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인생의 친척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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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죽음 뒤 부부의 태도가 확연히 다른 점이 흥미롭다. 남편은 자학/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데 비해 ‘마리에‘는 그 고통을 짊어지고 말 그대로 ‘성녀‘가 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묘사 모두 불편하다. 모성의 신화는 이렇게 재생산되는가? 오에의 작품이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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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성정치 - 여혐 문화와 남성성 신화를 넘어 페미니즘 - 채식주의 비판 이론을 향해 이매진 컨텍스트 68
캐럴 J. 아담스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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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감동으로 북받치게 하고, 또 어떤 책은 앎과 깨달음으로 전율이 일게 한다. <육식의 성정치>는 후자에 속한다.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은 책이기에 마음대로 밑줄은 긋지 못하고 따로 메모해두고 싶은 구절이 나올 때마다 포스트잇을 붙였다. 다 읽고 나서 보니 책 전체에 포스트잇이 빼곡하게 붙어 있더라. 그런 책은 참 오랜만이었다. 집에 한 권 사두고 틈틈이 다시 읽어도 좋을, 아니, 그래야만 하는 책이다. 알라딘 별점 평가에서는 별 다섯 개까지만 가능한데, 솔직히 열 개를 줘도 아깝지 않을 그런 책이랄까.

‘육식의 성정치’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으리라. 어떤 이는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육식에도 성정치가 있을 수 있지, 페미니스트 중에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이런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육식의 성정치’라고 하니, 할아버지나 아버지, 또는 아들 등 집안의 남자 구성원들 식탁에는 고기가 올라가고(그렇지 않더라도 생선이나 달걀 등 고기를 대체할만한 단백질 식품), 여성 구성원들의 밥상에는 그런 음식은커녕 풀 잔치(채소)만 벌어지는 광경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녀 구분 없이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오늘날에도 고기 같은 음식은 남성 구성원 위주로, ‘그’에게 ‘먼저’ 주어지는 상황을 떠올릴 수도 있다. 요즘 어떤 집이 그러느냐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겠으나, 가족 중 남자 구성원 없이 엄마와 딸 둘만 밥을 먹을 때 식탁이 어떻게 차려지는지 관찰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식의 성정치>에서 이야기하는 ‘성정치’ 사례 중 이런 예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속한다. 이 책은 ‘성정치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구조화되는 방식이 우리가 동물, 특히 소비하는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연관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가부장제는 인간과 동물 관계 속에 내재된 젠더 체계이다. 이 젠더 구조는 성별에 따라 알맞은 음식을 교육하는 교육 체계도 포함된다. 앞서 말했듯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식탁에는 고기가 올라가고, 여자들의 식탁은 채소만으로 채워져도 된다는 생각 등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것은 특권의 문제가 아니라 상징의 문제로, 남성다움은 육식에 접근할 권리와 타자의 신체에 대한 통제를 통해 우리 문화 곳곳에 스며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성들은 남편에게 고기를 내놓아야 한다고 믿음으로써, 남자란 강해지려면 고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저녁 식탁에 뭘 놓을지도 남성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육식의 성정치를 영속화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여성에게 육식은 배우자의 욕구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자기 부정의 또 다른 수단이 된다. 

한 집안에서만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고기는 늘 권력을 쥔 자가 먹었다. 유럽의 귀족 사회는 온갖 고기로 가득찬 음식을 소비한 반면 노동자들은 탄수화물을 먹었다. 이 책에 따르면 식습관은 계급구분을 명확히 해주며 가부장제에 기초한 구분도 확실히 한다. ‘2류 시민’인 여성이 먹는 음식, 그러니까 채소, 과일 곡식 등은 가부장제 문화에서 2류 식품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육식에서 드러나는 성차별은 형식은 다르지만 계급 차별로 되풀이된다. 고기는 남자의 음식이고, 육식은 남성적 행동이라는 신화가 모든 계급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줄곧 듣는 옛날이야기에서 음식과 성역할의 상관관계를 흔히 접한다. 옛날이야기 속에 곧잘 등장하는 식인 풍습은 대개 남성이 하는 행위다. 모든 나라의 구전 이야기를 살펴보면, 거인은 남자이자,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에 비해 여성은 주로 ‘제물’로 바쳐진다. 마치 제사상에 올리는 고기처럼 말이다. 고기가 남성의 특권이라는 점은 성서에도 나온다. 게다가 거의 모든 문화마다 금기시되는 음식은 대부분 고기와 관련이 있고, 이런 제약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많다. 전근대 문화에서 여성에게 고기를 금지하는 관습은 고기의 위상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 여성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경우는 남편이 조금 남겨줄 때뿐이다. 고기 분배 체계가 남성의 사회적 위상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가부장제 관습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아시아의 몇몇 문화에서는 여성에게 생선, 해산물, 닭고기, 오리고기, 달걀 등을 먹지 못하게 한다. 반면 채소 또는 고기 아닌 음식은 여성만 먹는 음식으로 여겨진다.

