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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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혐오>를 읽고 난 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코로나 시대 이후로 나는 이 지구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이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거기에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이 지구에 ‘혐오’를 양산하는 존재라고. 이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혐오라니? 내가? 난 아니야 절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나부터 돌아보자면, 나 자신도 ‘혐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다. 소수자나 여성, 어린이, 장애인 등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지극히 당연히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도 특정 대상에 혐오는 존재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코로나 이후 특정 종교에 대한 혐오가 생겼다(8.15 집회 이후). 그 집회에 참석했던, 번번이 이름만 바꾸는 특정 정당에 대한 혐오도 있다. 그리고 매번 마스크 시비로 난동을 부리거나 마스크 쓰라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오륙남’에 대한 혐오도 생겼다. 이런 내 마음속 은밀한 혐오를 일기장이 아닌 곳에 글로 남긴다는 것이 부끄럽기는 하다. 그럼에도 <문명과 혐오>의 저자 ‘데릭 젠슨’이 세계의 차별과 혐오 문화에 대해서 이보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자기 생각을 적나라하게(때로는 포르노를 본 후 여성에게 느끼는 생각까지) 밝히고 있기에, 나 또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려면 진실로 솔직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정 집단이나 대상에게 ‘혐오’를 갖고 있다고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렇지만 잘 돌아보면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에서는 ‘혐오 발언’이 아무렇지 않게 유통되고, 그것이 혐오라고 지적하면 도리어 ‘표현의 자유’ 및 ‘역차별’을 운운하는 기이한 현상까지 쉽게 볼 수 있다. 차별과 혐오가 일상에 공기처럼 퍼져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문명과 혐오>의 저자는 인류 문명 자체가 파괴와 착취, 혐오를 바탕으로 성장했음을 수많은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분석한다. 아니, 인류가 혐오를 기반으로 성장했다고? 문명이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그게 무슨 과대망상이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나 또한 혐오 집단은 인종 차별이나 소수자 혐오, 성차별을 일삼는 특정 집단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마음속에 작은 혐오를 지니고 살지만, ‘세련되게’ ‘교묘히’ ‘잘’ 감추는 법을 알고 있어서, 그걸 숨기고 살아간다. 그러나 저자는 ‘가장 덜 세련된 사람들만이 혐오를 그대로’ 드러낼 뿐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자기이익, 전통, 경제, 옛날 종교’와 자신의 혐오를 뒤섞어버린다고 지적한다. 잘 알다시피, 나치조차 자신들의 미덕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어떤 형태의 혐오는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지, 안 보이는 형태의 혐오는 얼마나 많은지 질문한다. 혐오집단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일베’나 저 미국의 ‘KKK’ 같은 단체 떠올리기 쉬운데, 그렇게 드러내놓은 혐오집단보다, 아니 그에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혐오의 위험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혐오를 양산하고 있다는 말은 문명의 원동력이 된 경제 성장 자체가 혐오와 착취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석, 강철, 설탕, 석유, 초콜릿, 담배 등등 인류가 탐을 냈던 거의 모든 자원은 노예 노동이 빚어낸 상품들이다. 꼭 노예 노동이 아니더라도, 그런 자원이 생산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의 원주민 삶의 터전을 짓밟고, 착취한 결과물이다. 다국적 대기업들이 이윤을 추구하면서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잔학행위들은 지금도 사람들의 눈을 가린 채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그 상품을 소비하고, 생산하는 데 일정 역할을 하고 있다. 노예 노동 상품들이 너무나 부드럽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전 지구적 경제 체제에서 살고 있고, 이제 노예제는 그 어느 때보다 지구화’된 것이다. 데릭 젠슨은 혐오라는 이름보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잔학행위가 벌어지는 사회, 생명에 대한 혐오, 멸시, 무시가 우리 경제의 단단한 기초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 문명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다.

저자의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먹고 살지도 말란 말인가? 어떤 물건을 소비하고 그 물건을 생산하는 데 노동자로서 일조하는 일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게다가 그게 어떻게 혐오로 이어지느냐고, 지나친 일반화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예컨대 ‘큰 석유회사에서 일하는 개인들 각각은 혐오 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을 거야. 단지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것뿐이지.’라고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에 대해서도 단호하다. 그렇게 하다보면 스스로 끔찍한 잔학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라고. 그에 따르면 기업과 혐오 집단은 사촌간이다. 같은 문화적 요구에서 나온 다른 형태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의 주체성을 빼앗는 것,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사물로, 객체로 바꾸는 것이 목표이다. 기업들은 폐허를 만드는 자들로, 그들이 손만 대면 무엇이나 돈으로 바뀐다. 숲, 바다, 산, 강, 사람 등 생명체를 죽은 것, 즉 돈으로 바꾸어놓는 그들의 역할은 문화적으로 정당화되고 지지받고 보호받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하게 된다.

