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렌드 동백꽃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백꽃이라는 커피와는 왠지 안 어울리는 이름 때문에 구매를 망설였는데 커피 본연의 맛에 충실한 제품 같다. 묵직하고 은은하고 조금 고소한 맛. 신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신맛 싫어하는 사람에게 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장난꾼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7
M. C. 비턴 지음, 문은실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오, 처음 등장한 두 개의 살인. 이 정도 장난꾼이면 죽이고 싶을 것 같기는 하다. 그나저나 프리실라와 해미시의 관계는 여전히 쫄깃쫄깃. 해미시는 정말 계속해서 야망을 등지고 살아갈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며칠 후면 한 친구를 만난다. 거의 십 년 만이다. 십여 년 전 친구와 나는 오해로, 아니 나의 일방적인 절교 선언으로 연락이 끊긴 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문득 궁금했고, 가끔 그리웠다. 친구도 그랬는지, 내가 답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얼마 전 메일을 보내왔다. 그애의 메일을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고 한참 읽었다. 온갖 말들이 떠올랐지만 그 많은 단어 가운데 몇 마디만 꺼내서 친구에게 보냈다. 반갑다고, 잘 지냈느냐고.
 
 그 후로 친구와 나는 메일을 몇 번 더 주고받았다. 내가 그 메일 계정을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니, 메일을 읽고 나서 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친구는 내 답장에 기쁜 모양이다. 나도 그렇다. 다시 내게 소식을 전해주어서. 세월이 훌쩍 흘렀고, 친구와 나는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때보다 열 살은 더 먹었다. 그 사이 친구와 나의 신변에도 소소한 변화가 있었고, 그애와 나는 그런 소식들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이제, 며칠 후면 그애를 본다.
 
 십 년 만의 만남, 무언가 소중한 선물을 주고 싶어서 나는 어떤 책이 좋을까 머리를 굴린다. 누군가는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면서 웬 책 선물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애와 나 사이에 책은 남다른 의미였다. 열네 살, 서로 처음 알게 된 이후로 학교를 함께 다니면서 주고받았던 그 수많은 편지들. 그중에는 책 이야기도 많았다. 지난해인가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노트》가 문고판으로 나온 걸 보고 나는 그애를 떠올렸다. 예전에 그애에게 편지 쓸 때면 ‘Tibi’라고 그 책에서 따온 표현을 쓰곤 했다. 그애도 기억할까? 자크와 다니엘 같은 그런 사이가 되자고 말했던가, 그 책을 선물했었는지 빌려줬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로도 한동네에 살았던 친구와 나는 종종 만나 집 근처에서 술을 마시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즈음 읽던 책 중 좋았던 것을 챙겨가서 빌려주었고, 친구는 다음에 만날 땐 빌려간 책을 돌려주고, 나는 또 새로운 책을 빌려주곤 했다. 술자리에서는 책 이야기가 자연스레 오갔다. 우리만의 독서모임이랄까. 그런 세월이 이어졌다. 내 탓으로 인연이 끊어지고도 이따금 그때가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줄 책으로 고심 끝에 《숨겨진 삶》을 고른다. 《아일린》도 《거지 소녀》도 《카시지》도 《나이트 워치》도 떠올랐다. 그동안 헤어지지 않았다면 이 책들도 너에게 빌려줬을 텐데……. 그럼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숨겨진 삶》은 어떻게 보면 지금 그애와 내 현실에 맞아떨어진다. 우리는 이제야 소식을 조금 주고받지만, 그동안 서로의 삶은 세세히 알지 못한다.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네가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궁금하다고 더 묻고 싶지만 나만의 욕심일 수 있다. 《숨겨진 삶》의 ‘사빈’과 ‘마리’, ‘에디트’, ‘셀레스트’ 그리고 ‘피에르’에게는 하나같이 숨겨진 삶이 존재한다. 대부분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삶을 간직해왔고 그 숨겨진 삶은 그들 저마다에게 상처가 되고, 때로는 그 상처 때문에 자기 안에 갇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모두가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친구는 그동안 하던 일을 접고 가죽공예를 시작했다고 한다. 뜻밖의 소식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애를 전보다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피에르’ 방에 걸려있던 노란 포스터, 로스코의 복제화가 피에르의 본질을 보여주듯이, 친구가 만든 가죽제품은 그애의 ‘숨겨진 삶이 식별되고 감지’되는, 그 한 사람이 이제껏 애써온 자취로 내게 다가온다.
 