‘고기는 왕’이다. 고기를 지칭하는 왕이라는 명사는 남성 권력을 지시한다. 육식인들이 고기가 아닌 다른 모든 음식을 지칭하는 데 쓰는 단어인 채소는 고기가 남성에 연관되듯 여성에 연관된다. 남성이 지배하는 육식 세계에 여성이 종속돼 있기 때문에 여성이 먹는 음식도 남성 지배에 종속된다. ‘2류 시민’인 여성의 음식은 열등한 단백질로 여겨진다. 고기가 간접적으로는 채소이고(인간이 먹는 고기의 근간은 풀을 뜯어먹는 초식 동물이다)이고 채소가 고기보다 평균적으로 두 배나 더 많은 비타민과 미네랄을 공급하는데도 여성은 자립적이지 못하다고 여겨지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소가 그것 자체로 식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기는 강력하고 둘도 없는 음식으로 추앙받는다. 여기에 담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노예인 채소는 자기가 타고난 운명에 만족해야 하고, 왕인 고기의 자리를 탐내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의미에서 ‘육식의 성정치’란 ‘여성을 동물화하고, 동물을 성애화하고 여성화하는 태도이자 행동’을 말한다. 여성을 동물화하고 동물을 성애화한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이 지구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육식의 성정치에 영향을 받는다. 시카고의 한 레스토랑에서 ‘더블 디 컵 칠면조 가슴살 샌드위치. 이 샌드위치는 성인용입니다.’는 문구가 달린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올빼미 눈을 로고로 하는 레스토랑 체인점 후터스에서 밥을 먹을 수도 있다. 이 레스토랑 메뉴에는 ‘유방’의 속어인 ‘후터스’라는 이름의 연원이 자세히 적혀 있다. 또 ‘우르술라 햄드레스(Ursula Hamdress)’의 그림을 보면 여성의 동물화와 동물의 성애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런 예는 겉보기에는 동물을 대상으로 삼지만, 그 지시가 가리키는 진짜 대상은 다름 아닌 여성이다.


'우르술라 햄드레스(Ursula Hamdress)'



<육식의 성정치> 구판 표지로 쓰여던 이미지로 알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비단 저 먼(?)나라에서 예를 들 것도 없다. 얼마 전 이 땅에서도 한 찜닭 업체가 상호와 음식 이름에 ‘계집애’라는 단어를 넣어 여성혐오 논란에 휩싸였다. 이 식당은 주로 배달 전문 앱을 이용해 음식을 판매했는데, 상호와 메뉴에 ‘계집애’라는 말을 넣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 이 식당 메뉴 중 매운 찜닭은 ‘화끈한 계집애’, 닭 반 마리 찜닭은 ‘반반한 계집애’라고 이름 붙였다. 사장은 손님의 리뷰에 “계집애는 원하는 거 다 해드림”이라는 글을 덧붙이기도 했으며, 메뉴를 본 손님들은 “반반한 계집애로 가져다주세요.”라고 주문하기도 했단다. 논란이 커지자 이 업체 사장은 억울하다면서(!) “이게 강간을 의미하고 여성을 비하한다는 반응은 좀 과한 것 같다. 닭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닭 계(鷄)를 붙여서 계집애라는 표현을 썼다”고 했단다.




문제가 되었던 '계집애' 메뉴판과 상호



이 책에 따르면 육식의 성정치를 통한 이런 이미지 소비는, 이 이미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여성의 대상화에 관해 공공연히 농담을 주고받는 문화의 한 방식이다. 이 방식은 남성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여성혐오로 전환될 수 있다. 또한 여성의 지위 하락은 하나의 입심거리나 해롭지 않은 ‘순전한’ 농담의 소재로 여겨지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여성의 지위 하락을 거리낌 없이 즐길거리로 삼을 수 있게 된다. “돼지를 보고 있을 뿐이야” “샌드위치일 뿐이야” “후터스에서 밥 먹을 뿐인데” 등등. 저 찜닭짐 사장의 말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닭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썼을 뿐이야. 여기서 강간을 본다니, 농담도 이해 못해? 너희들이 지나쳐.”

