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많이 온다. 기분이 참 처진다. 8, 9월에 일이 많았다. 8월에는 집사2가 수술을 받았다. 7월말부터 왼쪽 골반이 불편하다고 해서 테니스를 너무 많이 쳐서 무리가 간 것인가 싶어서 좀 쉬자고 하고 통증병원을 가라고 했다. 근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골반뼈에 실금이 가 있었는데 그 병원에선 엑스레이를 찍고도 발견을 하지 못했다. 거기에 스테로이드 처방에 충격파 치료까지 했으니 증상은 더 나빠졌다. 2주 가까이 치료를 해도 더 아프다고만 해서 그때서야 다른 정형외과를 찾았다, 골반에 실금이 가 있으니 당장 수술해야 한다나. 수술 날짜를 잡고 입원을 앞뒀는데 하필이면 그날 집사2는 넘어지고 말았다. 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나. 왼쪽 고관절 골절. 수술이 끝나도 꼬박 6주를 휠체어 또는 목발에 의지해야 한다. 수술 후 일주일 가까이 병원 입원, 퇴원하고도 집에서 혼자서는 움직이면 큰일 날 것 같아 재활병원에 입원했다. 8월 중순 이후로 내 일상은 집-회사-병원을 오가는 나날이었다.
집사2가 수술받은 이후 며칠 동안은 보호자가 바로 옆에 있어야 해서 휴가를 내고 거의 병원에서 지냈다. 그래도 고양이들은 챙겨야 해서 낮에 잠깐 들러 밥, 물, 간식 챙겨주고 화장실 치워주고, 궁디팡팡해주고 “내일 또 올게 집 잘보고 있어!”하고 병원으로 오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때 내가 현관문을 나설 때면 늘 “애들 잘 보살피고 있어!”라고 신신당부하던 녀석이 둘째이다. 수컷인데도 돌봄을 잘해서 분리불안 있는 3호도, 집사들의 애정보다 고양이의 애정을 더 좋아하는 막냉이도 잘 돌보던, 그래서 그 녀석들의 형이자 오빠이자 엄빠와도 같던 둘째. 누구보다 말귀를 잘 알아들어서, 듬직하고 예쁘고 착한 내 둘째 고양이. 그런 녀석이 지난 11일에 죽었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목요일이었고, 하루만 더 출근하면 주말이라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다락방이 그날 영어테스트 1등 했다고 글을 썼던가. 또 깐쭉거리는 댓글을 달고 웃고 있는데 집사2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회사에 있을 때 전화하는 일은 없는지라 이게 무슨 일이 났구나 싶어서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집사2가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꽁치가 숨을 안 쉬어!”한다. 처음에는 그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재활병원 갑갑하다고 퇴원 후 집에 있던 집사2가 혼자 움직이다가 넘어지기라도 했나 싶어서 덜컥 겁이 났다. 인공호흡하고 심폐소생술을 하는데도 숨을 안 쉰다는 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가방도 싸는 둥 마는 둥 택시를 타고 바로 집으로 달려가는데, 목요일 오후 2시 30분의 서울 시내 길이 그토록 막힐 줄이야. 집사2 성격상 애를 들쳐 엎고서라도 병원에 갈 거 같아서 그게 너무 걱정이었다. 안 돼 안 돼, 움직이면 안 돼. 꽁치야 제발 살아!!!!! 숨을 안 쉰다는 녀석보다도 집사2가 무리해서 움직일까봐 무서웠다. 길은 너무 막히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우리 집 가까이 사는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우리 집에 좀 가줄 수 있어? 꽁치가 숨을 안 쉰다는데.... **이가 움직이면 안 되는데....”
15분쯤 지났을까. 나는 아직도 꽉 막힌 도로 위, 택시이고 제발 살아라, 제발, 간절하기만 한데 집사2한테 전화가 왔다. “**이가 와서 지금 꽁치 병원에 데리고 갔어. 근데...... 죽은 거 같아.” “그래.... 나 그럼 병원으로 갈게.” 집에서 병원으로 목적지를 바꾸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병원 근처에서는 택시에서 내려서 뛰어가는 동안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서 진료대 위에 눕혀 있는 녀석을 보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동생이 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젓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의사와 간호사가 한숨을 푹 쉬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침에 내가 털 빗겨주면서 뽀뽀해주고 궁디팡팡 해준 녀석인데?! 오후 2시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녀석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녀석을 끌어안고 동생 차를 타고 나서야 펑펑 눈물이 났다. 이렇게 말랑하고 따뜻한데? 그냥 잠든 것만 같은데 왜 고개가 자꾸 떨어져? 어디 아픈 곳도 없었잖아! 너 이제 열두 살밖에 안 되었는데? 하필이면 왜 이 녀석을.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눕혀 놓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면서 내내 울었다. 자는 것만 같은데 배가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는다. 몸이 차다. 코를 골지 않는다. 잠든 얼굴에 부비부비를 해도 귀찮다고 찡얼대지를 않는다. 그 와중에도 집사2가 정신을 차리고 장례치를 곳을 알아봤다.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서울 시내에는 동물 화장터가 없단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나. 24시간 가능하니 지금 데리고 와도 된다는데 하룻밤은 집에 같이 있고 싶어서 다음 날 아침 10시로 장례 예약을 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코나 항문에서 분비물이 흐를 수 있으니 놀라지 마세요.”
정말 그랬다. 새벽이 올수록 둘째는 더 빳빳해지고 차가워지고 코에서도 분홍빛 콧물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둘째를 유독 좋아하던 3호는 둘째 상태가 아무래도 이상한지 그 앞에 가서 울고 집사들한테 와서 울고 밤새 내내 안절부절이다. 막내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막내는 바깥 생활을 오래 하면서 고양이들 죽음을 몇 번이고 마주한 적이 있는지 냄새를 맡아보고는 자기가 좋아하던 그 둘째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음을 인지한 것 같다. 그렇게 좋아하던 오빠를 먼 발치에서 쓸쓸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첫째는 한눈에 보기에도 우울한 상태이다.
한달 가까이 병원과 집 안에만 갇혀있던 집사2는 바깥바람이 쐬고 싶다고 얼마 전부터 노래를 불렀었다. 안 된다고 나는 계속 말렸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둘째를 보내러 파주까지 가야했으니까. 오랜만에 집사2가 운전대를 잡고, 나는 둘째를 안고 장례 치르러 가던 지난 금요일은 날씨가 참 좋았다. 바람 쐬고 싶다고 했더니 이렇게 또 바깥바람 쐬게 해주는구나. 너는 늘 그랬지. 사랑도 많고 따뜻하고 말랑하고 잔소리도 많고 고양이들 혼이라도 내면 달려와서 뭐라 뭐라 나를 혼쭐 내주던 녀석. 오래 살아서 기네스북에 오르자! 했던 녀석인데 고작 열두 해 우리 곁에 있다가, 그렇게 건강하던 녀석이 갑자기 떠났다. 아직도 너무 황망해서 믿기지 않는 둘째의 죽음. 내일이면 벌써 일주일이다. 정신을 차려보자고, 다른 고양이들 생각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참 그게 쉽지는 않구나. 나를 향했던 그 무한한 사랑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랑한다, 꽁치야.