자본과 성장을 앞세운 사회는 경쟁을 부추기고, 그것은 다시 분노와 혐오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닌 ‘대상’이 된다. ‘혐오는 타자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사물로 본다. 타자가 아예 안 보일 수도 있다.’ 경쟁이 정당화 되고, 경쟁을 통해 더 많은 부를 소유하는 것, 즉, ‘소유욕이 강한 사람들이 존경받는 문화’, 즉 전체를 희생하고서라도 개인이 이익을 보는 행동이 보상받는 문화라면 그 문화는 전쟁을 좋아하고, 여자와 어린이를 학대하며, 경쟁이 심하며 개인들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데릭 젠슨은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미국 사회의 예를 드는데, 멀리 가지 않고도 지금 혐오로 물든 이 땅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쟁이 일상화 되고, 그 경쟁을 통해 무언가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특히 돈) 존경으로 이어지는 사회, 권력을 쥔 자들이 그 권력을 키우기 위한 목표를 정하고, 나머지들은 하나같이 그 권력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몰두하는 사회. 바로 지금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가?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10대와 20대들이 여성을 성적 착취의 도구로만 보고 ‘노예’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붙여서 소비한 N번방과, 그 비슷한 방들, 날마다 일어나는 디지털 성범죄, 성범죄……. 이 모든 일들은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혐오를 양산하고 오히려 부추기는 사회가 낳은 끔찍한 결과이다.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중산층에서 떨어져 나가서 예전에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을 때, 전에는 당연히 누릴 수 있다고 여겼던 자원을 가질 수 없게 될 때’ 불안해지고 혐오를 저지르기 쉽다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 폐지 이후 린치 횟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노예제가 폐지되기 전, 노예주들이 노예의 목숨과 노동에 무제한적인 권한을 가졌던 때에는 노예주가 노예를 혐오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자기보다 ‘낮은 존재’로 내려다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가 이와 같은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예전의 얕잡아보던 느낌이 ‘혐오’로 바뀐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대대적인 폭력 행위로 드러난다. 이렇게 겁을 주는 행동은 자신이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원 또는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건 가질 수 없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경기가 나쁘거나 경제가 몰락하는 시기에 혐오 행위가 늘어나는데, 현재 우리나라도 자기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특정 세대와 성별을 중심으로 혐오가 당연하듯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누군가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는 타인을 대상, 사물로 인식하고자 하는 욕구와 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만일 자신이 혐오하는 존재가 ‘대상’이 아니라, ‘사물’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생명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인류는 혐오를 멈출 수 있다. ‘당신이 타인들을 물건으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대로 대우하고 인식하는 것이 당신한테도 가장 이롭다고’ 느낀다면 인류는 혐오를 걷어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N번방에 있는 여성들이 자기의 ‘노예’가 아니라 나와 똑같이 수치심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며, 모멸감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많은 남자들이 그 방에 들어가서 여성을 ‘소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그 대상을 한 개인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양성은 타자를 수많은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선입견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타인을 파악할 줄 아는 것이다. 타인을 다양한 방식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다양성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340쪽)