이와 비슷한 사례로 <치킨의 50가지 그림자 Fifty Shades of Chicken>라는 음식 책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묻어가는 책일 뿐이지만, 또 다른 진실을 드러낸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서 ‘죽은 닭’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여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이고 죽은 닭을 묶고, 꿰고, 조리하는 셰프는 곧 아나스타샤 스틸의 연인이라는 진실을 보여준다. 조리사는 단순한 남자가 아니라 인간이고, 소비되는 대상은 단지 여자가 아니라 동물이다. 그러므로 이런 패러디는 남성-여성이라는 젠더 이원론이 인간-동물 이원론과 지배-종속 이원론하고 교차하는 방식을 상기시킨다. 때문에 ‘섹시하다’와 ‘맛있다’는 둘 다 불평등하다. 한편, 성폭력과 육식은 서로 별개의 폭력 형태로 드러나지만 성폭력 문화의 이미지들과 현실에서 자행되는 성폭력은 종종 동물이 어떻게 인간에게 도살되고 먹히는지에 관련된 우리의 앎에 의존한다. 변태적 성행위 도구인 체인, 소몰이 막대, 올가미, 개 목걸이, 로프 등은 동물을 대상을 한 통제를 암시한다. 여성이 폭력의 희생자라고 할 때 이런 도구들은 여성이 동물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동물과 여성은 비슷한 운명을 겪고 있다. 명명의 권력을 이용해 여성과 동물에게 가해지는 중첩된 억압은 타락의 책임을 물어 뱀과 여성이 동시에 비난받는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성과 동물은 경우에 따라서 선 또는 악, 선의 화신 또는 악의 화신, 마리아 또는 이브, 반려 동물 또는 짐승, 귀여운 짐승들 또는 더러운 짐승들로 상징된다. ‘기혼 여성(femme covert)’과 ‘가축(beste covert)’이 법률적으로 같은 범주에 속하며 여성 생식 체제에 연관된 이름들은 일종의 모욕이 된다. 암소(cow 살찌고 주책맞은 여자), 돼지(pig 불결한 여자), 암퇘지(sow 추녀), 암탉(hen 수다쟁이 여자), 병아리(old biddy 말 많은 노파), 암캐(bitch 화냥년) 등이 모두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이런 단어들은 재생산에 관련된 선택을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여성에게서 유래한다. 우리나라 속담에서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거나 ‘계집이 늙으면 여우가 된다’ 등은 물론 ‘여우같다’ ‘꼬리친다’ 등등 동물과 여성을 동일시하면서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말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육식의 성정치>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여성화된 단백질’이라는 개념이다. ‘여성화된 단백질’이란 동물 암컷이 재생산 과정에서 당하는 착취를 표현하는 특수 개념으로, 이를 테면 우유와 달걀은 암컷의 몸에서만 생산된다. 대부분의 식용동물은 다 자란 암컷이나 어린 동물이다. 동물 암컷은 살아 있을 때는 물론 죽어서도 이중으로 착취당한다. 동물 암컷은 자기의 여성성 때문에 억압당하고 대리 유모가 되는 것이다. 재생산 능력이 퇴화화면 도살돼 동물성 단백질 또는 살코기 형태의 단백질로 바뀐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고기를 남성 지배의 상징이자 이 지배를 찬양하는 도구로 이용되게 했을까? <육식의 성정치>는 젠더 불평등이 육식이 선포하는 종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 가지 이유를 찾는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고기를 수중에 넣은 쪽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고기는 가치 있는 경제 상품이고, 이 상품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획득했다. 남자들이 여성보다 훌륭한 사냥꾼이기 때문에 이 경제적 재화를 통제하는 일도 남자들의 손안에 들어갔다.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고기가 차지하는 사회적 비중하고 반비례 관계에 있었다. 고기 단백질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이런 위계관계의 설정은 인종, 계급, 성의 위계를 강제한다.