 어느 늦은 밤 《나이트 워치》를 읽은 뒤 문득 그애가 떠오르기도 했다. 등장인물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그들 삶의 궤적을 좇는 이야기 형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케이’, ‘헬렌’, ‘줄리아’, ‘비브’……. 그들의 인생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우정으로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때로는 그런 시절 때문에 고통받지만 그조차 눈부셨다. 그들의 삶은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이제 빛바랜 추억만이 남았다. 돌아보면 나 또한 인생의 순간순간에 전쟁 같은 시기가 있었고 그것이 지나가면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남겼다. 너 또한 그랬을 테지. 그런 힘겨운 순간을 넘기고도 사람은 살아간다. 그 순간들이 모여 인생을 이루는 건 아닐까. 그런 시간을 보냈을 그애에게, 그리고 나에게 이제까지 참 잘 살아왔다고 도닥여주고 싶다.
 
 그애는 몇 해 전 서울을 떠났다. 작은 도시에 살면서 어느 독립서점에서 운영하는 독서모임에 종종 나가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는 책방지기에게 추천해달라고 해서 한 책을 읽었다는데, 그 책을 읽는 내내 엄마와 딸 관계를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가 차분히 털어놓은 이야기에서 나는 처음 알게 된다. 그애는 말한다. 자라는 동안 엄마한테 많은 상처를 받았고, 그 화를 삭이면서 살아왔다고, 그렇게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스스로 엄마가 되고 나서야 이제 조금은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고. 우리가 그토록 오래 술잔을 기울이며 만났어도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혹시 오래전에 듣고도 내가 너무 어렸을 때라, 내가 덜 성숙했던 터라 친구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그 책방지기였다면 《거지 소녀》를 권했을 텐데. 유년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로즈’와 새엄마 ‘플로’와의 애증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나간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친구가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고 또 자기 아픔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그애와 나의 인생, 사소하지만 돌아보면 나름대로 소중한 순간이었을 그 시간들을 모아서 담담히 그려낸다면 아마 《거지 소녀》에서 묘사하는 삶과 비슷하지 않을까. 전체적으로는 평범하고 보잘것없으며 고통스러운 인생. 그 삶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또 애쓰는 사람들. 그런 고달픈 틈바구니에서 때때로 비춰지는 작은 햇살과도 같은 순간들……. 이토록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로즈와 플로,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진정한 자기와의 화해를 시도한 로즈. 친구도 로즈의 삶을 보며 자기의 상처를 치유하고 엄마와도 진정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분노하고 화를 삭이지 못했던 소녀들, 그래서 외롭기 짝이 없는 소녀들이 등장하는 《아일린》과 《카시지》도 우리가 함께 읽는다면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사랑받기를, 인정받기를,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아일린’의 모습은 한때 우리 모습이다.  십대와 이십대 초반 누구나가 느꼈을 법한 자기혐오, 자기연민, 어떻게 할 줄 모르겠는 세상과 주변 사람을 향한 격렬한 분노, 쓸쓸함과 외로움, 그러면서도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는 그런 마음들을 거쳐 왔다. 아일린을 보면 그 치기어린 순간들이 떠오르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그러나 그 시절도 이제는 사라졌기에, 어쩐지 그리운 마음으로 추억하게 되지 않느냐고. 《카시지》의 ‘크레시다’도 아일린 못지않게 외롭다. 그 외로움이 큰 상처가 되어 주변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다. 그러면서도 영민한 크레시다는 자신이 얼마나 얄팍한지, 얼마나 쉽게 상처받고 패배감을 느끼는지 똑똑히 안다. 그 시절의 내가, 그애가 그러했듯이.

