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 ~ 1823)는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 On The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를 통해서 지대(地代 rent)의 발생 근원을 토지의 사유화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차액지대(different rent)론을 통해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인구가 증가하고 농산물 생산이 늘어감에 따라 기존에 경작되지 않던 토지도 점차 경작지로 활용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토지 개간비용 역시 농산물 가격에 포함되면서, 농산물의 가격도 오르게 된다. 그 결과 생산자이기도 한 지주는 이로 인해 이중(二重)의 이익을 얻게 된다. 리카도에 따르면 지주가 얻는 지대에는 일정 부분의 불로(不勞) 소득이 포함되는 것이다.
토지의 사유화와 그 결과 생겨난 지대가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과 무관하게 상품의 상대가치에 변화를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각해봐야 한다... 지대는 대지의 생산물 중에서 토양의 원천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능력을 사용하는 데 대해 지주에게 지불되는 몫이다.(p69)... 지주의 지대를 말할 때 생산의 곤란성은 농산물의 교환가치를 인상시키며, 지주에게 지대로 지불되는 농산물의 비율을 인상시키기 때문에, 지주는 생산의 곤란성으로 이중의 혜택을 봄이 틀림없다. 첫째로 그는 더 큰 몫을 차지하며, 둘째로 그가 받는 상품의 가치가 더 커진다.(p85)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 中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토지(土地)의 공공성(公公性)과 관련한 저서로 헨리 조지(Henty George, 1839 ~ 1897)의 <진보와 빈곤 Progress and Poverty>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진보와 빈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현대 문명에서 발생한 부의 불평등한 분배의 해결책은 토지의 공동소유로 하자는 것이 저자인 헨리 조지의 주장이다.
현대 문명을 저주하고 위협하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의 원인이 토지사유제에 있다는 점을 보았다. 이 제도가 존재하는 한 생산력이 향상되더라도 대중에게 지속적인 혜택을 주지는 못하며 오히려 대중의 생활을 악화시킨다는 점을 보았다. 또 빈곤을 구제하고 부의 분배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 추진되고 있거나 제시되는 해결책을, 토지 사유제 철폐만 제외하고, 모두 검토하였지만 효과가 없거나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보았다.(p313)... 그리하여 현대 문명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이것이다.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 한다.(p314) <진보와 빈곤> 中
토지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토지가 다른 경제재와는 다르게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천혜자원(天惠資源)이기 때문이며 , 이러한 이유로 토지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 주장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자연은 상속무제한 토지소유권(fee simple)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토지의 배타적 소유를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인류가 합의하여 토지에 대한 자기들의 평등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후세대의 권리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p325)... 확실한 토지 문서가 아무리 많고 토지를 아무리 오래 보유해 왔더라도 자연적 정의는 다른 사람의 동등한 권리를 부정하는 개인의 토지 보유 및 향유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p326) <진보와 빈곤> 中
이를 위해 저자는 리카도가 말한 지대의 환수를 주장하며, 구체적인 방법으로 조세(租稅)를 활용하는 방안을 <진보와 빈곤>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정리하면, <진보와 빈곤> 속의 내용은 조세를 통한 부당이익 환수를 통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부의 불평등을 해결하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사유토지의 매수도 환수도 아니다. 매수는 정의롭지 못한 방법이고 환수는 지나친 방법이다. 현재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대로 토지를 가지게 한다. 각자 보유하는 토지를 지금처럼 자기 땅이라고 불러도 좋다. 토지매매도 허용하고 유증, 상속도 하도록 한다. 속알만 얻으면 껍질은 지주에게 주어도 좋다. 토지를 환수할 필요는 없고 단지 지대만 환수하면 된다.(p391)... 이미 우리는 지대의 일부를 조세로 걷고 있다. 그러므로 단지 조세의 방법만 약간 바꾸어 지대 전체를 걷으면 된다. 그러므로 저자는 지대를 모두 조세로 징수하자고 제안한다.(p392) <진보와 빈곤> 中
최근 대통령 발의 헌법 개정안과 관련하여 '토지공개념'의 헌법 명시가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시장(市場)의 자율성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시장의 원리에 반(反)하는 사회주의적인 개념이라고 반론을 펴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앨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 1842 ~ 1924)의 <경제학 원리 Principles of Economics>속의 다음의 내용을 읽어보자.