정신 차리고 보니, 내 회사 컴 바탕화면이 둘째랑 3호이다.

그렇게 막냉이 마음을 홀딱 빼앗고 먼저 훌쩍 가버리면 막내는 어떡하니, 이놈아.

병원에서 낮에 씻으러 잠깐 집에 왔다 깜빡 잠들었을 때 폭풍 그루밍해주던 녀석. 이게 생전 마지막 사진이라니.........

꽁치야.. 사실, 난 아직 이 보자기를 풀 자신이 없어....
인생+고양이
장담하건대, 이 둘의 합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건 매우 슬픈 일입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건 나쁜 일을 당하거나,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결국엔 늙고 쇠락한다고 가정하는 것이죠. 하지만 ‘고양이를 잃어버린다’라는 표현은 절대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고양이를, 살아있는 생명체를, 하나의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하나의 생명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건 바로 죽음이에요
찾는 것, 잃는 것, 상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상실이란 단순히 자신이 짐작하지도 못했던 기대를 막 충족했던 그 관대한 순간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한 순간과 상실 사이에 항상 무언가가 있는데, 조금 어설프긴 하지만 그걸 소유라고 칭해야 하겠군요.
그런데 상실이 아무리 잔인한 것이라 해도, 상실은 소유에 대항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상실은 소유의 끝입니다. 상실은 소유를 확인해줍니다. 결국 상실이란 두 번째 소유일 뿐이며, 그 두 번째 소유는 아주 내적인 것이며, 첫 번째와는 다른 식으로 강렬합니다.
그러고 보니 발튀스, 너도 그 점을 느꼈니? 더는 미츄를 볼 수 없겠지만, 너는 미츄를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말이야.
미츄는 아직 살아 있을까? 고양이는 네 안에 계속 살아 있지. 그 작고 태평한 고양이의 쾌활함은 너를 즐겁게 해주고 또 네게 의무감을 주었단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미츄>, pp.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