 스물네 살 때 아일린이 가장 원했던 건 모르는 사람들로 꽉 찬 곳에서 오후를 보내거나, 거리를 느긋하게 걷거나, 어느 먼 곳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어딘가 자신의 집에서 편히 머무는 삶이었다. 친구의 요즈음 생활을 보면 아일린이 바랐던 삶과 무척 닮은꼴이다. 소란스러운 서울을 벗어나 작은 도시에 정착하고, 그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그래서 할머니라고 부르는 이를 벗 삼아 함께 산책하고, 자기만의 조그마한 공간에서 가죽제품을 만들고, 독립책방을 찾아가 독서모임을 하고……. 그리고 나처럼 못난 친구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고. 아일린이 ‘사랑에 대해 배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온 동네의 문을 다 두드려보고 나서야 맞는 집’을 찾았듯이, 친구는 자기에게 꼭 맞는 집을 찾은 것 같다. 그애의 그런 모습을 이제 마주할 예정이다. 이 책들과 함께 우리의 우정도 다시 시작되리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12-13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3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19-12-14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야기를 나누던 옛 친구를 10년만에 다시 만난다니...제가 다 설레이네요. 2019년 마지막 달을 의미있고 따뜻하게 보내시겠어요. <숨겨진 삶> 저도 어제 받아서 책을 두 손에 들고 보는데 손 안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듯, 그냥 좋더라구요. 오랜 기간 소원했던 친구에게 이 겨울 좋은 선물일 듯 싶네요.

잠자냥 2019-12-14 09:59   좋아요 1 | URL
이 글은 며칠 전에 썼는데, 어제 드디어 친구를 만났어요! ㅎㅎ 책 선물에 좋아하더라고요. 정말 기분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
 
나보코프 문학 강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 재미있다. 바로 옆에서 나보코프가 문학 강의를 해주는 느낌. 여기 실린 7개 작품을 다 읽었다면 강의가 더 재미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흥미롭다. 제인 오스틴이나 디킨스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다시 읽어봐야겠다. 장담한다. 이 책을 읽으면 문학 보는 눈이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장을 꼭꼭 씹으면서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다 읽고 난 다음에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게 되는 책이 있다. 실비 제르맹의 <숨겨진 삶>이 그랬다. 나는 이 작가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책을 덮고는 그이의 다른 책들도 찾아본다. 또 다른 작품, 그의 다른 세계가 궁금해지는 사람,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읽은 것은 행운이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다.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서 더는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은 이 말. 이곳에서의 나비 날갯짓이 저 먼 곳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 말은, 일반적으로 아주 작은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숨겨진 삶>에는 바로 그런 이야기들이 그려진다.



벼룩 한 마리가 흑사병이나 티푸스를 퍼뜨리고말고,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고, 재채기 한 번으로 산사태가 날 수도 있지. 복권 한 장이 사랑을 파괴하고, 말 한마디가 무사태평한 기쁨과 신뢰를 단번에 사라지게 하고, 한순간의 부주의가 파리채로 파리 잡듯 한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지. (40쪽)


인용 문장에 ‘복권 한 장이 사랑을 파괴’한다는 말이 보인다. 실제로 온라인 서점의 이 책 소개 내용을 보면 ‘복권’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빈’과 그녀의 남편 ‘조르주’ 사이에는 복권으로 얽힌 기막힌 사연이 숨겨 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은 이들에게 만일 <숨겨진 삶> 이 작품이 복권과 얽힌, 그로 말미암아 파괴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복권은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복권이라는 날개짓은 또다른 소소한 날개짓들에 비하면 그리 큰 사건도 되지 못한다.