<육식의 성정치>는 여성과 동물이 가부장제 세계에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깨달음, 곧 그 둘 모두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가부장제와 착취는 동의어이고, 채식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 문화가 여성을 부재하는 존재로 만들 뿐 아니라 동물을 부재하는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채식주의가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한 형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은 묻는다. ‘가부장제 권력의 상징을 먹으면서 어떻게 그 권력을 전복할 수 있을까?’라고. 그리고 가부장제 소비문화를 뒤흔들려면 가부장제 육식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과 폭력에 기초한 이런 문화를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육식주의의 폭력성과 대상화에 맞선 도전을 촉구한다. 때문에 이 책에서 인용한 이사도라 던컨의 말은 책을 덮고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우리 몸 자체가 살해된 동물의 살아 있는 무덤이면서, 어떻게 이 지구상에 안녕이 오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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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5-2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찜닭 메뉴 이름들 진심으로 역겨워요. 우웩!!!! 저걸 농담으로 생각하고 하하호호 하는 사람과 정말 상종도 하기 싫네요.

잠자냥 2019-05-21 11:00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올린 이미지들이 제가 보기에도 모두 혐오스러워서 다른 분들께 정신적 해를 끼칠 듯해서 염려스러웠어요. 알라딘 블로그 기능 중에 ‘more/less(접기/펼치기)‘ 기능이 있었다면 그걸 썼을 텐데 여기엔 그런 기능이 없어서 그냥 이미지를 노출하고 말았습니다... ㅠ_ㅠ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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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한 개그, 쿨함, 삐딱한 태도, 블랙유머 등 뭔가 그 나이대 교수들과는 조금 다른 척 가장하고 있지만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꼰대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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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5-2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라디오에 나온 걸 한번 들어서 책이 어떨지 궁금했는데.. 역시 별로군요. (소개글에서 책속 발췌한 글 보니 별로일 거 같긴 했습니다 ㅋ)

잠자냥 2019-05-20 10:27   좋아요 1 | URL
하하하. 이분 글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이분을 널리 알려지게 한 그 ‘추석이란 무엇인가‘ 그 글은 좀 신선한(?) 작법이 눈에 띄긴 했으나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거든요.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칭송(?) 해서 한 번 읽어봤는데, ‘추석이란 무엇인가‘ 투의 글이 계속 반복되니까... 질린다고나 할까... 썰렁한 개그 그것도 좀 읽다 보니 억지스럽고. 공감보다는 ‘지적질‘ ‘꼰대질‘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 글이 많아서 저는 그냥 그랬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분 책을 또 읽을 것 같지는 않아요. ㅎㅎ
 
육식의 성정치 - 여혐 문화와 남성성 신화를 넘어 페미니즘 - 채식주의 비판 이론을 향해 이매진 컨텍스트 68
캐럴 J. 아담스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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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하다’와 ‘맛있다’는 왜 둘 다 불평등할까? 깨달음과 앎으로 전율이 일어나는 책. 가부장제는 ‘인간/동물 관계 속에 내재돼 있는 젠더체계’이자 ‘착취’와 동의어이다. 고기가 어떻게 남성지배의 상징인지, 또 한편으로는 여성권리의 박탈을 뜻하는지 놀라울 정도로 치열하게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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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 아니 치나스키가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랐지만 결국 위대한 작가가 된 ‘찰스 부코스키’와 그의 분신 ‘헨리 치나스키’- 술과 담배, 경마, 여자와 섹스, 그리고 책과 타자기만 있으면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던 이 남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공해서 할리우드에 시나리오 작가로 입성한다. 세상 잣대로만 보자면 ‘루저 중의 루저’,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던 그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남들이 모두 탐내는 할리우드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한 것이다. 치나스키는 그 성공을 마음껏 누리면서 할리우드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경마장에서 도박을 하고, 여자들에 둘러싸여서 인생을 즐길까? 아무렴, 할리우드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기대를 갖고 이 책을 펼쳤다면 당신은 부코스키를 모르거나 치나스키를 아직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리라.