데릭 젠슨이 생각하는 진짜 다양성이란 ‘나무, 물고기, 인간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잘 써먹을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그들을 이용해서 이익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마주할 수 있는 인간 공동체의 능력이다.’ 다양성은 생산에 대한 생각 없이 사는 삶이자 그냥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 댐으로 막히지 않고 산에서 바다까지 흐르는 강물, 풍부한 야생의 문화들이다. 다양성은 사는 것처럼 사는 삶이다. 다양성은 인간과 생명체의 통제되지 않으며 통제될 수 없는 흐름이다. 이런 다양성을 통해, 하나의 대상에서 개개인의 개성을 갖춘, 인격을 갖춘 한 사람으로, 생산의 도구가 아닌 생명을 지닌 존재로, 경제적 이윤을 남길 대상이 아닌 생명을 지닌 존재로, 자연을 비롯한 사람 하나하나를 생각할 수 있다면,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이 지구에 혐오는 더 이상 뿌리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경제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바꾼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새로운 홀로코스트나 마찬가지이다. 홀로코스트 때 제노사이드 참가자들 대부분은 유대인 아이들에게 직접 총을 쏘지 않았고 가스실에 가스를 틀지도 않았다. 관료 대부분은 메모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회의에 참가했을 뿐이다. 나치는 인간을 죽였지만 오늘날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참여했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단지 지구를 죽이고 있다.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말이다. 대기업 간부들은 나치 고위층처럼 어떻게 생산과 통제를 극대화할지,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착취할지 여념이 없다. 이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것, 의문을 갖는 것만으로도 혐오를 멈추는 데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 채, 우리가 홀로코스트에 동조한 수많은 아이히만처럼 이 착취 경제와 그 경제를 바탕으로 성장한 문명이 주는 혜택에 젖어 그저 기쁘게 소비하기 바쁘다면 ‘우리 스스로 조용히 가스실’로 들어가, 혐오의 구덩이 속에 온 인류가 끝내 절멸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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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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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뒷모습 만큼 많은 것을 보여주는 신체가 또 있을까? 이 책에 실린 사진과 글을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만으로도 황홀한데, 미셸 투르니에의 섬세하고 예리한 통찰력이 담긴 글은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한다. 두 예술가가 빚어내는 환상의 세계, 더 말해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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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 검은 머리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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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어버린 한 남자와 한 여자, 두 사람이 서로의 상실과 상처, 외로움을 알아보고 함께 한다. 각자의 기억 속 사랑의 그림자를 헤매며 깨져버린 자기 사랑의 복원을 꿈꾼다. 그러나 그 욕망과 바람은 신기루와 같다. ‘파란 눈 검은 머리’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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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이던가,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을 처음 만났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키재기 외》라는 책. 몇 편의 단편을 읽었고, 그때 감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런 작가도 있구나. 여성으로 이런 작품도 썼구나 했던 것 같다. 최근 쏜살문고에서 히구치 이치요의 책이 세 권이나 동시에 출간됐을 때도 처음에는 무덤덤했다. 을유문화사 책과 목록을 비교하면서 이미 읽은 작품을 또 읽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꽃 속에 잠겨》에 실린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처음 보는 작품들이 아닌가. <키 재기>나 <섣달그믐> <십삼야> 등, 이미 읽은 작품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쏜살문고에는 이치요의 모든 작품 22편을 3권으로 나눠 실었다니, 흥미가 생긴다. 결국 세 권 모두 샀다. 2권인 《꽃 속에 잠겨》에는 이치요 최고 단편이라 불리는 <키 재기>를 비롯, <섣달그믐>, <십삼야> 등이 실렸으니 옛 기억도 되살릴 겸, 이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만연체를 좋아하지 않기에 처음에는 작품이 잘 읽히지 않았다. 한 문장이 꽤 길다. 더욱이 첫 번째 작품인 <파묻힌 나무>는 세상과 담쌓고 사는 고집스러운 화공의 이야기인가 싶어서 몇 쪽 읽다 말고, 다시 앞부터 시작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여성 작가이면서도 예술을 한답시고 세상과 담쌓고 사는 남자 이야기를 쓴 까닭은 무엇일까, 차라리 작가 자신의 고된 삶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풀어놓지 그랬을까, 살짝 의아한 마음이 들 즈음, 한 여성이 등장한다. 열세 살에 화필을 쥐고 16년 동안 부귀를 뜬구름으로 보며 살아온 화공 ‘라이조’의 여동생 ‘오초’가 바로 그 인물이다. 오빠의 재주가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생활력도 강하면서 다분히 희생적인 오초. 이 두 남매 사이에 ‘다쓰오’라는 남자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이 작품에서 오초는 히구치 이치요가 살았던 무렵, 즉 메이지 초기 시대 일본 여성답게 다분히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면이 강하게 그려진다. 그리 좋아할 만한 대상이 아님에도 어떤 모습에 반해서 누군가를 연모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행여 누를 끼칠까 애정을 억누르는 모습은 희생적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지점이 보인다. 다쓰오에게 선택되기를 바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을 내리는 사람은 오초 그녀 자신이다. 게다가 다쓰오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유도 그가 부유하거나 외모가 잘 나서가 아니라 그의 어떤 선한 행동을 보았기 때문이다.