작품은 어느 을씨년스러운 12월 강가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한 여인이 강변을 거닐고 있다. 그런데 그 몸짓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둥거린다. 여자의 몸에는 불안이 잔뜩 스며있다. 이 을씨년스러운 날씨, 이 시간에 여자 홀로, 왜 강변을 저리 허둥대며 거닐고 있을까? 여자는 불안으로 곧 쓰러질 것만 같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백화점에서 산타클로스 차림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피에르’가 바로 그다. 여자가 위험하다고 느낀 그는 허겁지겁 달려가 여자, 그러니까 ‘사빈’을 부르고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웃지 말라’고 외친다.

피에르는 사빈이 품속에 안고 있던 것, 그러니까 아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한 ‘그것’을 가리키면서 딸인지 아들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사빈은 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라고 말한다. 피에르는 여자가 아이를 품에 안고 강가로 달려갔고, 무언가 나쁜 일, 그러니까 아이를 안은 채 강으로 뛰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순간 “웃지 말라”고 말했을까? 사빈이 품에 숨기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라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이들에게 줄 인형일까? 아무튼 피에르는 자신이 걱정했던 것처럼 아이를 안은 채 자살할 생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순순히 사빈을 보내준다.

그러나 독자들은 사빈과 피에르가 이렇게 우연히, 기이하게 만났고, 별일 없이 헤어지기는 하지만 곧 만날 운명임을 눈치채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그 사이 사빈, 서른 초반이지만, 열일곱이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일찍 결혼한 탓에 남편 조르주와의 사이에서 아이 넷을 둔 이 여인의 사연이 잠시 소개된다. 복권에 얽힌, 그리고 그 때문에 숨길 수밖에 없는 사빈의 사연과, 복권으로 드러난 조르주의 숨겨진 사연, 그러나 끝끝내 사빈은 알지 못하고, 이 책을 읽는 이들만 알게 되는 그 사연까지 그 모두가 스케치하듯 짧지만 강렬하게 지나간다.

사빈과의 그 짧은 인연으로 피에르는 곧 사빈과 함께 일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사빈의 가족, 그녀의 네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가족처럼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 관계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분명 있다. 사빈의 시아버지인 ‘샤를람’은 근본도 모르겠는, 어디선가 굴러먹다 온 기생충 같은 피에르가 눈엣가시와도 같다. 틀림없이 며느리인 사빈과도 그렇고 그런 관계일 것이라는 추측 아래, 자신의 손자들에게 피에르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어주려고 안달이다. 샤를람의 의도는 어느 정도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심하게 실패하기도 한다.

