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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 - 개역판
아담 스미스 지음, 박세일 옮김 / 비봉출판사 / 2009년 11월
평점 :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의 대표작은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이다. 그렇지만 그는 죽어서 자신의 묘비병으로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 잠들다"라고 써 놓을 정도로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애덤 스미스가 애착을 가졌던 <도덕감정론>에 대해 이번 리뷰에서는 살펴보도록 하자.
1.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행동원리 : 동감(同感)
인간의 기본적인 행동원리 중 하나는 '동감(同感)'이다. 동감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 자신의 일처럼 유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며,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 중 특히 고통에 대해 더 생생하게 느낀다. 같은 감정이더라도 우리가 타인의 기쁨보다는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利己的 : selfish)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天性 : nature)에는 분명 몇 가지 행동원리(principles)가 존재한다. 이 행동원리로 인하여 인간은 타인의 행운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기 그 행운을 바라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행운을 얻은 타인의 행복이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연민(憐憫 : pity)이나 동정심(同情心 : compassion)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의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또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느끼게 되는 종류의 감정이다.(p3)'
'상상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타인이 처한 상황에 놓고 스스로 타인과 같은 고통을 겪는다고 상상한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는 방식은 마치 우리가 타인의 몸속에 들어가서 어느 정도 그와 동일한 사람이 되고, 그럼으로써 타인의 감각에 대한 어떤 관념을 형성하며, 비록 그 정도는 약하다고 하더라도, 심지어는 타인의 것과 유사한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p4)...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동류의식(同類意識 : fellow-feeling)을 느끼게 되는 원천은 바로 이것이다.(p5)'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슬픔보다는 기쁨에 더 큰 공감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숨기려 한다. 그래서, 알게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은 그에게 큰 굴욕감을 안겨 주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공감을 통해서 타인의 고통에 위로를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태도는 매우 비인간적인 것으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다른 이들에 대해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기본 행동 원리가 '공감'이라면, 자기 행동의 원칙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우리의 비애(悲哀)보다는 환희(歡喜)에 대해 더 많이 동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재부(財富)는 과시하고 빈궁(貧窮)은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우리가 겪는 빈곤과 고통이 폭로되는 것만큼 치욕적인 것은 없으며, 그리고 우리의 처지가 모든 인간들의 눈에 다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의 반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것보다 더 굴욕적인 일은 없다.(p91)'
'불행한 사람들에 대하여 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모욕(侮辱)은 그들의 재난(災難)을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친구의 기쁨에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단지 무례(無禮)한 행동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친구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야기할 때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엄청나게 비인간적인 행동이다.(p16)'
2. 자기 행동의 준칙 : 공정한 방관자
[사진] 칸트(출처 : 위키백과)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 칸트 -
애덤 스미스는 자기 행동의 판단 기준은 공정한 방관자가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처럼 노력할 것을 <도덕감정론>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준칙을 지키는 것을 저자는 <도덕감정론>에서 '시인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공정한 방관자가 바라보는 것처럼 노력하라'는 애덤 스미스의 준칙은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실천이성비판 實踐理性批判,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에서 말한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개인이 공정한 방관자의 입장에서 사회 정의에 부합될 수 있도록 행위했을 때, 사회전체적으로 애덤 스미스가 추구한 미덕(美德)이 달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애덤 스미스가 추구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여기서 잠시 애덤 스미스의 미학(美學, Aesthetics)을 살펴보자.
