 책 내용 전반에서 '침묵'에 대해 긍정하지만, 그가 긍정하는 '침묵'은 '말이 생겨난 이후의 침묵'이라는 느낌을 준다. 저자는 <침묵의 세계> 속에서 변증법(辯證法 dialectics) 구조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침묵'이라는 '정(正)'에 대해 '반(反)'으로서 생겨난 '말'. 그리고, 이에 대한 합(合)으로 만들어진 '말과 결합된 침묵' 으로 구성된 구조 속에서 저자가 긍정하는 내용은 합에 해당하는' 말과 결합된 침묵'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최조의 침묵 역시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 않을까. 이러한 중간 결론을 내린 후 다시, <침묵의 세계> 처음으로 돌아가면 다소 혼란을 느끼게 된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p17)
책 서두에서는 침묵을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로 그리지만, 책을 읽다보면 침묵 자체가 완전한 세계라는 저자의 전제가 파괴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니면, 후반부의 침묵과 전반부의 침무기 같은 침묵이 아니거나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로고스(logos) 기독론(基督論)에 근거한 결합된 저자의 세계관은 분명 음(陰) 그 자체로 긍정한 <도덕경>의 세계관과 다른 부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말 이전의 세계를 절대악(絶對惡)로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선악(善惡)구도 속에서 책을 바라보기도 어렵다. 이런 면에서 <침묵의 세계>는 이들과는 구별되는 지점에 서 있다고 생각되고, 독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침묵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면에서 분명 의미있는 책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