‘피에르 제브뢰즈’- 일정한 직업 없이 재주껏 생계를 꾸려나가고 거처를 자주 옮기며, 자신의 과거를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 남자. 호적상 이름은 ‘에프렘’으로 ‘피에르’라는 이름은 가운데 이름에 지나지 않는데 자신을 피에르라고 불러달라는 이 남자. 어딘지 어두운 면모도 보이지만 한없이 선량하고 충직해서 절대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못할 것 같은 이 남자. 그런데 이 남자에게는 과연 무슨 사연이 있을까. 사빈에게 그날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가서 ‘웃지 말라’고 말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내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숨겨진 삶’이 드러날 때는 먹먹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피에르의 ‘숨겨진 삶’만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사빈에게도 속편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녀의 딸 ‘마리’에게도, 사빈 가족이 ‘왕고모’라고 부르는 ‘에디트’에게도, 그리고 또 다른 여인 ‘셀레스트’에게도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모두에게 하나같이 ‘숨겨진 삶’이 존재한다. 이 여인들뿐만이 아니다. 나오는 이들 대부분이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삶을 간직하고 있고, 그리고 그 숨겨진 삶은 그들에게 저마다 상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상처 때문에 자기 안에 갇히고 말지만, 그럼에도 제각각 그 은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버텨나간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이 솟아난다.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앙리가 유랑하는 증인이 된 것도 어찌 보면 피에르 때문이었다. 지나가는가 싶었는데, 금세 사라져버리는 사람들, 전쟁과 혁명이 집어삼킨 운명들, 이 숨겨진 삶들을 즉각적인 망각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 세월과 더불어 광채를 잃어가는 노란 포스터. 하지만 로스코의 이 복제화는 색이 바래버린 지금도 앙리에게는 세상을 향해 여린, 탐색되지 않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이다. 이 그림 역시 숨겨진 삶이 식별되고 감지되게끔 하기 위해 한 사람이 애쓴 자취였다. 숨겨진 이 비극들 속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빛과 어둠이 마찰을 일으키거나 포옹하며 접촉했고, 다양한 색깔들이 수축과 팽창이라는 이중의 운동 속에 부동(不動)을 스치며 움직인다. (220쪽)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책 표지를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를 걷어낸 뒤 드러나는 속표지까지 그렇다. 다 읽고 나면 맨 앞장으로 돌아가 다시 읽을 수밖에 없는 책들이 있다. 이 작품이 그렇다. 그 모든 얽히고설킨 사연을 알게 된 뒤 다시 훑어보는 이 작품은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 아무것도 아닌 듯이 흩여져 존재했던 조각들이 얼마나 많은 정보들을 숨기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면서 감탄하게 된다. <숨겨진 삶>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이 책을 읽을 이들에겐 누가 되는 행동일 뿐이다. 여러 번 읽어도 좋은, 그런 작품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12-10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장바구니에 소설이 한 권도 안들어있어서 아아 어찌 이러는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했는데, 이 리뷰를 보기를 잘했네요. 이 책으로 소설을 담습니다.

사빈과 피에르가 우연히 만났고 곧 다시 만나게 된다는 글을 읽으니 어쩐지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떠올랐어요. 남자가 포르투갈 여자랑 우연히 다리 앞에서 마주치치 않던가요. 그리고 남주가 미친듯이 포르투갈어를 공부하던 그 장면도 연달아 떠오르네요. 저는 그 소설 자체를 그렇게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포르투갈어 엄청 공부하는 장면을 좋아했어요.

잠자냥 2019-12-10 17:58   좋아요 0 | URL
이 소설 정말 좋았어요... 아주 기냥 줄거리 최대한 안 밝히려고 애썼으니 온전히 잘 읽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참, 책 표지 뒷면은 책 다 읽고 읽으세요. 먼저 읽음 안 됨!

다락방 2019-12-10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땡투땡투. 부자로 만들어 드리리..

잠자냥 2019-12-10 17:58   좋아요 0 | URL
오모나 땡투땡투 ㅋㅋㅋㅋ

유부만두 2019-12-10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선택이 탁월하죠?!!!!

잠자냥 2019-12-10 21:39   좋아요 1 | URL
네 읽고 나서 보니 정말 표지 잘 만들었더라고요!

케이 2019-12-11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겉만 봐도 예쁜데 또 다른 표지가 있는 모양이네요. 이렇게 보관함에 책을 또 한권 넣어봅니다.

잠자냥 2019-12-11 17:10   좋아요 0 | URL
이 표지는 음... 예쁜 걸 떠나서 작품 내용과 아주 잘 조화를 이루는 표지에요. 또 다른 표지라고 말하기는 뭐하고, 요즘 양장본은 겉표지 떼어내면 그 안에 책만 나오잖아요? 그 책에 새겨진 그림도 작품 내용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집니다. 대부분 책 표지는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잘 읽지 않거나(잘 모르는 채) 엉뚱하게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 책은 디자인한 사람이(아니면 책 표지 디자인에 관여한 사람이) 분명 작품을 다 읽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coolcat329 2019-12-1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작가지만 저도 이상하게 끌리네요.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표지가 한 몫 제대로 하는듯 싶어요. 일단 사야겠어요.🤤

잠자냥 2019-12-12 09:23   좋아요 0 | URL
네 읽고 나면 아마 마음에 더 드실 거예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