<할리우드>에서는 늙은, 그런데 어쩌다 보니 성공한 치나스키가 등장한다. 예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 있다면 고양이 다섯 마리를키우며 돌보는 가정적(?)인 면모와 더 이상 여러 여자를 전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랄까? 집으로 찾아오는 여자들 숫자는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제 한 여자에게 정착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글을 쓰는 치나스키는 시와 단편, 장편을 벗어나서 시나리오까지 손대고 있다. 물론 그가 원해서는 아니었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 달려와서 시나리오를 써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를 요청할 정도로 성공한 작가 치나스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회계사의 조언을 따라서 검은 BMW 한 대를 사려고 하지만 어쩐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그는 타자기 한 대와 술만 있으면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품에는 치나스키보다, 아니 그에 못지않게 독특하고 못 말리는 캐릭터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영화사업에 종사하는 감독, 제작자, 배우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벌이는 행태에 치나스키는 자기도 모르게 ‘내 과거의 삶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비하면 그렇게 이상하지도, 거칠지도, 미친 것 같지도 않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할리우드>는 재미있다. 처음부터 큭큭 웃게 된다. 그런데 부코스키의 다른 작품들이 대개 그렇듯이 읽다 보면 종종 드러나는 삶을 꿰뚫어보는 그의 시선에 공감하고 감탄하게 된다. ‘아는 방법이라고는 타자치는 것뿐’이라는 치나스키- 그는 자신이 아주 형편없는 시나리오를 쓸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의 작품을 모두 읽었다는 감독이나 제작자, 몇몇 배우들은 자꾸만 그를 부추긴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과거지. 글쓰기 직업에서는 그 어떤 일에서보다도 한물가는 경우가 더 많아.”(91쪽). 더욱이 그가 생각하기에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궁극적으로 어리석은 짓 같다. 치나스키는 ‘영화 잡지나, 영화에 관심 있는 잡지가 그렇게 많은 줄 미처 깨닫지 못했고, 그가 보기에 그것은 질병’이었다. ‘사람들은 영화에서 쓰레기를 보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그게 쓰레기라는 것도 이제는 깨닫지’ 못한다. 영화 산업에 비판적이던 그이기에 어떤 시나리오를 쓸까 고민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 술 마시는 남자에 관한 시나리오를 써내려간다.


나는 글을 쓰고 술을 마시고 싶어 하지만 오로지 술병하고만 성공하는 젊은 남자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젊은 남자는 과거의 나였다. 그 시절이 불행했던 때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공허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타자를 쳐 나가자, 어떤 술집의 인물들이 내게로 돌아왔다. (<할리우드>, 113쪽)


실제로 <할리우드>는 부코스키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던 영화「술고래Barfly」(1987)의 탄생을 다룬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부코스키가 그때 만났던 영화감독, 제작자, 배우들의 면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시나리오 쓰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차례 이런저런 이유로 제작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기를 반복한다. 제작비를 지원해주겠다던 이들이 갑자기 발을 빼거나, 애초에 물망에 오른 배우가 다른 배우로 바뀌거나 등등 온갖 문제에 부딪히면서 영화의 앞날은 암담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물론「술고래Barfly」가 만들어진 것은 알고 있기에 영화가 완성되느냐 마느냐 그 사실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영화 제작 과정에서 만나는 할리우드, 그 화려한 무대 이면에서 펼쳐지는 기이하고 속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치나스키의 시선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치나스키는 스스로 인간 혐오자라고 말한다. ‘종종, 선하건 악하건 간에 인간과 함께 있으면 나의 감각들은 그저 뚝 꺼진다. 피곤해지고 나는 포기한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술을 더 마신다. 그에게 “술은 은신처이자 자살의 느린 형태”(254쪽)이다.

그러나 이 인간 혐오자가 실은 인간을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에게 연민어린 시선을 지니고 있음을 <할리우드>를 읽다 보면 깨닫게 된다. 뒤통수를 친 투자자에게 무려 전기톱을 들고 달려가는 감독 팽쇼나 게토에 살면서 닭을 지키는 데만 골몰하는 반쯤 정신이 나간 배우 프랑수아 등 자신만큼 기이한 인물들에게 그는 세상의 일반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런 이들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그들과 친구가 된다. 인간을 대할 때 이만큼 예의와 애정을 갖춘 태도가 또 있을까. 더욱이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나는 삶에 관해 썼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경탄하는 것은 그 삶을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용기였다. 그것 때문에 나는 계속 나아갔다.’ (308쪽). 이 구절은 치나스키가, 아니 부코스키가 언제나 작품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해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비루한 인간 군상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용기임을, 한없이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여자들>로 찰스 부코스키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내가 그의 작품을 기다리게 되고, 나오는 족족 읽게 될 줄은 몰랐다. 부코스키와 그의 분신 치나스키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는 위선에 사로잡히지도 않으며 허영을 떨지도 않는다. ‘무언가 된다는 생각은 소름 끼칠 뿐만 아니라 구역질까지 났다. 변호사나 지방 의원, 기술자나 뭐 그런 게 된다는 생각은 얼토당토않아 보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가족 구조의 덫에 갇히고, 매일 어디론가 일하러 나가고 얼토당토않았다. 단순한 일이라도 뭔가 한다는 것, 각종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 가족 소풍이나, 크리스마스, 독립 기념일, 노동절, 어머니날… 인간은 이런 것들을 견디기 위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인가?’(<호밀빵햄 샌드위치>, 275쪽)  ‘쓸모없는 인간’이 되기를 바랐던, ‘그저 아무것도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위대하고’ ‘훌륭하고’ ‘쓸모 있는’ 것들을 향한 역겨움을 쏟아내는 이 안티 히어로. 헨리 치나스키- 그는 모든 이들의 부와 성공의 상징으로 여기는 할리우드에 가서도 좌충우돌하지만 끝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다. 

