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에 관해서는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언급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 關係論 입니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 存在論 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p23)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신영복(申榮福, 1941 ~ 2016)의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는 서양철학을 존재론으로, 동양철학을 관계론으로 규정한다. 존재론에서 개별 존재가 기본단위로 이로부터 확장을 추구한다면, 관계론에서는 기본단위가 망(網)이 된다. 마치 물리학에서 기본 단위를 '점'으로 보는 사상과 '끈 string'으로 보는 사상(초끈이론)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기초단위의 설정부터 두 사상은 다르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 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증식 自己增殖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p23)...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 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p24)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저자는 이러한 두 세계의 차이로부터 우리가 동(同)에서 화(和)로 나가야함을 강조한다. 존재론의 자기 증식적 성향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새로운 가치관의 변환을 촉구한다. 저자에게 고전은 단순한 옛글이 아닌 현실 문제의 해결방안을 촉구하는 현실의 목소리다. 다만, 우리가 고전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하지만, 현대의 기준으로 과거를 평가하는 것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당대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평가에 저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동 同은 이를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 同의 논리를 화 和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p46)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 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 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p141)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 저자는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의 입장에서 고전을 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자본집중화로 인한 빈부격차와 인간소외, 신자유주의문제로 바라보는 저자는 인간관계의 회복을 통해 현대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오늘날의 주류 담론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와 세계화 논리는 한마디로 거대 축적 자본의 사활적 死活的 공세 攻勢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전개 과정이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본 축적 과정의 전형적 형태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와 존재론적 운동 형태를 지양하지 않는 한 다른 경로가 없기 때문이지요.(p33)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물로 설명하고 이를 상품의 이중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상품은 교환가치가 본질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감성이 상품미학에 포섭된다는 것은 의상과 언어가 지배하는 문화적 상황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지요.(p197)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생각해보면,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가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처음을 분업(分業)을 통한 효율적인 생산을 말한 것으로 시작하면서 근대 경제학은 생산 중심의 경제학으로 변모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지만, 같은 저자의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이 동감(同感)으로 부터 시작됨을 생각해본다면, 애덤 스미스의 경제철학에도 생산 이전에 교환이 중심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신영복 교수의 동양고전에 대한 성찰은 생산에서 교환 중심의 경제학으로, 근대 경제학의 시작을 <도덕감정론>으로 생각하는 학자의 현실 인식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영복의 인식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 )의 사상과도 통한다. 


 자본은 자기증식을 할 수 없을 때, 자본이기를 멈춘다. 따라서 언젠가 이윤율이 일반적으로 저하되는 시점에 자본주의는 끝난다. 그때 비자본제경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이 그 충격을 흡수하고 탈자본주의화를 돕는 일이 될 것이다. 명확한 것은 생산 과정에 대한 과도한 중시와 유통과정의 경시가 자본의 축적과정에 대응한 대항운동을 실패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정하는 데에는 좀 더 근본적으로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에서 보는 시점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p413) <세계사의 구조>中


 저자는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 '존재론-관계론'의 문제를 경제학에 대한 인식으로 끌어갔지만, 저자와 배경지식이 다른 이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문명(文明, culture)를 바라보는 아널드 J.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CH,1889 ~ 1975)와 정수일(鄭守一, 1934 ~ )의 입장 차이는 존재론과 관계론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를 정리해보자. 결론은 두 종류의 관계, 즉 동일한 사회 내부의 부분사회(커뮤니티) 간의 관계와 서로 다른 사회 간의 관계는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p44)... 이해할 수 있는 역사 연구의 단위는 민족국가도 아니요 정반대인 인류도 아니며, 다만 우리가 사회라고 이름 붙인 어떤 종류의 인간 집단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게 될 것이다.(p49) <역사의 연구 Study of History 1> 中


 씰크로드학의 핵심은 씰크로드를 통한 문명의 교류상을 밝혀내는 것이다. 문명의 교류, 이것은 씰크로드학의 전편에 깔려 있는 밑그림이며 전장(全章)을 관류하는 물줄기다. 그래서 씰크로드학은 일종의 문명교류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명이란 인간이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통해 창출한 결과물의 총체로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으로 대별된다. 문명의 생명은 이러한 결과물에 대한 공유(共有)다.(p18) <씰크로드학> 中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는 저자의 깊은 성찰이 담긴 해설도 접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더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과거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바라보고 미래의 길(道)을 확인하는 자세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저자는 독자들에게 한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인문독서 입문서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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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1-25 1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차이를 인정하자는 것은 관계론이 아닌 존재론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차이 인정은 영원히 차이를 좁히지 못하여 존재를 고착화 한다는 주장인 것 같습니다. 존재론자들의 숨은 의도에 관계론자들이 여전히 많이 속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아무튼 새해 첫날부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즐건 설 명절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0-01-25 14:54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존재론과 관계론의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 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연휴 되세요!^^:)

초딩 2020-01-25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호랑이 2020-01-25 14:55   좋아요 0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설연휴에 복 많이 받으세요!^^:)

하나의책장 2020-01-26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행복한 설 연휴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0-01-26 11: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하나의책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평안한 연휴 되세요!^^:)

종이달 2022-05-22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2 23: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종이달님