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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앞 장에서 언급된 남자들의 치근거림이 처음에는 조서에 다정함으로, 즉 "신사들이 다정하게 대했다"라는 식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 카타리나 블룸은 몹시 분노하며 있는 힘을 다해 반대했다. 개념 정의를 두고 그녀와 검사들 혹은 그녀와 바이츠메네 사이에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카타리나는, 다정함은 양쪽에서 원하는 것이고 치근거림은 일방적인 행위인데 항상 후자의 경우였노라 주장했다. 심문에 참여한 신사들이, 그런 것은 모두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심문이 보통보다 더 오래 걸리면 그건 그녀 탓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치근거림 대신 다정함이라고 쓰여 있는 조서에는 절대 서명할 수 없다고 했다. _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p15/92
하인리히 뵐 (Heinrich Boll, 1917 ~ 1985)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에서 카타리나는 은행강도 괴텐의 도주를 도와준 혐의로 인해 검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 한다. 신문 과정에서 괴텐과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검사들과의 빚어지는 갈등도 카타리나를 힘들게 하지만, 정작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언론사 <차이퉁>의 악의적인 보도다.
이 순간에야 비로소 카타리나는 이틀 치 <차이퉁>을 핸드백에서 꺼내 보고, 국가가 이런 오욕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주고 그녀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지 물었다. 심문할 때 거론된 세세한 사항들을 어떻게 <차이퉁>이 알게 되었는지, 게다가 어떻게 하나같이 왜곡되고 오도된 진술로 알게 되었는지 그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에서 하흐 검사가 끼어들어 당연히 괴텐 사건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지대한 터라 언론의 보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아직 기자 회견은 없었지만 카타리나의 도움 때문에 가능했던 괴텐의 도주로 인해 이제 불가피하게도 두려움과 격분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모욕적이고 어쩌면 중상일 수 있는 언론보도의 세부 사항들에 대해서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으며 수사 당국 내부에 '허술한 부분'이 있다고 밝혀지는 경우에는 당국이 그에 대해 소송을 걸고 그녀의 권리를 위해 도울 거라고도 했다. _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p31/92
검찰과의 다툼이 조서에 사용될 언어에 관한 것으로 작은 싸움이라면, 언론사와의 다툼은 인과관계라는 보다 큰 싸움이었다. 그녀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런 사람이었기에 은행강도의 공범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언론이 짜놓은 프레임 속에서 그녀를 둘러싼 모든 과거와 관계들은 그녀를 공범으로 적시하는 근거로 재정립되버렸다.
'공공의 이익'과 '알 권리'를 위해 한 개인의 삶이 무참하게 파괴되면서, 개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피의자로 의심하는 다른 기관인 국가의 도움을 받아 왜곡 보도를 시정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카타리나 블룸이 처한 소설 안의 현실이다. 언론사 <차이퉁>에 의해 의도를 가지고 편집된 사실관계가 연일 계속되는 보도로 진실로 대중에게 인식되면서 주위는 물론, 자신마저도 자신 안에 숨겨졌을지 모를 의도를 의심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녀가 취한 행동은 과연 범죄인가, 정당방위인가?
먼지 하나 없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데도 갑자기 자신의 서재가 몹시 지저분하게, 거의 뒤죽박죽이고 더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저 빨간색 가죽 의자가, 거기에 앉아 많은 일을 잘 풀어 나갔고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었으며 정말 편안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저 빨간색 가죽 의자가 갑자기 그리도 거슬리는가, 무엇 때문에 책꽂이조차 역겹게 느껴지고 벽에 걸린, 자필 사인이 있는 샤갈 그림이 마치 화가 자신에 의해 조작된 모조품인 듯한 의심이 드는가? 재떨이, 라이터, 위스키 병. 비싸긴 해도 해로운 것은 아닌 이 대상들에 대해 반감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_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p48/92
분명 소속 기자 퇴트게스의 잘못으로 카타리나의 어머니를 사망케 한 <차이퉁> 사는 이제 <존탁스차이퉁>에서 카타리나가 어머니의 사망에 책임이 있다고 묘사하고,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슈트로입레더의 두 번째 집, 즉 별장 열쇠를 훔친 혐의까지 뒤집어씌웠다! 이것은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진상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차이퉁>의 모든 비방, 거짓말, 왜곡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_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p62/92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여러 면에서 19세기 말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을 떠올리게 한다. 1871년 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해 악화된 국내 정세를 뒤집기 위해 유태계 장교인 드레퓌스에게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 씌워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 카타리나 블룸의 사건에 이러한 국내 정세가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드레퓌스 사건 당시 극우언론에 의한 사실왜곡과 차이퉁에 의한 편파/왜곡 보도는 카타리나 블룸의 사건과 궤를 같이 한다. 이러한 언론에 의한 관계 왜곡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없다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을까. 슬프게도 그렇지는 못한 듯하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통해 독자들은 현대 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막강한 권력에 대해 절실하게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진실을 밝게 비춘다는 언론. 그렇지만, 언론으로부터 비춰지는 사실보도라는 조명이, 언론지형에 따라 다르게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언론이 해야할 바는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논조'라는 빛을 줄이고, 대상으로부터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흐릿한 형체를 보다 확대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빌어먹을 사실들, <차이퉁>의 사실들 말이다. <차이퉁>은 그들 자신들의 범죄 행위만 좋아하고, 맘에 들지 않거나 분명하지 않은 사실은 모조리 조작한다. 심지어 조작되지 않은 사실조차 그 신문에서는 거짓말로 보이게 되어 완전히 거짓으로 흡수된다. 간단히 말해, 그 신문은 진실을 '진실에 맞게' 재연해도 진실을 더럽힌다... 주위에는 다이너마이트가 놓여 있고, <차이퉁>은 늘 거짓말을 해 대는 파괴적인 초강력 주둥이로 경찰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거나 경찰에서 정보를 입수하면서, 헤드라인, 혐의, 비방, 비열함을 마구 내휘두른다. _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p7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