신생국에서든 오래된 국가에서든 선견지명이 있는 정치가는 다른 형태의 부(富)보다도 토지에 대해 법률을 제정할 때 미래 세대에 대한 좀더 큰 책임감을 느낄 것이며, 경제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윤리적 관점에서도 토지는 언제나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반드시 별개의 것으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복하도록 이끈다. 만일 처음부터 국가가 진정한 지대를 직접 계속 보유했더라면, 비록 아주 드문 경우에 신생국에의 정착이 다소 지연될 수도 있겠지만, 산업의 활력과 축적이 손상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p576) <경제학 원리2> 中
앨프레드 마셜은 케임브리지 학파(新고전학파)에 속하는 전형적인 시장주의 경제학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셜 역시 토지는 다른 형태의 경제재와는 구분되는 특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사(私)적 개인에게는 공공의 복지를 훼손할 권리가 없음을 그의 저서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높은 임대가치의 원인은 성장하는 세대의 활력과 기쁨을 약화시킬 만큼 중대하게 신선한 공기와 햇빛과 놀이공간의 희소성을 위협하는 인구의 집중이다. 그렇게 풍부한 사적 이득은 성격상 사적이기보다는 공적인 원인에 의해서 발생할 뿐만 아니라 공적 부의 주된 형태의 하나를 희생시키면서도 발생한다. 공기와 햇빛과 놀이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지출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러한 비용을 지출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원천은, 국가의 대표자인 왕이 유일한 토지보유자였던 때부터 부지불식간에 서서히 성숙된, 토지에 대한 극단적인 사유재산권인 것처럼 보인다. 사적 개인들은 공공의 복지를 위해 일할 의무가 있는 토지보유자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과잉건설을 통해 공공의 복지를 훼손할 정당한 권리가 없다.(p577) <경제학 원리2> 中
그렇다면, 우리가 불노소득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토지에 대해 과세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의 불평등 심화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토마 피게티(Thomas Piketty, 1971 ~ )는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를 통해 부동산 투자를 통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부동산 수익은 역사적으로 4~5%의 자본수익률을 안정적으로 보장하지만, 자산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이 정도의 수익률에도 절대 금액은 자산가에게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한다. 반면, 임대료를 내야하는 세입자에게 이는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된다는 것이다.
21세기 초반인 현재 부동산 투자 수익률은 19세기와 비슷한 4~5퍼센트 정도이거나, 특히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동안 임대료가 동반 상승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이따금 이보다 약간 낮다....집주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연간 3퍼센트의 자본수익률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정도 임대료도 집주인에게는 상당한 소득을 의미하고, 전적으로 노동소득에만 의존해서 살고 있는 세입자에게는 이 정도면 매우 큰 금액이다. 나쁜 소식은 상황이 항상 이와 비슷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도의 임대료는 자본수익률이 약 4퍼센트가 될 때까지 오르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세입자의 임대료는 장차 오를 가능성이 높다. 집주인의 연간 투자수익률은 결국에는 아파트 가치의 장기적 자본이득 capital gain(자산 가격 상승으로 발생한 차익)에 의해 상승할 수 있다.(p71) <21세기 자본> 中
이러한 경제적인 요건 이외에도 토지를 공적인 자산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그것은 토지(부동산)이 우리 삶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회와 관련을 맺는 공간은 자본의 소유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데, 자본이 없는 이들은 자본이 없다는 이유로 인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불리한 위치에서 출발하게 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과의 부의 불평등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현실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 ~ 2002)의 <세계의 비참 La Misere du Monde>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간을 지배하는 능력, 특히 분배된 귀한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공간을 지배하는 능력은 소유하고 있는 자본에 달려 있다. 자본은 달갑지 않은 사람들과 사건들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며, 동시에 반가운 사람들과 사물들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도록 해준다. 그럼으로써 그러한 것들을 자기 것으로 삼는 데 필요한 지출(특히 시간)을 최소화시켜 주는 것이다... 반대로 자본이 없는 자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귀한 재산들로부터 물리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거리감을 유지하게 되어 있으며, 뿐만 아니라 달갑지 않고 귀하지도 않은 사람들이나 재산들과 접근하도록 되어 있다. 말하자면 자본의 결여는 유한성의 체험을 증대시키는데, 이는 자본이 없을 경우 한 장소에만 매이게 되기 때문이다.(p265) <세계의 비참1> 中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을 통해 부의 불평등 해소를 위해 토지 공개념을 도입했으며, 이의 구체적인 수행 방안으로 지대에 대한 과세를 주장했다. 이처럼 토지에 대한 과세 문제는 헨리 조지가 급진적인 진보주의자여서가 아니라, 토지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특성에 기원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시장주의자인 앨프레드 마셜 역시 토지에 대한 문제에 대한 과세를 그의 저서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또한, 토지에 대한 점유는 부의 불평등과 빈곤의 대물림을 낳고 있음을 우리는 <21세기 자본>과 <세계의 비참1>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최근 토지 공개념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뜨겁다.
토지를 사유재로 볼것인가, 공공재로 볼것인가에 대해서는 각각의 논거가 있기에 어느 일방이 옳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역사(歷史) 속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우리는 이미 1년 전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대통령을 파면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파면이 가능했던 것은 헌법 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혼란으로 인한 손실보다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개인의 재산권 수호와 사회의 모순 해결이라는 상충되는 문제의 해결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면서 페이퍼를 마친다.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피청구인의 법 위배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