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비록 이런 위기 속에 있지만, 아까 말씀드렸던 사회적 합의와 갈등의 조정, 그리고 국민적 컨센서스를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도약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외국의 사례를 봐라, 둘째는 통계를 봐라, 셋째는 빅 데이터를 봐라, 이렇게 보면 미래가 보이고 세상이 보인다는 게 제 지론이지요. 큰 그림을 얻는 거에요.(p30) <박원순과 도올, 국가를 말하다> 中
2016년 촛불 혁명과 이어진 탄핵과 대통령 선거. <박원순과 도올, 국가를 말하다>는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자 중 한 명이었던 박원순 시장과 도올 김용옥 교수의 대담을 담고 있다. 경제, 문화, 교육, 국방 등 민감한 사회 현안에 대해 노철학자는 원론과 방향에 대해 말을 한다면, 행정가는 현실을 바탕으로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책으로 기억된다.
2020년 7월 9일. 박원순 서울 시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아직은 자세한 내용을 모두 알 수 없지만, 바로 직전 직원 성추행 피소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 사건과 박원순 시장의 갑작스런 죽음은 정황상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민권운동가로서 3선의 서울 시장으로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고인. '성추행 피소'건은 그에게 큰 수치심을 안겨 준 것은 아닐까. 평소 인권(人權)을 강조하던 그였기에 만약 이로 인해 유죄판결을 난다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한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아프지만, 정말 조심스럽게 넘겨짚어본다. 그렇지만, 이 역시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고프먼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수치심을 겪는 사람은 개별성과 존엄성을 지닌 고유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존재다. 보다 일반적인 면에서 보면 일탈자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면서, 자신을 수치심을 느끼는 이들보다 위에 있는 '정상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처럼 수치심은 사회 구성원을 서열화하는 작용을 한다.(p422) <혐오와 수치심> 中
박시장의 이러한 선택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박시장이 성추행을 저질렀다면 엄중하게 조사가 이루어져야 했고, 판결 결과에 따라 처벌 또는 무혐의 등의 조치가 이루어져야 했다. 만일 피소가 사실이라면 개인에게는 소명의 기회를, 사회 전체로는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계기로 삼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박 시장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의 선택에는 사실 조사 이전에 언론에 의한 무차별 보도, 검찰에 의한 마녀사냥식 수사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보안법 전문가로서, 인권운동가로서, 서울시장으로서 그가 세운 수많은 업적이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잊혀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생긴다. 물론, 상황을 잘 알지 못하기에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고인의 불명예스러운 마지막 길만 사람들에게 남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든다.
죄책감은 [죄를 저지른] 사람과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구분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존엄을 존중하는 것과 완전히 양립할 수 있다.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면서도, 그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고 궁극적으로 사회에 재통합될 수 있다는 생각을 여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p425) <혐오와 수치심> 中
이와 함께, 고인이 느꼈을 '다가올 수치심에 대한 두려움'은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하여 안타깝다. 자신의 주변인물들이 겪을 심적인 고통과 함께 (만일 성추행 의혹이 직접적인 원인이라면) 피고소인이 안게 될 마음의 짐 도 고려하여 한 번 더 생각해봤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만 뒤늦게 해본다.
유능하면서도 인간적인 정치인이었기에 그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동시에, 인간이 가지는 한계와 최근 불거지는 여러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다음 과제 중 하나는 성인지 감수성이 아닐까 싶다. 성(性)과 관련한 사건이 일회성 관심을 받고 흐지부지 되는 결론으로 끝나지 않도록, 제도적인 방지책 마련과 사회의 인식 확산을 이제는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모든 생각의 근거는 박시장의 죽음이 성추행 피소와 연관되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좀더 명확하게 드러날 때까지 미뤄두도록 하자... 현재 분명한 것은 박시장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