《꽃 속에 잠겨》에 실린 몇 편의 단편 속 여자들은 ‘오초’처럼 순종적인 면도 있고 가족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1900년대 초, 일본 여성의 봉건적인 삶을 보여주는 듯해 답답한 마음이 조금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나름 살기 위해 제 스스로 애써 나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빠를 대신해 살림을 꾸려나가는 오초는 물론이며, 가난한 삶 속에 남의 집 하녀 노릇하며 제 한 몸 돌보기도 힘들 텐데 외삼촌 식구들까지 돌보고자 애쓰는 ‘오미네’(<섣달그믐>), 유곽에서 일하는 언니 뒤를 이어 자신도 언젠가는 유녀가 되어 자기 한몫을 오롯이 하겠다고 포부를 밝히는 어린 소녀 ‘미도리’(<키재기>),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들을 홀로 키워낸 ‘오치카’(<꽃 속에 잠겨>),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오치카네 집에 기거하고 있지만, 자신이 피해를 줄 것 같아지자, 선뜻 집을 떠나겠노라 말하는 ‘오신’(<꽃 속에 잠겨>) 등등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은 남자에 의지해 살아가지 않는다. 결혼한 여자라도 남편과의 생활에 불만을 품고 이혼을 결심하기도 한다(<십삼야>). 이렇듯 히구치 이치요가 그리는 여성 인물들이 희생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음에도 독립성을 잃지 않은 까닭은 그 자신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와 큰오빠의 죽음으로 16세에 호주가 된 이치요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계 수단을 소설로 삼은 전업 작가였다. 그녀 작품 속 여성들처럼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던 그녀는 그런 생활 속에서도 소설 쓰기에 매진해 스물넷이라는 짧은 생애 속에서도 이런 빛나는 작품들을 남겼다.

그래서 작품 속 여성들은 가난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섣불리 기대지 않는다. 사랑에서도 적극적이지는 않지만(못하지만),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남자보다 결단력이 있다. 자기 마음을 결정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요노스케’에게 혹시라도 짐이 될까봐, 그 곁을 먼저 떠나기를 선택하는 ‘오신’은 그에게 이렇게 담담히 자기의 심정을 말하기도 한다. “덧없는 세상이란 것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슬픈 것도 기쁜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며 포기한 신세에는 괴로울 때는 ‘괴로운 때가 왔구나.’하고 생각하고, 기쁜 때는 ‘기쁜 때가 왔구나.’하고 생각해요.” (<꽃 속에 잠겨>, 79쪽) 그림을 배우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하는데, 그림을 배워서 뭐 하려고 그러느냐는 요노스케에게 “그리울 때 모습을 그려서라도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요.”라고 똑똑히 자기감정을 말하는데, 그 말을 듣고 그저 가슴속으로 눈물만 짓는 요노스케에 비하면 오히려 당찬 느낌이다. 아들이 번듯하게 성공하기를 바라는 요노스케의 어머니 ‘오치카’도 어떤 면에서는 대장부 같다. 평범한 월급쟁이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아들에게 그녀는 ‘사람 마음은 제각각이니, 위태롭게 뜬구름에 오르려는 것보다 얽히고설킨 덩굴에 비쳐 드는 달빛을 팔베개로 바라보며 저 혼자 즐거운 게 더 흡족하다면’(63쪽) 그렇게 살라고 하면서도 자못 정색하며 이렇게 말한다.


불우한 덧없는 세상에 어떤 희망도 버리고 이끼에 내리치는 빗소리를 듣는 낙을 띳집의 처마 끝에서 맛본다면 달리 평온한 세월이 있을 테니 그건 그것대로 또 풍류가 있겠지만, 네 아버지가 서글픈 건 이도저도 아니셨던 인생사 때문이었다. 월급으로 날품팔이와 다름없는 일을 하며 길지 않은 삶을 조촐한 풍치도 없이 하직하신 것. (......) 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오랏줄에 매인 채 남의 말을 지키고 남의 지시에 따르다 공은 후세에 남을 것도 없이, 죽고 나서는 지기가 명복을 빌어 주고 자손이 제사를 지내주는, 그것만을 다름으로 삼으며 개나 고양이와 별반 차이도 없이 꿈속에서 지내다 연기처럼 사라진대도 너는 만족하느냐. 차라리 꿈을 꾼다면 미륵보살이 나타날 세상까지를 눈으로 감싸, 거짓이나 참이나 허위나, 아름다움이나 추함도 모조리 마음먹고 딱 삼켜 버리고는 이 세상에서 높이 날 마음은 없느냐. (<꽃 속에 잠겨>, 66~67쪽)