물론 부코스키 이전에도 성장이나 진보에 의문을 제기한 작가나 작품들은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작품에 쏟아 부은 작가의 생각과 실제 삶이 일치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작품으로는 성장이나 발전, 진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실생활은 윤택하기 그지없어서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귀족 출신이거나 부유한 집 자식이거나 물려받은 유산이 많거나 등등 고등유민 작가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이 작품 속에서 아무리 그런 주장을 하더라도 실생활이 부유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어쩐지 배신감이 느껴지거나 공허한 말장난, 헛소리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부코스키는 삶과 작품이 거의 일치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가 자신의 분신인 ‘헨리 치나스키’를 통해 ‘무엇인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니 ‘되어야만 하는’ 인간 존재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기를 들었을 때, 그 의문은  진실이자 진심으로 다가온다. 때문에 그 울림도 감동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치나스키를, 부코스키를 기다렸던 것 같다.

안티 히어로 치나스키의 탄생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호밀빵햄 샌드위치>는 치나스키의 성장담이다. 소년 헨리 치나스키는 빈민가, 가난한 집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고, 한없이 약하기만 한 어머니를 연민하며 자란다. 학교에서도 마음을 둘 만한 친구를 만나기는커녕 이방인처럼 계속 겉돌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가지도 않은 대통령 연설 장면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지어낸 글이 선생님의 인정을 받는다. ‘독창적’이라면서. 거기에 또 우연히 친구 따라 마신 와인 맛에 빠지면서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지역 도서관에서 ‘책’을 만나게 된다. D.H.로렌스, 셔우드 앤더슨, 헤밍웨이, 헉슬리,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고리키 등등. ‘불 꺼!’ 고함치는 아버지 몰래 이불 밑에서 과열된 독서등을 켜고 책을 읽으며 헨리 치나스키는 점점 ‘마법’의 세계로 빠져든다. 숨을 만한 공간에서 술과 책과 함께 사람들과 떨어져서 홀로 있을 때 가장 평온해 하는 ‘헨리 치나스키’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헨리는 그 작고 누추한 공간에서 담배와 술, 책과 문학과 함께 성장하고 늙어간다. 어떤 사람들에게, 아니 이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이른바 ‘정상적인 삶을 사는’ 이들의 눈에 치나스키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술꾼, 주정뱅이, 룸펜, 한량, 실패자, 루저일지도 모른다. ‘쯧쯧 왜 저러고 사냐’ 손가락질 하며 동정할 만한 대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루저 치나스키가 안티-’히어로’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가 ‘독립된 개체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우체국에서 일을 하게 될지언정 적어도 그러한 의식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 안티 히어로 치나스키의 웃기고도 슬프고, 쓸쓸하면서도 외롭고 어쩐지 뭉클한 성장담이 <호밀빵 햄 샌드위치>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른이 된 치나스키는 어떻게 살까? <우체국>은 그가 어쩔 수 없이 우체국에서 일한 10여 년 동안의 기록이다. “자기, 그건 초등학생 같은 생각이야. 어떤 바보 멍청이라도 구걸하면 일은 얻을 수 있어. 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거지.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요령 있다고 하지. 나는 요령 있는 훌륭한 백수가 되고 싶어.” (<우체국>, 77쪽)라고 말하는 치나스키는 일하지 않고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함께 사는 여자들의 요구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우체국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치나스키는 일터에서 생지옥을 경험한다. 이 작품은 치나스키를 앞세운 부코스키의 작품이 거의 그렇듯이 그의 자전적 소설이나 마찬가지다. 부코스키가 우체국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는 30~40대 시절 10여 년 동안 우체국에서 집배원으로 일했다. 우체국 시절 간간이 단편을 발표했던 그에게 출판사 측이 ‘글쓰기에 전념하면 매달 100달러를 주겠다.’ 제안했고 부코스키는 ‘우체국에서 미쳐 가느니 작가가 돼 굶기로 결심했다’며 전업 작가로 돌아선다.

