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노의 원인 : 전쟁의 시작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제1권 1 ~ 5)'
<일리아스>를 관통하는 전체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아킬레우스는 왜 분노했는가? 아가멤논에게 아킬레우스가 '브리세이스'를 빼았겼기 때문이었으며,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의 '브리세이스'를 빼았은 이유는 아폴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아폴론은 왜 분노했는가? 이는 헬라스 연합군들이 아폴론의 사제(司祭) 크뤼세스를 모욕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헬라스 연합군들은 왜 모였는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트로이 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그것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아내 헬레네를 빼앗긴 메넬라오스의 분노로 수많은 아카이이오이 족이 뭉쳤기 때문이며, 이들과 함께 한 것은 '황금 사과'를 빼앗겨 분노에 불타는 두 여신 헤라와 아테네였다. 이들을 분노하게 만든 원인인 황금 사과는 인간 펠레우스와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不和)의 여신 에리스의 분노 때문이었고, 펠레우스와 테티스가 아킬레우스의 부모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결국 <일리아스>와 트로이 전쟁을 관통하는 주제가 '분노'라는 사실과 함께 아킬레우스 자신이 트로이 전쟁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2. 분노의 결과 : 파멸
브리세이스를 잃었다는 분노로 아킬레우스는 전투에 나가지 않게 되고, 그를 대신하여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를 갖춰 입고 전장에 나간 파트로클로스는 헥토르의 손에 죽음을 맞이 한다. 브리세이스 상실로 인한 아킬레우스의 첫 번째 분노의 결과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결과를 맺는다. 파르토클로스의 죽음을 전해 들은 아킬레우스는 다시 한 번 깊게 상심에 빠진다.
'이렇게 말하자 슬픔의 먹구름이 아킬레우스를 덮어버렸다. 그는 두 손으로 검은 먼지를 움켜쥐더니 머리에 뿌려 고운 얼굴을 더렵혔고 그의 향기로운 옷에도 검은 재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자신은 먼지 속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제18권 22 ~ 25)'
<일리아스> 제 22권에서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헥토르의 목숨을 가져오지만, 나중에 그 역시 파리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두 번째 분노의 결과를 우리는 <오뒷세우스>에서 확인하게 된다.
'"나(오뒤세우스)는 아직도 아카이오이족의 땅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내 나라를 밟아보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고통만 당하고 있소. 하나 그대로 말하면 아킬레우스여, 어느 누구도 예전 그대처럼 행복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그러니 아킬레우스여, 그대는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지체없이 이런 말로 대답했소.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말하지 마시오, 영광스런 오뒷세우스여!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제11권 481 ~ 491)'
3. 분노(화)를 다루는 효과적인 방법
'분노'로 시작된 트로이 전쟁은 전쟁에 참여한 이들의 파멸적인 결과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러한 분노(화)를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분노에 대해서는 여러 글들이 있지만,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 4 ~ AD 65)의 <화에 대하여 On Anger>의 글을 옮겨본다.
'우리는 이 악덕(惡德)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우리의 사고를 깨끗이 정화하고 이 악덕의 뿌리를 철저히 뽑아버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흔적이라도 남겨두면 어디든지 들러 붙을 곳이 있을 때 다시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는 적절히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옪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적과의 반목을 선언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허비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고결한 기쁨을 위해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허락된 날들을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데 바치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는가?" 네가 진정으로 관심을 두는 일들을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네겐 헛되이 낭비할 시간이 없다.(p245)'
세네카는 '화'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악을 일상 생활로부터 제거할 것은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상생활에서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과연 '제거'만이 화를 다루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을까? 화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독일의 가톨릭 수도자 안셀름 그륀(Anselm Grun, 1945 ~ )신부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눈을 감는 행동입니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잘못이라는 더러움을 희생양에게 덮어씌우고, 자신은 더러움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도 결코 더러움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이의 잘못을 진지하게 살펴보면서, 자신 안에도 비슷한 경향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고백하고,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 약함을 인정하며, 다른이 들을 판단하지 않는 겸손과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p44)'
개인적으로 효과적으로 분노를 조절하는 것은 이를 제거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거울'로 생각하고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리아스>의 파멸적 결과를 통해 지금의 작은 분노가 큰 불행을 불러올 수 있음을 마음에 담아두고 자신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