'우리가 우리의 감정과 동기에 대해 어떤 판단을 형성할 수 있건 간에, 그 판단은 항상, 타인의 판단은 실제로 어떠한가, 타인의 판단은 특정 상황에서는 어떠할까, 타인의 판단은 상상하건데 어떠해야할 것인가, 하는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준거(準據)에 관계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우리가 상상하는 공정한 방관자가 바라보는 것처럼 바라보도록 노력한다.(p210)'
'우리가 우리를 만족시켜 주는 모든 것들, 즉 건물의 형태나 기계의 설계나 한 접시의 고기 요리의 맛을 시인한다(approve)고 표현하는 것은 언어상으로도 적절한 표현이다.(p628)'
'미덕은 어느 한 가지 감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정의 적절한 정도(程度)에 있다. 나는 이 적절한 정도를 정하는 천연적 및 원시적인 척도(尺度)는 동감(同感) 또는 공정한 방관자의 상응하는 감정을 그 척도로 삼아야한다고 생각한다.(p586)'
3. 아담 스미스의 미학(美學)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애서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상대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미(美)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비평가들이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때 '절대미'에서 어느정도 떨어져 있는가를 비평기준을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미덕에 대해 말할 때도 절대미덕에 얼마만큼 근접해있는가를 통해 행위에 대한 평가를 한다. 이를 경제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최선(最善)을 대신한차선(次善)의 선택'이 될 것이고, 수학으로 표현한다면 극한(極限, limit)에서 '절대미에 무한 수렴'의 개념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결국 애덤 스미스는 '적절한 감정의 조화를 통해 절대적인 미에 가까워지려는 적절한 노력'이 아름다움을 향한 우리 사회가 나가야할 바로 지적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어떤 행위에 대하여 그것이 어느 정도의 비난이나 갈채를 받아야만 할지를 결정할 때, 우리는 항상 서로 다른 두 가지 기준을 사용한다. 첫 번째 기운은 완전한 적정성(適正性)과 완미(完美)라는 개념이다... 두 번째 기준은, 이 진선진미(盡善盡美)한 상태로부터 접근해 있는 정도 또는 떨어져 있는 정도를 기준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p39)...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상상력(想像力)에 호소하는 모든 예술작품들을 판단한다...작품을 비교하는 기준은 특정 분야의 예술이 통상 도달해 있는 탁월성(卓越性)이 된다. 그리고 그가 이 새로운 척도(尺度)에 의해 판단할 때, 그 작품은 흔히, 그것과 경쟁할 수 있는 다른 작품들 대부분보다 훨씬 더 완미에 접근해 있다는 이유로, 최고의 갈채를 받을 만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p40)'
4. 애덤 스미스의 철학 체계
이상의 논의를 정리했을 때, 우리는 일차적으로 타인의 감정에 동감을 하고, 이로 인해 그 사람으로부터 감사하는 마음을 받게 되고, 이러한 동감과 공감이 우리 개인의 일반준칙에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이 모여서 사회전체가 보다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논의한 철학체계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성품이나 행동을 시인(是認 : approve)할 때 느끼는 감정들은 네 가지 근원(根源)에서 나온는데, 이들은 몇 가지 점에서 서로 다르다. 첫째, 우리는 행위자의 동감(同感)에 대해 동감(同感 : sympathize)한다. 둘째, 우리는 그의 행위로부터 혜택을 받은 사람의 감사하는 마음에 공감(共感 : enter into)한다. 셋째, 우리는 그의 행위가 이상의 두 가지 동감이 그것의 행동의 근거가 되고 있는 일반준칙(一般準則)과 일치하는 것을 것을 관찰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행위는 개인이나 사회의 행복을 촉진시키는 경향을 가진 행위체계(行爲體系)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간주할 때, 그 행위들은 이러한 효용(效用)으로부터 그 아름다움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설계가 잘된 기계에 일종의 아름다움을 귀속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p629)'
<도덕감정론>에서는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행동원리인 '동감'과 자기 행동의 원칙인 '공정한 방관자의 입장'을 통해 사회의 미덕(美德)에 맞는 행동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전체 사회가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애덤 스미스의 철학 체계를 완성시키고 있다. 이러한 틀 안에서 <국부론>의 이론이 이해되지 않으면, 그의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흔히들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를 통해 시장경제 체제를 이야기 하지만, 그 전제는 '공감하는 인간'이 시장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감할 수 없는 인간'인 법(法)에 의해 인격(人格)이 부여된 '회사(company)' 특히, 대규모 자본이 시장의 주체가 되었을 때에도 완전경쟁의 시장의 논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바로 <도덕감정론>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진 물음이라 생각된다. 이제는 이러한 전제 위에서 <국부론>을 읽을 차례다.
PS. <도덕감정론>은 1759년에 쓰여졌고, <실천이성비판>은 1788년에 쓰여졌으니, 칸트의 정언명령이 애덤 스미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PS2. <도덕감정론>을 보다 맛있게 즐기는 법
아담 스미스의 말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322)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ca Nicomachea>과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 ~ BC 43)의 <의무론 義務論>을 <도덕감정론>과 함께 읽는다면 보다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시학 詩學>도 곁들인다면 더 좋지 않을까도 생각되기에, 다음 기회에 페이퍼로 정리해 보려 한다...
'비극이나 로망스의 가장 흥미 있는 주제는 유덕하고 대담한 왕(王)이나 왕자(王子)의 불행이다. 만약 그들이 지혜롭고 굴(屈)하지 않는 강인한 노력을 통해 그러한 불행에서 벗어나서 그들이 전에 누리던 우세(優勢)와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들을 매우 열렬히 그리고 심지어 지나칠 정도로 찬탄하는 마음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그들의 불행에 대해 느끼는 비애와 그들의 성공에 대해 느끼는 기쁨은 함께 결합되어, 우리가 그들의 지위와 성품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가지는 편애(偏愛)에 기인한 찬탄을 고조(高潮)시키는 것으로 보인다.(p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