그의 그 미쳐버릴 것 같은 경험이 <우체국>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치나스키는 우체국에서 10년 넘게 일하면서 서서히 망가져간다. 물론 사회적 잣대로 보기에 그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우체국은 아예 그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우체국에서 그는 노동하는 기계일 뿐이며, 종일 감시받다 언제든지 버림받을 존재다. 노동이 과연 신성한가? <우체국>은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조직 생활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의 쓸모없음을 고발한다. 우체국이라는 획일적이고 위계질서로 짓눌린 공간을 통해 부코스키는 노동하는 인간, 노예처럼 사는 인간의 삶을 조롱한다. 나는 <우체국> 때부터 부코스키를 꽤 좋아하게 됐다.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다 좀 봐.” 나는 말했다. “저기서 철썩이며 올라왔다 내려가는 것 좀 봐. 그 밑에는 물고기들, 불쌍한 물고기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 잡아먹지. 우리도 그 물고기들과 같아. 단지 뭍에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 발을 잘못 디디면 끝장이야. 챔피언이 되는 게 좋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알아 두는 게 좋다고.” (<우체국>, 176쪽)


<여자들>에서 치나스키는 우체국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우체국>의 치나스키가 30대라면 <여자들>의 치나스키는 50을 훌쩍 넘었고, 작가로서 어느 정도 밥벌이를 하고 살 정도가 되었다. 아주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팬도 상당하고 시를 쓰는 치나스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낭독회를 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고 그렇게 받은 돈으로 치나스키는 집세도 내고 좋아하는 술도 마음껏 사마시면서 살 수 있을 정도다. 이 작품은 부코스키의 분신인 치나스키가 여자들을 만나고 그녀들과 끊임없이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책 표지를 다 올려놓고 보니, <할리우드> 표지도 부코스키 얼굴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이제부터 부코스키 작품을, 치나스키의 일생(?)을 순서대로 읽어나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호밀빵>부터 시작해서 <우체국>, <여자들>, <할리우드> 순으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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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5-15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분의 ‘여자들‘ 이라는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무심코 펼쳐봤다가 그 안의 단어들 때문에 너무 깜짝 놀라서 바로 덮어버렸던 기억이 있답니다. ; 지금 생각해도 남사스러워 죽겠네요. ㅋ ˝작품으로는 성장이나 발전, 진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실생활은 윤택하기 그지없어서 먹고사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귀족 출신이거나 부유한 집 자식이거나 물려받은 유산이 많거나 등등 고등유민 작가들이 많았다.˝ 이 부분 읽으니 별안간 톨스토이가 떠오릅니다.ㅋㅋㅋ

잠자냥 2019-05-15 15:39   좋아요 2 | URL
처음부터 너무 쎈(?)걸 집어들었군요! 저는 <호밀빵 햄 샌드위치>하고 <우체국> 순으로 좋았어요. 케이 님에게도 두 작품은 한번 꼭 읽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네요. <여자들>과 <할리우드>는 그 두 작품에 비하면 그냥저냥? ㅎㅎ <호밀빵 햄 샌드위치>라도 꼭 읽어보세요.

고등유민 작가의 대표적 케이스가 톨스토이지요. 그리고 뭐... 그 무렵 귀족 출신 작가들 중에 꽤 많은 듯해요. 부코스키가 그런 이들하고 동시대를 살았다면 틀림없이 피해다녔을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19-05-1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은 정말 너무 센거같아 읽을 마음이 없었는데 호밀빵은 읽어보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2019-05-16 09:41   좋아요 1 | URL
하하. <호밀빵>은 전혀 세지 않습니다. 제 친구 가운데 제가 부코스키 책 주구장창 읽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던 친구도 <호밀빵>만큼은 매우 좋았다고 인정했었지요. 다른 건 몰라도 <호밀빵>은 꼭 읽어보세요. 부코스키 그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하고, 부코스키를 처음 만나는 독자에겐 <호밀빵>이 가장 좋은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