유녀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유곽에서 성장하는 소녀와 소년의 성장담인 <키재기>의 ‘미도리’도 당차기는 매한가지다. 이제 겨우 열네 살, 어린 미도리의 눈에는 남자라는 것이 조금도 겁나지 않고, 무섭지도 않다. ‘매춘을 그다지 천한 일로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과거에 언니가 고향을 떠날 당시 울면서 배웅한 일이 꿈처럼’만 느껴진다. 언니가 매우 잘 나가게 되어 부모님에게 효를 다하고 있는 것이 부러울 뿐이다. 그러나 일을 쉬지 않는 언니의 신세가 얼마나 시름겹고 고달픈지 모르는 열네 살 소녀에겐 그 삶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머리를 올리고 성인의 문턱에 들어선 미도리에게 더 이상 세상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첫사랑의 꿈도 좌절되고, 이제 자기가 알던 삶과는 다른 고단한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리라. 히구치 이치요는 성인의 문턱에 들어선 미도리처럼 어리고 젊은 여인들의 고단한 삶, 또는 그러해질 것이 분명한 삶을 섬세하고 예리한 눈으로 그려나간다. 그러나 그 시선을 한결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서정성에 있다. 아래와 같은 구절들을 읽노라면 깊어 가는 가을밤, 아름다운 한 편의 하이쿠를 읽는 듯해 책을 쉬이 덮을 수 없더라.



단풍 위에서 빛나는 달은 누가 숫돌에 얹어 갈았을까. (53쪽)

꽃에 뜨는 덧없는 이슬 같은 사랑이 다 뭐란 말인가. 우습구나. (61쪽)

활기에 넘쳐 뛰어 들어오는 저녁과는 반대로 새벽녘의 이별에 꿈을 싣고 떠나는 인력거는 쓸쓸하기 그지없다. (153쪽)

하늘에서 내리는 달빛과 햇빛은 모든 이에게 다름없고 봄에 피는 꽃이 주는 한가로움은 덧없는 세상의 만인에게 똑같을 텐데, 어째서 우듬지에 부는 폭풍은 여기서만 야단일까.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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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9-21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세기 일본 여성의 다양한 삶을 아름다운 문체로 썼네요. 처음 듣는 작가인데 24세에 요절했다니 그 능력이 아깝습니다.ㅠ

잠자냥 2020-09-21 16:50   좋아요 0 | URL
한 번 읽어보세요~ 그 이른 죽음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coolcat329 2020-09-21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권중 하나 추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잠자냥 2020-09-21 17:19   좋아요 1 | URL
대표작이 많이 실린 책은 아무래도 제가 읽은 <꽃 속에 잠겨> 이 책인 것 같습니다. 만일 이 책을 읽으신다면, 순서대로 읽지 마시고, 섣달그믐, 십삼야, 키 재기 등 이런 작품부터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ㅎㅎ

syo 2020-09-21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련님의 시대>에서 히구치 이치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뭐지뭐지 하면서 을유판 <키재기 외>를 읽었었거든요. 저는 만연체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그런가, 아우 좋아 막 이러면서 읽었습니다. 근데 다 까먹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가 무슨 소용이죠?? ㅋㅋㅋㅋㅋ큐ㅠㅠㅠㅜ

잠자냥 2020-09-21 22:2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예전에 읽은 게 이렇게 새롭게 다가오다니 참, 허무하더라고요. 을유판 <키재기>에 달려 있는 쇼 님 글 오랜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20-09-21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꽃 속에 잠겨> 추천해주신 순서도 같이 기억할게요. 감사합니다 ☺
 
꽃 속에 잠겨 쏜살 문고
히구치 이치요 지음, 강정원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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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오래된 이야기라는 느낌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운지, 작품 하나 하나가 한 편의 서정시 같다. ‘단풍 위에서 빛나는 달은 누가 숫돌에 얹어 갈았을까’ 이런 표현들, 깊어가는 이 가을밤에 더없이 어울리는 작품들. 25세에 요절하지 않았다면 또 어떤 작품을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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